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50. 바알의 성 (1)
연회의 분위기는 황량했다.
마왕 서열 제1위, 바알.
그의 존재감이 분위기를 그대로 압살한 탓이다.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오직 둘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은.
그리고 릴리트.
그 둘을 제외하고는 방금 전 목격한 바알의 신위에 대해서 입방아를 찧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일단은 연회를 즐기시면 됩니다.”
“응?”
“혹시 배가 고프시면 식사를 하셔도 좋고, 컨디션에 지장이 없으면 음주도 괜찮습니다.”
릴리트의 여유만만한 대답에 세은이 두 눈과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는 되물었다.
“언제 시작인데?”
“신호가 오면 시작입니다.”
“그 신호는?”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너무 많이 숨기는 거 아니야? 신호가 있을 때 서로 떨어져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릴리트가 말을 하며 세은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제가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요.”
“흐음…….”
몸매의 선을 살리는 복식.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미모.
그런 릴리트가 그런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인간이 아닌 몽마라는 것을 아는 세은은 그런 릴리트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말투로 릴리트에게 말했다.
“뭐, 상황이 그렇게 생각한 대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렇게 될 겁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릴리트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니까 다행이고.”
세은은 몸을 일으켜서 음식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하니 심심한 입이라도 달래려는 의도에서였다.
릴리트는 세은이 일어나자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마치 화장실까지라도 따라올 것 같은 기세.
그러나 세은은 개의치 않고 연회장에 준비된 음식을 가지러 움직였다.
“뭐 좀 먹지?”
“괜찮습니다.”
접시에 음식을 담으며 세은이 릴리트에게 말했다.
하지만 릴리트는 정중하게 그런 세은의 말을 거절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릴리트의 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처음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슴이 뛰어서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혹시 배가 고프다고 하더라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상태였다.
“그럼 뭐.”
세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접시에 음식을 몇 가지 더 담았다.
먹지 않는다는데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아닌 척해도 세은의 눈에는 그녀의 긴장이 다 보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지만,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름 대계를 앞두고 있으니 당연히 긴장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잠자코 그런 릴리트가 자신을 따라다니게 놔둔 세은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정말로 이렇게 기다리면 되는 거라고?”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묻는 세은의 태도에 릴리트의 미간에 아주 미세한 금이 그어졌다.
“그렇습니다.”
가뜩이나 긴장해 있는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하니 좋은 대답이 나올 리가 없다.
그러나 세은이 할 일이 없어서 그녀를 괴롭히려고 같은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꿀꺽―
잠시 입안 가득 욱여넣은 음식을 꿀꺽 삼킨 세은은, 들고 있던 식사용 나이프를 들어 릴리트의 뒤를 가리켰다.
“하지만 다른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예?”
세은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릴리트는 의아함을 드러낸 표정으로 반문했다.
“……?”
그러나 이내 세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릴리트는, 두 명의 마족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이. 몽마 계집.”
거대한 마족 둘이 샹들리에에서 내려오는 조명을 막고 서 있었다.
어쩐지 갑자기 주변이 조금 어두워졌다 했더니, 이 둘이 바로 뒤에 서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시죠?”
본능적으로 눈앞의 마족 두 명이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 릴리트가 말을 높였다.
비록 방금 전에 바알이 난동을 부린 두 마족을 즉결 처분하는 모습을 봐서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두 마족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계획이 잘 풀려서 아바돈이 마왕의 위에 오르면 다 발아래에 둘 수 있는 놈들에 불과했다.
“방금 전 바알에게 꼬리를 치던 놈의 계집 같은데 말이야.”
릴리트를 처음 부른 마족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거 참. 기분이 더럽군그래. 바알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그렇게 꼬리를 치는 건가?”
우물우물―
세은은 여전히 입안 가득 음식물을 넣고, 지금의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기실, 자신에게 시비를 걸지 않으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정체가 들키면 곤란한 것은 릴리트가 아니라 세은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릴리트도 굳이 세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파아아아아―
아니, 사실 릴리트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덜그럭― 덜그럭―
이번에는 세은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양쪽에서 뿜어내는 기파가 중간에서 맞부딪힌다.
때문에 애꿎은 세은의 식사만 방해를 받는 중이었다.
“뭐냐?”
릴리트에게 말을 걸었던 마족이 심상치 않은 기운에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아니, 나와 친한 마족에게 용무가 있는 것 같아서.”
뒤에 있던 마족이 더욱 성큼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했다.
“응?”
어딘가 익숙한 뒷모습에 세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눈에 익은 외형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세은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리고 이내 자신의 입을 황급히 닫았다.
자신이 상대를 알아본 만큼, 상대도 자신을 알아볼 수가 있으니까.
그러나 다행히 그 마족은 앞의 상대와 기세를 주고받느라 세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흥. 힘이 약하니 여기저기 몸이라도 대준 모양이지?”
시비를 건 마족의 신랄한 인신공격에, 릴리트를 위해 앞으로 나선 마족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플라우르스, 네가 마왕이라지만 나 역시도 마왕이다. 네놈은 바알에게 꼬리치는 이 모습을 보고도 자존심이 없는 거냐?”
마왕 서열 64위, 플라우르스.
표공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과거와 미래를 개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예지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의 두 눈에는 불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권능이 깃들어 있다.
“호오. 나를 알고도 이렇게 나온다고?”
플라우르스가 더욱 싸늘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마왕인 자신을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자신을 앞에 두고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는 사실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흥. 이래서 마왕 놈들이란…….”
눈앞의 마족은 당당한 표정으로 가슴을 쭉 피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안드로말리우스를 대신해서 마왕의 위에 오른 아라오크라고 한다. 같은 마와…… 컥?”
쩌어엉―
자신을 새로운 마왕이라고 밝힌 아라오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플라우르스가 몸을 날려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불시의 기습을 당했지만 아라오크는 겨우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다.
하지만 상당한 충격을 받고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고 나서야 충격을 해소할 수가 있었다.
“하아. 하여간 마왕이라고 다 같은 마왕인 줄 알아요.”
플라우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너 새끼 말대로 같은 마왕이라도 지켜야 할 태도가 있는 법이지. 특히 너처럼 약해 빠진 놈은 말이야.”
“뭐, 뭣이?”
신랄한 플라우르스의 말에 아라오크가 발끈했다.
그러나 플라우르스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마왕이 됐다고 네까짓 게 나와 동급이라고 생각한다고?”
플라우르스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화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 정말로 할 생각인가? 플라우르스!”
그 모습에 아라오크가 노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플라우르스의 입에서는 간단한 대답만이 흘러 나왔다.
“그럼, 장난인 것 같아?”
화르륵―
플라우르스의 눈에 모인 화염이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치잇!”
아라오크가 결국 자신의 날개를 펼치며 위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두 마왕의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연회장 2층이다.
그러나 방금 전과는 달리 마왕들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쉽사리 휘파람을 불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다음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일.
마족들은 그저 흥미진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일단 피하시죠.”
그사이 릴리트는 어느새 두 마왕 사이에서 빠져나와 세은에게 넌지시 일렀다.
세은 역시 이런 상황에서 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또 저 플라우르스 때문에라도 순순히 릴리트의 말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잘못 휩싸였다가 방어한답시고 신성력이라도 써버리면 큰일이었으니까.
두 마족이 서로에게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릴리트와 세은은 연회장 1층으로 몸을 피했다.
“플라우르스는 뭐야?”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자 세은이 릴리트에게 물었다.
릴리트는 이번에는 세은의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바돈님의 동료입니다.”
“동료?”
“예.”
릴리트의 말에 세은이 이번에도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대답하는 릴리트의 표정은 담담했다.
“무슨 마족 놈들이 동료가 있어?”
“같은 뜻을 공유하는 자가 있는 것이 이상합니까?”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말이야.”
너무나 정석적인 릴리트의 말에 세은은 할 말을 잃었다.
막상 이렇게 얘기를 들으니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곧 오히려 다른 의문이 세은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런데 말이야.”
“예.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바알이랑 생각이 더 비슷하지 않아?”
“다릅니다.”
“어디가?”
“지금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하여튼 다릅니다.”
어딘가 억지스러운 릴리트의 말이었지만, 세은은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콰앙―!
플라우르스와 아라오크가 격돌하는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이러다가 바알이 나오면 전부 꽝 아니야? 저 표범 새끼도 우리 동료라며?”
세은이 어딘가 미묘하게 신나 보이는 플라우르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플라우르스를 상대하는 아라오크는, 어딘가 진지해 보였다.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건 또 왜?”
“이제부터는 각자 싸움을 시작하니까요.”
“응?”
쩌저저적―
“커헉?”
릴리트의 그 말과 동시에 갑자기 연회장 안의 마족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뭐야?”
살짝 당황한 세은의 말에 어느새 긴장이라고는 다 털어버린 릴리트가 대답했다.
“마족들의 천성이 이런데 어떻게 전투가 나지 않을 수 있나요? 제대로 집단 전투가 벌어지는 걸 신호로, 계획을 시작하기로 했었습니다.”
“이게 다 아바돈 편이라고?”
모든 연회장이 순식간에 싸움판으로 변해 버린 상황을 보며 세은은 어이가 없었다.
“그럴 리가요.”
그러나 릴리트의 답변은 간단했다.
“마족이니까요.”
“……병신들의 모임이란 소리네.”
릴리트는 이번에는 세은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할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 소란을 기점으로 밖에서도 계획이 시작됐을 겁니다.”
“뭐?”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세은이 또 다시 되물었다.
콰콰쾅―
그리고 동시에 바깥에서 커다란 폭음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