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48. 배신자와 씨앗 (3)
바알.
마계에 있는 수많은 마족과 마물들 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자.
그가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닌 힘도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지닌 세력에 있었다.
그 강대한 힘만큼이나 수많은 칭호를 가지고 있는 바알은, 오랜 시간 동안 군림한 만큼이나 많은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었다.
마계 최초의 군주.
마계의 군세를 이끄는 왕.
이외에도 수많은 위대한 칭호가 바알의 이름 앞에 수식되었다.
그만큼 바알은 마계에서 지닌 영향력이 지대한 마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지금은 비록 예전과는 달리 왕성한 활동을 접고 자신의 성에만 틀어박혀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영향력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계의 특성상 아바돈과 같이 그 자리를 노리는 놈들이 더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바알을 두려워하고, 또 경배했다.
“씨앗이 하나 발아했군.”
마계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바알은, 이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정복하는 성취감, 그리고 자신의 힘이 통한다는 것을 느낄 때 짜릿하게 온몸을 타고 오르는 쾌감.
하지만 마계가 아닌 다른 대륙은 여신의 힘이 너무 강한 곳이었다.
물론, 방해가 강하면 강할수록 정복했을 때 쾌감이 더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마계의 모든 힘을 완벽하게 품에 안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계획을 위해 활동도 줄이고 마계를 완전히 자신의 휘하로 두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바알에게 지금의 소식은 매우 불쾌한 일 중 하나였다.
“씨앗이 지금 발아하면 안 되는데. 아무래도 계획에 문제가 생긴 것 같군.”
“다른 마왕 중 하나가 눈치를 채고 방해를 한 것이 아닐까요?”
“그럴 리가. 그렇다면 다른 곳들도 벌써 발아를 했어야 해.”
“그럼 어떻게 할까요?”
바알의 어좌 아래, 가만히 시립해 있던 하겐티가 물었다.
검은 피부에 흑발, 번쩍거리는 황금의 뿔을 가지고 있는 하겐티는, 등에 달린 커다란 날개를 얌전히 접고 있었다.
마계의 다른 이들이 보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비록 48위라고는 하지만, 마왕 중 하나인 하겐티가 이토록 공손하게 바알의 말에 대답을 하는 모습이라니.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알은 그런 하겐티의 태도가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말을 받았다.
“아아. 됐어. 하나 정도야 뭐……. 어차피 씨앗을 발견하는 건 힘들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바싸고 그놈은 어떻게 된 거야?”
바알의 입에서 마계를 대표하는 마왕 중 하나인 바싸고까지 등장했다.
비록 바알과, 그의 대적자로 꼽히는 아가레스와 완전한 동일 선상에 있는 마왕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그다음으로는 무조건 손꼽히는 바싸고였다.
그런 바싸고를 마치 부하 다루듯이 부르는 바알의 태도는 확실히 어딘가 이상했다.
그러나 하겐티 역시 그런 바알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갑자기 생겨난 차원의 균열을 타고 넘어간 다음에는, 도통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그래도 몇 번 연락이 왔다며.”
“예! 다른 세상을 지배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관심이 있다면 넘어오라는 전언과 함께요.”
“흐음…… 거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대체 뭘 하는 건지.”
“듣기로는, 대륙보다 차원의 균열로 인해 연결된 곳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겐티의 말에 바알이 혀를 차며 말했다.
“멍청한.”
“어, 어찌할까요?”
하겐티는 바알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차원의 균열이 우리 마음대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거사가 가까워지니 이상한 일들이 자꾸 생겨. 가뜩이나 통제하기 힘든 놈들인데 말이야.”
바알의 말에 하겐티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바알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바알은 그런 하겐티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고, 옆에 놓인 탁자에서 기다란 담배 하나를 집어 들었다.
“후우.”
마법으로 순식간에 담배 끝에 불을 붙인 바알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연기를 흡입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듯 내뱉는 숨에 하얀 담배 연기가 섞여 실내를 가득 채웠다.
“한 대 필래?”
“아닙니다!”
“하긴…… 별 효과가 없기는 해. 그치?”
“…….”
인간들이 피는 담배가 마왕들에게 별다른 각성감을 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바알 역시 당연히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이마시고 내뱉는 단순한 행위가 무언가 잡생각을 없애주는 효과를 주는 것이 좋았다.
“인간들은 대체 이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단 말이야.”
어느새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바알이 다음 담배를 집어 들면서 말을 이었다.
“단순히 인간뿐만이 아니지. 드워프도, 엘프도. 신의 자식들인 종족들은 모두 이런 걸 피잖아.”
하겐티 바알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바알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 하겐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
그리고 바알 역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왜 우리 마족들은 이런 걸 느끼지 못할까?”
“…….”
“후우!”
바알이 깊게 삼킨 연기를 다시 강하게 뿜어냈다.
“아무리 강한 힘도, 절대적인 공포도, 그것을 느끼고 납작 엎드릴 대상이 있을 때 의미가 있지.”
틱―
바알이 두 번째 담배를 끝까지 빨아들이고는 꽁초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하겐티가 카펫에 떨어진 꽁초를 줍기 위해 움직였다.
“아아. 됐어. 줍지 마.”
“예!”
바알은 그런 하겐티의 행동을 만류하며 말했다.
재빠르게 움직이던 하겐티는, 그런 바알의 말에 다시 원위치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런데 멍청한 놈들은 그걸 몰라. 그저 부술 줄이나 알고. 그렇지?”
“그렇습니다!”
바알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방해가 없을 수는 없겠지. 신이라는 것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바알은 하겐티에게 얘기하는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지. 그럼 시렌 놈에게 굴욕을 당하는 척 하면서 숨은 이유가 없어지잖아?”
“예!”
바짝 기합이 들어간 하겐티의 대답이 다시 들려왔다.
바알은 그런 하겐티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제 슬슬 준비해. 무슨 소리인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안다.
같이 준비한 기간이 얼마인데 하겐티가 모를 리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바알과 함께 이 자리에 하겐티가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하겐티의 표정을 읽은 바알이 싱긋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그럼 일단 움직이지.”
* * *
체한의 이야기를 모두 듣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얼마 아는 것도 없던 데다가, 넘긴 정보가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서만 들으면 되는 일이니까.
세은은 체한의 심문을 모두 마쳤고, 이제 남은 것은 그에게서 들은 정보를 추기경에게 전달하면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자신이 도와줄 일은 모두 끝냈다.
또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기지만 않으면 말이다.
“……흐음. 그렇다는 말이군.”
“그래, 이쪽에서는 더 이상 얻어낼 정보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럼 하이어 쪽과는 다른 쪽이 손을 뻗었다는 말이군.”
“뭐…… 딱 봐도 줄을 댄 곳이 다르더만.”
“그래도 확실한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정말로 모든 배신자를 솎아냈는지를 알 수가 없구만…….”
“하긴, 마기를 어떻게 그렇게 숨길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던데 말이야.”
“후우…….”
세은의 말에 추기경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같이 지내면서 추기경인 자신이 심장에 숨겨진 마기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정말 경악스러웠다.
“말을 들어보니까 마왕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말이야.”
“…….”
세은의 말에 추기경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세은 역시 자신이 미처 마기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중이기도 했다.
거기에 아예 마왕 중에서 상위의 존재가 마음먹고 숨기려고 작정을 했으면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누가 교단의 인원의 심장에 마기가 심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여하튼, 나는 다 도와줬다.”
잠시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지워 버린 세은이 말했다.
“아, 정말로 고맙네.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해도 부족하겠지만 말이야.”
추기경이 다시 한 번 세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세은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런 추기경의 말에 대답했다.
“감사는 됐어, 이제. 나머지는 알아서 해.”
이내 세은은 말을 하며 등 뒤로 몸을 기댔다.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으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뒤처리에 대한 고민은 바로 추기경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확인해 주듯이 추기경은 열심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하여튼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으니까, 그, 후유증에서 벗어난 사람부터 소개해 주지그래?”
“아. 그래야지.”
“언제 만날 수 있지?”
“그렇지 않아도 불렀다네.”
“응?”
추기경의 말과 동시에 세은의 감각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추기경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아. 록펠러 왔는가? 들어오게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추기경의 말에 밖에 있던 사람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추기경이 데려온 사람은 놀랍게도 여인이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전에 처음 체한이 추기경의 명을 받아 록펠러를 데리고 왔을 때는, 세은은 이미 추기경과 말을 맞추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편하게 앉게.”
추기경이 싱긋 웃으며 자리를 권유했다.
록펠러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히 들은 바가 있으니, 지금 내부의 상황이 얼마나 엉망인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다른 일도 아니고, 마족들과 결탁한 배신자들이라니.
이런 시국에 추기경이 부르는 것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이 아니라, 폭주의 후유증에서 회복한 방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을 해줬으면 해서 불렀네.”
“아…….”
배신자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록펠러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럼 이분도……?”
록펠러는 조심스럽게 세은을 가리키며 물었다.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우리 교단의 은인이니 성심성의껏 알려주기를 바라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긴장을 모두 털어버린 록펠러는 밝아진 얼굴로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세은은 그런 록펠러를 바라보며 물었다.
“후유증에서 벗어났다고?”
“그렇습니다.”
단아한 얼굴이다.
마냥 곱게 자랐을 것만 같은 외모에 세은이 살짝 불신을 담아 물었다.
도저히 전장에 나가서 신성력을 폭주시켰을 것 같지 않은 첫인상.
하지만 외향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좋아. 대체 어떻게 후유증에서 벗어난 거지?”
세은이 몸을 록펠러 쪽으로 돌리며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