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180화 (180/225)

# 180

49. 계획의 시작 (2)

“준비는 다 되었나?”

세은이 무기를 점검하는 것을 보며 아바돈이 물었다.

물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계획을 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바돈의 지금 행동은, 단순한 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세은은 그런 아바돈의 말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일주일 만에 완벽하게 몸을 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세은은 바알과 마주하기 전까지 몸을 완전히 회복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조급하게 굴면 굴수록 더욱 안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었다.

대신 다른 장점을 살려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

‘오랜만에 검술을 점검했더니 몸이 개운하기는 하네.’

처음 배웠던 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점검한 것이다.

얼마 전 비네와의 전투에서 깨달은 것을 이용할 심산이었다.

어차피 아바돈이 원하는 것은 세은이 바알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아바돈이 바알과 결전을 치를 수 있게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바알의 발을 묶어두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몸 상태가 어느 만큼 돌아온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니 다행이군.”

아바돈은 세은의 말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물론, 나쁘지 않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말이야.”

“그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세은이 아바돈의 말을 받아내며 마찬가지로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렸다.

“제대로 준비는 다 된 건가?”

“물론.”

세은의 반문에 아바돈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준비는 완벽해.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네놈은 모르겠지.”

“알 필요가 있을까?”

“후후. 역시 건방져. 그래서 네게 거래를 요청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바알에게 덤비는 것이 아니었으면 거래 따위 하지 않았을 거다.”

마족과의 거래는 그레모리 하나면 족했다.

아마도 마족과 거래를 두 번이나 해서 세은이 쉽게 회복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여신을 만나서 물어볼 수 없으니 이것도 하나의 가정에 불과했지만.

마족과 거래하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에일린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족은 바로 마신의 자식들이니까.

원수의 자식과 자신의 자식이 친하게 지내면 좋아할 부모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하하! 아무리 봐도 건방져서 마음에 든단 말이야. 바알 앞에서도 그 기세 죽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하지그래?”

“후후. 좋아. 릴리트!”

“예!”

아바돈의 부름에 릴리트가 이상한 팔찌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이걸 차라.”

릴리트가 세은에게 팔찌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

“마기를 만들어주는 팔찌다.”

아바돈의 말을 이어서 릴리트가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신의 힘을 잘 숨긴다고는 하지만, 지금 가는 곳은 바알의 본거지. 그리고 수많은 마왕과 마족들이 초대 받아서 오는 연회입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마족처럼 보일 수 있게 준비했습니다.”

“흐음.”

세은은 일단 릴리트가 내민 팔찌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 팔찌를 당장 팔에 차는 조심성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부작용은?”

“부작용은 없습니다.”

“어이. 그거 그래 보여도 상당한 기물이라고? 하급 마족들은 꿈에서라도 차고 싶어 하는 물건이다. 마기를 자동으로 생성해 주는 팔찌만큼 마기를 모으기 좋은 게 어디에 있겠어?”

“지랄하지 마. 나는 마족이 아니니까.”

“흡수만 안 하시면 됩니다.”

릴리트가 다시 나서서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마기를 흡수하지 않으시면, 그냥 겉에 포장이 되는 것처럼 둘러싸이게 될 겁니다.”

“벗을 때 무슨 조건이 있고 그런 건 아니고?”

“예. 그냥 벗으시면 됩니다.”

“바알이랑 싸울 때 벗으라고.”

릴리트의 말에 이어 아바돈이 다시 한마디를 첨언했다.

별다른 저주가 없다는 말에 세은은 팔찌를 받아서 팔에 착용했다.

철컥―

“흐음?”

차기 전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던 팔찌다.

그러나 세은의 팔에 감기자 전원이 들어간 것처럼 마기를 생성해 내기 시작했다.

“이거 신기한데?”

그러나 신기함도 잠시, 마기는 세은의 신체로 들어오지 못하고 방어막처럼 세은을 감싸기 시작했다.

“오. 효과 좋아. 이 정도면 자세히 보지 않고는 모르겠어.”

아바돈은 세은에게서 느껴지는 마기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세은을 의심하지 않는 이상,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

세은은 아바돈과 릴리트와 함께 바알의 본거지로 이동했다.

* * *

“아바돈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바알님의 성채에 머무시는 동안 즐거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알의 본거지에 도착하자 집사로 부역하는 마족이 아바돈을 맞이했다.

아바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부하 분들의 숙소는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잠시 말끝을 흐린 집사는 이내 말을 이었다.

“부관 분들을 위한 방은 하나밖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두 분이서 한 방을 사용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릴리트와 세은 두 명 다 부관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세은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괜찮아요.”

릴리트는 혹시나 세은이 반말을 뱉을까 봐 재빨리 대답했다.

둘의 긍정적인 반응에 바알의 집사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바알님의 성채가 작지는 않지만, 수많은 분들이 모이는 연회라 충분한 장소를 제공하지 못하는 점 사과드립니다.”

집사가 우아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릴리트 역시 그의 인사를 마주 받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잠시 후에 보지.”

아바돈이 먼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세은과 릴리트 역시 다른 시종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북적북적하네.”

걸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바알의 성채는 전체가 커다란 축제 분위기였다.

전에 바알과 싸우기 위해 쳐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활기가 넘치는 것이 마치 인간들의 왕궁과 다름이 없었다.

“이곳입니다.”

잠시 주변을 구경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세은과 릴리트에게 배정된 방에 도착했다.

“식사는 원하시는 시간 언제나 드실 수 있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금지 구역에는 혹여나 잘못 들어가시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간단한 주의사항을 알려준 시종은 이내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탁―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세은은 방에 놓인 침대에 몸을 뉘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침대에 눕자마자 세은이 릴리트에게 물었다.

릴리트는 얌전히 방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은의 질문에 릴리트는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정확히 연회가 언제 시작한다고 했었지?”

“이틀 뒤입니다.”

“여기서 이틀이나 있어야 한다는 말이네.”

세은이 더욱 깊숙이 침대에 몸을 맡기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세은이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릴리트가 물었다.

“묘하게 이곳의 모습이 인간들의 왕궁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 말이야.”

“바알이 원래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

처음 듣는 얘기에 세은의 귀가 쫑긋거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마계의 정점에 있는 바알이 이런 취향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바알이 세력을 모으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덕분에 마계의 이인자인 아가레스도 자신의 세력을 모으는 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런 게 없어 보였는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세은은 전에 마계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싸움을 걸었다가 전부 나한테 당했으니까.’

세은에게 한 번씩 당한 다음에는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럴까?”

릴리트는 세은과 함께 방을 사용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세은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세은 역시 딱히 릴리트에게 무엇인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차를 타준다는데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세은의 말에 릴리트는 미리 방 안에 준비되어 있던 도구를 이용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말이야.”

“예.”

“마족들도 차를 마시나?”

“물론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놈들이 더 많지만…….”

묘한 의미가 있는 릴리트의 말에 세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릴리트는 가운데가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들어난 쇄골과 가슴께는 수도승이 봐도 흔들릴 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세은은 그런 릴리트를 보면서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비슷하네.”

세은은 방금 전 릴리트의 말과, 여태까지 지켜봤던 아바돈의 행동을 조합해서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아바돈이 인간과 비슷한 생활을 하는군.”

“그렇습니다.”

릴리트는 담담하게 세은의 말을 긍정했다.

“하여간 인간이나 마족이나 특이한 놈들이 있다니까.”

순간 어이가 없어진 세은이 헛웃음을 지었다.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릴리트를 부관으로 삼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릴리트는 강한 편에 속하는 마족이었지만, 바알을 목표로 하는 아바돈이라면 더 강한 마족을 부관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릴리트의 위치는 참모에 가까웠다.

그리고 손익에 따라 완벽한 적인 세은까지도 포용하는 아바돈의 행동은 바로,

“왕. 왕이군.”

세은의 말에 릴리트는 아무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세은은 알 수가 있었다.

“그거 신기하네.”

“그렇지 않습니다.”

세은의 말에 릴리트의 입이 열렸다.

“힘을 과시하고, 누군가를 무릎 꿇린다. 그 대상이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을수록 쾌감이 느껴집니다.”

릴리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족들은 죽이고, 또 죽이는 짓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다 죽이고 난 다음에는, 대체 누구에게 강함을 자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에 혼자 남는다면 강하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호오.”

릴리트의 말에 세은이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아바돈님은 그런 생각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마도 바알도 그런 생각이겠지.”

“…….”

세은이 릴리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릴리트는 이번에도 세은의 마지막 말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동족 혐오인가?”

세은은 아바돈이 왜 굳이 바알을 목표로 삼았는지 조금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말을 하면서도 차를 전부 끓인 릴리트가 차를 가져와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허리를 숙이느라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노골적으로 세은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중요한 부위가 가려지는 모습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예쁜 여자를 곁에 두는 것도 과시욕을 위해서겠어.”

세은이 봐도 릴리트의 얼굴과 몸매는 매우 아름다웠다.

특히 얇고 짧은 의상으로 인해 한껏 드러나는 몸매가 정말로 매혹적이었다.

“인간이나 다른 종족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인가?”

“…….”

이번에도 릴리트는 대답 없이 가볍게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덕분에 옷이 제자리로 가며 릴리트의 가슴골이 더욱 깊어졌다.

“마족이 아닌 놈들 중에는 꼴딱 넘어가는 놈들도 분명히 있겠네.”

세은은 아바돈의 전력이 어떤지 하나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딱히 알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릴리트와 얘기를 해보니 상당히 다양하게 군단이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할 수 있었다.

세은은 대답 없는 릴리트의 태도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며 차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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