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48. 배신자와 씨앗 (2)
“죽어! 죽어!”
체한은 극심한 공포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흥분이 최고조에 오른 체한의 공격은 확실히 매서웠다.
마기가 체한의 분노와 공포에 반응해 더욱 격렬하게 그의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바로 세은이었다.
툭―
세은이 가볍게 체한의 공격을 쳐 냈다.
아주 작은 동작만을 움직여 달의 검의 힐트로 체한의 손을 쳐 낸 것뿐이다.
그러나 그 정도 움직임만으로도 체한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충분했다.
퍽!
힐트와 체한의 손이 만나는 순간, 체한의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확장된다.
세은의 팔이 움직이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마지막 발악조차 막혀 버렸다.
“컥!”
체한은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또 다시 비명을 질렀다.
‘주, 죽는다!’
체한의 머릿속은 이제 완연히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가득했다.
이럴 상황일수록 상황을 더욱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한 법.
그러나 이미 마기에 잠식당한 체한에게 그런 정신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세은은 딱 봐도 정신이 빠르게 불안정해지고 있는 체한을 보며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살고 싶어?”
세은의 말에 체한의 눈동자가 더욱 격하게 흔들렸다.
살려준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배신자에다가 마기에 물든 자신을 살려줄 리가.
그렇지만 살려준다는 세은의 말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처럼 체한을 휘감았다.
마치 처음 배신을 종용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
“……젠장!”
그러나 말과는 달리 체한의 눈은 방금 전보다 조금 흔들림이 줄어들고 있었다.
혹시나 살 수도 있다는 희망이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대답해 봐. 살고 싶어?”
“…….”
또 다시 세은의 목소리가 들리자 체한은 가만히 세은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자신을 살려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단순히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세은이 체한을 놀릴 이유가 없었다.
세은은 외부인이라서 체한에게 배신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으니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복잡한 생각에, 체한은 경직되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세은은 무릎을 굽혀서 그런 체한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니, 대답을 해야 알지. 살고 싶어?”
“…….”
그러나 이번에도 체한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살 수 있는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많아야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그것도 세은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서였다.
세은이 살려준다고 해도 이제는 교단의 추격을 뿌리쳐야 할 터였다.
교단의 추적을 뿌리치고 도망친다고 해도 효용 가치가 다한 자신을, 스파이 짓을 지사한 마왕이 받아줄지도 의문이었다.
애초에 마계에서 누가 누구의 약속을 믿는다는 말인가.
그나마 마왕에게 붙는 편이 살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하지만 이렇게 중간에 일이 꼬여서는 그것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그래도…….’
지금 체한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그나마 세은의 말을 믿는 것뿐.
“사, 살려줘…….”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아예 전무한 방향으로 손을 뻗는 것보다는 나았다.
간절한 체한의 대답에 세은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그렇지?”
“제……발…….”
살고 싶다.
동료들을 배신한 것도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체한이 세은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지금 유일한 생명줄은 세은 하나였다.
“제발…… 살고 싶다…….”
살고 싶다는 생각에 모든 힘이 다 빠져 버린 체한이 또 다시 세은에게 애걸했다.
정말로 비굴하고 굴욕적인 모습이었지만, 오직 살고 싶다는 본능과 욕구만이 체한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교단에 입교했다.
그리고 살기 위한 일념 하나만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원해서 남들보다 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교단이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방패를 찾아 동료들을 배신하게 되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정보를 넘기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마계에도 정치가 아예 없을 수는 없었고, 체한은 이러저리 잘 피해 다니며 생명을 유지해 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천수를 누리다가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비굴하고 더러워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는,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하지만 이제는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흐음…….”
궁금한 것을 들으려면 일단 체한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기에 살고 싶은지 물었던 세은은, 예상 외로 진정 효과가 좋다는 것에 감탄을 했다.
이제 체한이 대화를 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세은은,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체한이 무슨 짓을 하든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자, 대신 궁금한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을 해. 그럼 살려주지.”
체한은 자신에게 거래를 제의하는 세은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자신을 살려주려는 것일까.
혹시 듣고 싶은 것만 전부 듣고 자신을 죽여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체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가 듣고 싶은 거지?”
“글쎄?”
체한의 질문에 세은은 정확히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먼저 질문해서 답을 듣는 것보다, 체한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부는 것이 훨씬 나았다.
세은이 아무리 질문을 해봤자 모든 것을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세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자 결국 체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접근한 건 아니야……. 어느 날 순찰을 돌고 있는데 손쓸 틈도 없이 뒤를 잡혔지.”
“멀리 나갔었나?”
“아니, 그냥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정찰 임무였다.”
“그럼 애초에 은신처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군.”
“……아마도 그럴 거다.”
세은의 말에 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상대방이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면, 마기의 특성상 체한에게 아예 들키지 않고 뒤를 잡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체한보다 먼저 안보에 구멍이 났다는 것을 확인한 세은이 재촉했다.
“아아. 하여튼 계속 얘기해.”
“……그래서 나는 선택을 하게 됐지. 그 자리에서 죽느냐, 아니면 정보를 제공하고 살아남느냐.”
“뭐, 흔한 변명이군.”
“그래, 살고 싶었다. 이성이 있다면 누구나 살고 싶어 하지. 심지어도 작은 동물들조차도. 그런데 인간인 내가 살고 싶어 한 것이 뭐가 문제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혼자 흥분해서 지랄이야?”
갑작스런 체한의 자기합리화에 세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듣고 싶은 것은 이런 사소한 얘기가 아니다.
“하여튼, 그래서 그건 누구였지?”
“모른다.”
“응? 뭐라고?”
“누군지 모른…… 컥!”
짝―!
가만히 듣고 있던 세은이 손을 들어 체한의 뺨을 강하게 올려붙였다.
“개소리야? 장난해? 다시 말해봐. 뭘 모른다고?”
“지, 진짜야!”
체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비록 지금은 뺨이지만, 언제 세은의 허리춤에 달린 검이 뽑혀 나올지 몰랐다.
“하아…….”
체한의 외침에 세은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머리를 굴리는 것은 인간의 공통 기본 소양인 것 같았다.
매번 배신당하면서도 다시 기대하게 되는 게 어이없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검은 머리 짐승은 키우거나 돌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은의 한숨을 들은 체한은 더욱 다급해진 태도로 변명을 폭풍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 정말이다!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약속된 장소에 정보를 적어서 두기만 하고 왔어. 누군지 모른다고!”
“…….”
“진짜! 정말이다!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해서 어디에 쓰겠어?”
세은은 열변을 토하는 체한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
세은의 반응에 그제야 체한의 얼굴에서 조금 다급함이 사라졌다.
“그, 그렇지!”
“그럼 다른 걸 묻지.”
“뭐든지 물어봐! 전부 다 대답해 줄 테니까! 그러니 제발 목숨만……!”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얘기해. 귀 아프니까.”
“헙…….”
세은의 미간에 금이 가자 체한의 입이 황급하게 다물어졌다.
그가 조용해지자, 세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누구한테 정보를 넘겼는지는 정말로 몰랐다고 치고.”
“몰랐다고 치는 게 아니라 정말…….”
“말 끊지 마.”
“허업!”
세은은 자신의 말을 끊는 체한을 가볍게 노려보았다.
세은의 눈빛에 체한이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하여튼 정말로 몰랐다고 치고, 그럼 대체 어떻게 마기를 숨기고 있었던 거지?”
세은의 질문에, 체한은 처음 배신을 종용받았을 당시를 떠올렸다.
정보를 넘기라는 마족의 제안을 들은 체한은, 차마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걸리면 죽…….”
“걱정하지 마. 협조만 한다면 힘을 주지. 적어도 도망쳐 나올 수는 있을 거야.”
“……?”
자신의 뒤를 잡은 마족의 말에 체한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자신을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마족이 신성력을 사용하는 자신을 붙잡고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리가 없다.
고개를 돌리니 젊은 남성의 모습을 한 마족이 서 있었다.
“어때? 협조를 할 텐가? 아니면 지금 죽을 텐가?”
“……협조를 하겠다.”
아주 잠깐, 가슴에 남은 일말의 양심에 고민하던 체한은 이내 마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거래 성립이다.”
“그럼 이제…… 커헉!”
푸욱―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보려던 체한은 갑자기 자신의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마족의 손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분……명…… 거래 성…….”
심장을 파고 들어온 마족의 손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체한의 가슴 안을 휘적거렸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체한은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심장을 정확히 관통당했으니, 죽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마족의 맨손이 심장을 휘젓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체한의 두 눈이 서서히 감겼다.
쑤욱―
이내 체한의 의식이 완전히 끊기자, 마족의 손이 그의 가슴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지지대를 잃은 체한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마족은 바닥에 널브러진 체한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를 깨우기 시작했다.
툭― 툭―
“이봐. 엄살은 그만 부리고 일어나지그래?”
가볍게 발로 머리를 툭툭치는 마족의 행동에, 심장이 관통당한 체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커억? 컥! 커헉!”
입에 고여 있던 피를 전부 토해낸 체한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 분명히 가슴이……?”
“거래 성립이다. 심장에 내 씨앗을 박아놨으니 위험할 때는 씨앗을 잘 발아시켜 봐.”
“……씨앗?”
“뭐, 잘 관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잘못 관리해서 씨앗이 발아하면 그날로 끝이니까.”
“내가 살았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마족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못한 체한을 바라보았다.
제일 욕심이 많아 보여서 선택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덜 떨어진 놈인 것 같았다.
“뭐…… 이미 고른 거 어쩔 수 없지. 그럼 얼른 거래에 대한 얘기를 끝내보자고.”
마족이 여전히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는 체한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