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49. 계획의 시작 (3)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세은은 릴리트를 따라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아바돈과 어느 정도 미리 얘기가 된 사안 같았다.
연회장에서는 마족들이 쉬는 시간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마치 커다란 뷔페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인원들이 전부 마족이라는 사실이 일반적인 뷔페와는 다른 점이었다.
연회장은 3층까지 만들어져 상당한 넓이를 자랑하였다.
릴리트는 세은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호오. 왔어?”
2층에는 역시나 아바돈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세은은 자연스럽게 아바돈과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자리에 앉자마자 세은이 또 다시 다음 계획을 물었다.
그러나 아바돈은 가만히 손을 올려 지나가는 시종이 들고 있는 와인을 한 잔 집어 들었다.
“……이게 뭐하는 거야?”
정말로 인간들의 연회와 다를 바가 없는 구성이었다.
세은은 자신이 마계에 있는지 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바돈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알을 칭찬했다.
“흐음. 바알의 이런 점은 마음에 든단 말이야. 단순히 무식하기만 한 다른 놈들과는 달라.”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와인을 입가로 가져가 가볍게 한 모금 머금었다.
세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아바돈과 마찬가지로 시종을 불러 와인 한 잔을 손에 들었다.
“후후. 조금 기다리면 어차피 일이 생길 거야.”
세은이 묻기를 포기하고 와인을 마시자 아바돈이 그제야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은은 그런 아바돈의 말에 될 대로 되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리고 잠시 뒤.
“이 개새끼야!”
타다당― 쾅!
“커헉!”
갑자기 연회장의 1층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어났다.
“되다만 마족 새끼가 뭐?”
“반푼이 새끼가 꼴에 자존심은 살아 있군. 퉤!”
먼저 한 방을 얻어맞은 마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피가 섞인 침을 뱉어냈다.
갑작스런 난투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마족들은 단 하나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눈으로 커다란 원을 만들어 둘의 싸움을 구경할 자세를 취했다.
소란에 아래를 내려다보는 2층과 3층의 마족들도 1층의 마족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 좆같은 면상을 갈가리 찢어주마!”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은은, 이내 흥미를 잃고 자리에 등을 기댔다.
“하여간 마족 새끼들이란…….”
세은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알이나 아바돈 같은 놈들이 이상한 거다.
애초에 싸움이랑 파괴밖에 모르는 마족 놈들을 이렇게 한 공간에 몰아넣었는데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무엇인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세은 자신도 아는 걸 바알이 모를 리가 없었다.
“말로만 주절거리지 말고 덤비시지? 하찮은 새끼야!”
먼저 선방을 맞은 마족이 다시 상대방을 도발했다.
이곳에 초대받을 정도면 다들 한가락씩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마족들이 모여 있다 보니, 싸움을 구경하는 주변 마족들의 눈에서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치잉―!
질펀하게 욕을 얻어먹은 마족의 양손에서 날카로운 뼈가 튀어나왔다.
“휘익!”
“화끈한데!”
본격적으로 유혈 사태가 발생할 것 같은 모습에 주변의 마족들이 덩달아 흥분하기 시작했다.
콰직―!
그리고 마찬가지로 먼저 얻어맞은 마족 역시 등 뒤에서 한 쌍의 날개를 꺼내 들었다.
“거 시끄러워서 밥을 못 먹겠네. 언제 끝나려나.”
오직 세은만이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세은의 태도에 릴리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소한 보시는 척이라도 하시는 것이…….”
“왜?”
세은의 반문에 릴리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런 싸움을 보지 않으면 마족이 아니니까요.”
“후우.”
릴리트의 말에 세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 마족 둘의 전투를 대충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뭘 기다리고 하는 거야? 어차피 이런 꼴만 계속될 텐데 말이야.”
세은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빨리 싸워라!”
“죽여라! 죽여라!”
그런 세은의 불만은 주변 곳곳에서 터지는 환호에 묻히고 말았다.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에 주변의 마족들이 흥분을 감추지 않고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역시 마족들의 정신세계는 정상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뒈져라!”
“흐아아압!”
그리고 주변의 환호가 더 이상 치솟다 못해 터지기 직전.
두 마족은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터엉―!
그러나 아쉽게도 주변의 마족들이 원하는 그런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뭐, 뭐냐?”
“크윽!”
갑자기 2층에서 뛰어내린 아바돈이 둘의 전투를 막아낸 것이다.
“응?”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세은이 당황했다.
그러나 릴리트가 당황하지 않는 것을 보아 미리 약속된 행동인 것 같았다.
주변 마족들의 환호는 어느새 야유로 바뀌어 있었다.
“우우우!”
“뭐냐!”
“방해하지 마라!”
주변 마족들이 그런 아바돈을 향해 한껏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아바돈은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고, 전투에 돌입한 두 마족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두 마족은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아바돈에게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방금 전에 아바돈이 둘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아바돈이 방어만 했을 뿐인데도, 손으로 전해지는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연회인데 그만하지.”
“우우우우! 물러나라, 미친 새끼야!”
“마족 망신시키지 마라!”
오히려 당사자들보다 주변의 마족들이 더욱 거세게 야유를 퍼부었다.
계속 방해하면 오히려 누군가가 아바돈을 공격할 것 같은 분위기.
한마디로 난장판 중에 난장판이었다.
“병신들.”
아바돈이 낮은 욕설과 함께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응?”
홰액―
아바돈의 욕설에 움찔하며 반응하려던 마족들은, 아바돈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킴과 동시에 느껴지는 존재감에 모두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오. 좋은 구경을 하려 했는데 실패했군.”
“허억?”
“헉!”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방금 전까지 유혈 사태를 벌이려고 했던 두 명의 마족이 놀랐다.
아바돈이 가리킨 방향에는 어느샌가 바알이 서서 싸움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막았지?”
“이걸 원한 것이 아닙니까?”
바알의 질문에 아바돈이 나름 공손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말을 높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굴욕적이었지만,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굴욕은 참을 수 있었다.
“호오. 왜 내가 이런 것을 원한다고 생각한 거지?”
“그렇지 않다면 이런 연회를 주최할 필요도 없지요. 멍청하고 무식한 놈들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후후. 대단하군.”
아바돈의 말대로 바알은 당연히 연회에서 문제가 생길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그동안 안에서 두문불출하느라 조금은 줄었을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과시하려고 했던 터였다.
감히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마족 두 명을 단숨에 참살한다.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바돈의 개입으로 그 계획은 시작도 해보지 못한 상황.
하지만 바알은 기분이 크게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는 또 다른 마족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아바돈이 바알을 가리키는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에는 충분했다.
성큼.
단 한 번의 걸음으로 순식간에 아바돈의 앞으로 온 바알은 주변을 정리했다.
“……어?”
“……?”
퍽― 퍼억―
순식간에 두 명의 마족의 머리가 날아가며 피가 튀었다.
비록 아바돈이 막아서 피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미 자신의 연회에서 소란을 일으킨 자들이었다.
이런 무식한 자들은 어차피 필요가 없었다.
자비 없는 바알의 손속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거, 이거.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군. 피를 봤는데 다들 즐거워해야지?”
그러나 방금 전 아바돈과 바알의 대화로 바알이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챈 상태.
그토록 원하던 피가 튀었지만 아무도 웃는 마족들이 없었다.
“참, 내가 없어야 다시 연회가 즐겁게 변할 것 같군.”
바알이 나름 풀이 죽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방해꾼은 잠시 빠져줄 테니, 연회를 더 즐기고 있게.”
아무도 감히 반응을 하지는 못했지만, 바알은 할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자네는 나를 따라오지.”
몸을 돌린 바알은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아바돈에게 말했다.
아바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런 바알을 따라 이동했다.
바알과 아바돈이 연회장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자, 설명해 봐.”
세은은 바알과 아바돈이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릴리트에게 물었다.
더 일찍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방금처럼 적막감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숨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그런 상황에서 릴리트에게 질문을 던질 정도로 세은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바알의 기세에 압도되어 있던 릴리트는 세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응?”
세은은 그제야 릴리트가 여전히 굳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손을 뻗어 릴리트의 하얗고 가는 손목을 잡아서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꺄악?”
갑자기 이끌리는 몸에 릴리트가 정신을 차리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털썩―
릴리트의 몸은 세은의 손이 이끄는 대로 정확히 세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설명을 해보지그래?”
“아, 아! 네. 알겠습니다!”
아직 주변이 완벽하게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릴리트는 세은에게 조금 더 밀착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아바돈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알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는 이제 알고 있으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그리고 아바돈님도 비슷한 성격이죠.”
릴리트는 자신과 아바돈이 세운 계획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연회에서 마족들이 싸우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아바돈님은 바알이 당연히 그 상황에서 본보기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여간 마족 놈들은 힘으로 눌러줘야 정신 차리지.”
중간에 끼어드는 세은의 말을 무시하며 릴리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바알이 세력을 모은다는 말은 드렸습니다만, 그 대상이 마왕들에게만 국한된다는 사실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바돈이 이런 계획을 짤 수 있는 거였군.”
세은의 말에 릴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바돈님이 바알의 입맛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면, 바알이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거기까지 릴리트의 말을 들은 세은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점을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바알에게 접근해서 뭘 어떻게 하게?”
“내부의 시설을 보는 겁니다.”
세은의 질문에 릴리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바알의 경계심을 조금은 누그러트릴 수는 있겠죠.”
“정말로 할 수 있는 건 다하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해.”
릴리트의 말에 세은이 진심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승자니까요.”
릴리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