# 184
50. 바알의 성 (3)
“이거, 혼자서 재미를 보고 계셨구만?”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흑마가 가장 먼저 보인다.
그리고 잠시 안력을 집중해서야 그 위에 올라타 있는 검은 피부의 마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흑마와 완전히 동화된 그 모습.
마왕 제66위 키메리에스다.
“키메리에스!”
절로 반가운 표정이 얼굴에 깃드는 세에레와 달리, 세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새로운 마왕의 출현.
현재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시끌시끌하고 기분 나쁘면서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말을 하던 키메리에스가 짧은 소도를 꺼내 들어 가볍게 검신을 핥았다.
“이거 아주 대어구만.”
몸을 사선으로 놓고 앞뒤를 견제하는 세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지금의 몸 상태로 마왕 두 명.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지닌바 무력이 마왕 중에는 하위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마왕은 마왕.
그 이름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다가는 바알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모든 힘을 소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은은 이내 양손에 달과 별의 검을 꽉 쥐었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
여기서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원래 전투라는 것이 항상 유리한 장소, 유리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이 둘도 상대하지 못하면 바알도 상대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바알과 다른 마왕들의 차이는 바로 그 정도.
세은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곳에서 이렇게 약한 마음으로 개죽음을 당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고, 그 방법을 손에 넣어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비록 처음의 예상보다 더욱 힘든 전투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벌어질 전투라면 선공으로 나선다.’
타앗―
세은이 순식간에 키메리에스에게로 달려 나갔다.
어차피 가슴에 깊은 검상을 입은 세에레는 쉽게 도우러 움직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세에레를 처리하려다가 뒤를 잡히느니, 멀쩡한 키메리에스를 먼저 잡는 것이 나았다.
쾅―!
“어딜!”
키메리에스의 소도가 세은의 공격을 막아냈다.
히이잉―
사방으로 퍼지는 충격에 키메리에스의 흑마가 울부짖는다.
“크읍!”
그리고 이어지는 흑마의 공격.
주인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는 군마.
바로 그 자체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흑마의 린치를 힘겹게 피해낸 세은은 그대로 다시 반대 손을 뻗었다.
꽈아앙!
또 다시 강렬한 기파가 넘실거린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주변을 몰아치는 충격에 흑마가 또 다시 울음을 내뱉었다.
키메리에스라면 몰라도, 흑마는 지금의 충격을 견뎌내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칫!”
결국 키메리에스는 혀를 차며 흑마의 등에서 내려왔다.
동시에, 다시 세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탓―!
키메리에스도 마찬가지로 땅을 밟고 몸을 마주 날렸다.
쩌어엉!
또 다시 둘의 검이 부딪힌다.
방금 전과 다를 바가 없는 반복적인 합과, 합.
“크흐…….”
아니, 같지만 달랐다.
흑마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키메리에스의 입에서 드디어 한줄기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아앗!”
그리고, 그사이 어느 정도 부상을 추스른 세에레가 다시 전투에 참전했다.
무방비 상태인 뒤에서 공격이 날아오는 위험한 상황.
그러나 세은은 오른 다리를 축으로 그대로 몸을 돌렸다.
텅―!
막고, 찌른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상대에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쉐엑―
“크으으으!”
이미 한 번 기세가 꺾인 세에레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세은의 공격에 계속해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참에 숨을 고른 키메리에스가 다시 공격해 왔다.
콰아앙―!
신들린 듯한 세은의 방어!
세은의 집중력은 세에레, 키메리에스와 검을 주고받을수록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이 둘을 상대하고 바알을 마주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지워 버렸다.
마왕 둘은 여력을 남기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힘을 아끼다가 낙마하는 것만큼 웃기는 일도 없다.
‘우선 하나를 먼저 처리한다.’
타아앗―
목표는 세에레.
세은은 방금 키메리에스의 검을 막은 자세 그대로 신형을 휘돌려 세에레를 공격했다.
카앙―
세에레의 검과 맞부딪힌 달의 검이다.
체중과 회전을 실은 세은의 공격에 세에레의 몸이 휘청거렸다.
쉐엑―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몸을 계속 회전해, 왼손에 있는 별의 검을 다시 한 번 세에레를 향해 내친다.
콰아앙―
결국 세에레는 마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냉정을 잃고 있는 것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이 대 일의 상황에서 이토록 수세에 몰린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무차별적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끝.
고작 한 끝 차이다.
다 회복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신성력을 온전히 운용하지 못하는 미묘한 차이가 계속 세은을 붙잡았다.
“큭! 시렌 이 개새끼!”
정작 세은 본인은 그 작은 차이를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그를 상대하고 있는 세에레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자신이 밀리는 모습이 충격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농락하려고 검만 쓰는 인간에게 밀리고 있는 판국.
실상은 검밖에 쓰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세에레가 모든 상황을 전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꽈아앙―
세은이 세에레에게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 뒤에서 들이치는 키메리에스.
세은은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오른발을 걸어 중심을 흔들었다.
“윽?”
오른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키메리에스가 중심을 잃고 흔들거렸다.
세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세에레에게 달려든다.
단 몇 초의 기회.
그러나 단 1초만으로도 승부가 갈릴 수 있는 것이 전투다.
몸을 돌려서 세에레에게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세은의 검이 절묘하게 빈틈을 찔러 들어갔다.
설마 바로 다시 자신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상황.
세은의 검이 그런 세에레의 급소를 노렸다.
텅―
또 다시 아슬아슬하게 세에레가 세은의 공격을 비껴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세은은 살짝 비껴난 검을 그대로 찔렀다.
“…….”
푸욱―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다.
관통된 상처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온다.
비껴나갔지만 공교롭게도 세에레의 팔이 경로상에 위치해 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진 세에레의 팔에서 세은이 검을 뽑아냈다.
“하압!”
그리고는 별의 검을 휘둘러 세에레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들었다.
‘온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키메리에스가 아니다.
뒤에서 손을 치켜 올리는 키메리에스의 모습이 마치 두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세은은 이번에는 몸을 돌려 공격을 막지 않았다.
푸슈웃―!
“커허억…….”
제대로 세에레의 목을 파고든 세은의 검.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로, 키메리에스의 소도도 세은의 정수리 위까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피하기도, 막아내기도 애매한 시간.
쩌어엉!
그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바로 정수리 위에서 느껴지는 충격.
세은이 그대로 몸을 앞으로 굴려 충격에서 멀어졌다.
“오세?”
갑작스럽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놈을 바라본 키메리에스의 눈이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건 세은 역시 마찬가지.
잔뜩 날카로워진 집중력으로 무엇인가가 자신을 돕기 위해 날아온다는 사실은 감지한 터였다.
그러나 그 도움을 준 당사자가 마왕 제57위인 오세라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마왕이 자신을 돕는다니.
그러나 정작 오세 역시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끄응……. 신성력을 쓰는 조력자를 도우라 해서 왔더니, 시렌이라니. 아바돈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이게 무슨 짓이냐, 오세!”
분노로 가득 찬 키메리에스가 외쳤다.
“마왕의 자리에 오른 이가 마신의 뜻에 반하는 시렌을 도와?”
“어이어이. 말이 심하네.”
키메리에스의 노호성에 오세가 인상을 가득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단순히 바알을 잡기 위해 힘을 합친 거라고?”
“그게 바로 배신이다!”
“배신이라니? 내가 손을 잡은 건 시렌 이놈이 아냐. 마족이다.”
“개소리!”
오세의 대답에 키메리에스가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뭐, 설명하기에는 상황이 복잡한 것 같고…….”
오세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세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꺼져라. 신의 개.”
“……응?”
“마음에 안 들지만, 생각해 보면 아바돈이 네놈의 얼굴을 알 리가 없지. 개새끼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맹약에 얽매인 이상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지.”
쩌어엉―
“어딜 가느냐!”
오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키메리에스가 다시 세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오세의 카타나가 키메리에스의 앞을 막았다.
“빨리 꺼지도록. 더 이상 이몸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말이야.”
“병신.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세은은 말을 마치고 빠른 속도로 몸을 내달렸다.
어찌 되었건 천우신조다.
이런 기회를 그냥 저버릴 수는 없었다.
“비켜라, 오세! 나를 막지 마라!”
키메리에스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면서 소리쳤다.
다른 이도 아니고, 마왕에 오른 이가 신의 개를 보호한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신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
“글쎄?”
무시무시한 말에도 오세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마신께서도 맹약에 얽혀서 어쩔 수 없이 한 번 도와준 건 관대하게 이해하실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건 맹약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끝까지 막겠다는 것인가!”
“그렇지?”
오세가 카타나의 끝을 키메리에스에게로 향했다.
“바알부터 네놈들까지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마계를 인간계처럼 만들겠다고?”
“흥. 그럼 지금처럼 마구잡이로 죽이고, 정복도 실패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아니지.”
오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왜 오직 바알의 아래에 뭉쳐야 하는 거지?”
“뭐?”
“굳이 인간계를 따라하겠다면, 완전히 따라해야 할 것이 아닌가?”
키메리에스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오세의 말이었다.
오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바알이 제1위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중심이 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아.”
“무슨……!”
“훗. 물론 바알이 가장 강한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감히 위에서 우리를 조종하려는 바알의 태도는 참을 수가 없다.”
“그러는 네놈이 다른 마족에게 휘둘리는 모습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다르지.”
키메리에스의 말에 오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리는 전혀 모르는 관계가 되는 거다. 그리고 이기는 자가 모든 것을 갖게 되는 것이지.”
오세의 입에서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도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바알의 앞에 개처럼 기면서 간이든 쓸개든 모든 것을 바치는 병신들과는 달라!”
오세가 카타나를 위협적으로 허공에서 휘둘렀다.
“말이 많았군. 어차피 지레 겁먹고 바알의 밑으로 기어 들어간 쓰레기에게 말이야.”
“이 개새끼!”
노골적인 오세의 도발에 키메리에스의 눈이 뒤집혔다.
탓― 타앗―
그리고, 두 마왕의 검이 서로를 향해 짓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