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47. 솎아내기 (4)
“하, 하이어 대장님을 죽이다니?”
“이게 대체?”
“추기경님!”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좌중의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개중에 갑자기 무기를 꺼내 들거나, 뒤로 도주하는 인원이 생기는 것을 세은이 확인했다.
“그럴 줄 알았지.”
얼굴을 확인하니 딱 하이어가 숨기고 있던 인원들이었다.
확인을 끝낸 세은이 고개를 돌려 추기경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
“전부 죽이지는 말게.”
세은의 질문을 받은 추기경이 세은에게 대답했다.
세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몸을 날렸다.
아직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해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대장님 이게 대체?”
“서, 설마 추기경님이…….”
“그럴 리가!”
“하지만 지금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을 개시한 놈들은 당연히 존재했다.
아까 하이어의 지시에 따라 밖으로 나가서 표식을 남기고 왔던 무리였다.
그리고 얼떨결에 놀라서 무기를 뽑은 체한도 마찬가지.
하나같이 손에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세은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여간 의심스러운 놈들은 다 이유가 있다니까.”
세은은 자신을 향해 이빨을 세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의 부하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분노가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놀랄 정도로 담담한 세은의 말에 오히려 무기를 겨누고 있는 인원들이 긴장할 정도였다.
“흠.”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습격이라고 판단하고 무기를 뽑은 자들도 있었다.
바로 랜돌프와 같은 충성스러운 인원들.
전황을 파악하던 세은의 시선이 그들과도 마주쳤다.
랜돌프는 세은과 눈이 마주치자 두려움 없이 그에게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해 못하면 빠져 있어.”
지금 세은은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배신자들이 도망가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서 모두 잡아내야만 했다.
세은이 랜돌프의 질문을 무시하고 우선 가장 가까이 있던 체한에게 달려들었다.
하이어의 소속이 아닌 것을 보니, 자생적으로 자라난 배신자 같았다.
‘이런 놈들이 제일 악질 중 하나지.’
다른 공범이 없이, 거기에 책임자도 아닌 직책에서 이렇게 배신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더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만약 책임자의 자리였거나 다른 공범이 있었다면, 훨씬 더 많고 중요한 정보를 팔아넘겼으리라.
서걱― 깡!
가차 없이 체한을 공격하는 세은의 검을 랜돌프가 막아섰다.
“함부로 날뛰게 둘 순 없다!”
그러나 드워프들의 작품인 달과 별의 검에, 추기경의 축복까지 더해진 세은의 공격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부딪힌 줄 알았던 랜돌프의 검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세은이 급히 검을 빼지 않았다면, 그의 몸까지 반으로 갈렸으리라.
“이게 무슨……?”
단 일합도 막아내지 못한 랜돌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세은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랜돌프를 바라봤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무작정 나서는 꼴이라니.
가장 짜증나는 부류 중 하나였다.
“비켜!”
그러나 그렇다고 그대로 랜돌프까지 베어버릴 수는 없는 일.
그를 베어버리는 대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사이에 목표물이었던 체한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이해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랜돌프는 자신의 검이 가볍게 갈라지는 모습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을 비키지 않았다.
랜돌프의 두 눈은 제대로 단련되어 있는 전사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은과 추기경에게는 일일이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하이어의 아래에 있던 배신자들이 열심히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
‘일단 얼른 처리부터 하게나.’
세은은 추기경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추기경이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세은은, 랜돌프를 무시하고 체한에게로 달려들었다.
“우아아아!”
그러나 세은은 이번에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배신자들 역시 움직임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반으로 나뉘어서, 세은을 공격하는 이들과 도망가는 이들이 생겨났다.
점점 혼란이 가중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일의 앞뒤를 알 수 없는 이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아오! 비켜라!”
세은은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치며, 가장 먼저 자신의 등을 노리고 달려든 배신자를 베었다.
“커헉!”
“그만둬!”
그러나 랜돌프는 여전히 눈치 없이 세은을 방해했다.
“랜돌프 비키게!”
“추기경님!”
추기경의 명령에 랜돌프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도 랜돌프는 세은을 막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즉결 심판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배신자들을 처리하는 일이네.”
“정말로 배신자가 맞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부인의 말만 듣고 이렇게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을 처벌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오히려 외부인이기에 더 믿을 수 있는 상황도 있는 법이라네.”
“추기경님!”
랜돌프가 간절하게 추기경을 불렀다.
“저희에게도 법과 절차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지키기에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최소한의 확인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렇게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모습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추기경이 손을 들어 도망가고 있는 배신자들을 가리켰다.
랜돌프의 눈이 추기경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습니다!”
랜돌프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죄가 있다면, 재판을 진행하고 그에 맞는 처벌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추기경은 그 모습에 한탄이 가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자네의 생각이 올바른 생각이기는 하네. 랜돌프.”
하지만 추기경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랜돌프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법이라는 것은 내부의 구성원이 모두 적이 아닐 때나 소용이 있는 법이지. 일벌백계는 법이나 제도가 미약할 때나 쓰는 방법이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딱 맞는 방법이라네.”
콰득―!
“더 이상 못 기다려. 다 도망가잖아?”
“크윽!”
추기경과 랜돌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은이 배신자 한 명의 목을 꺾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세은의 움직임을 막지 못한 랜돌프가 침음을 삼켰다.
이제 남은 배신자는 가장 먼저 등을 돌리고 도망친 세 명과, 세은을 공격한 두 명. 그리고 체한.
어둠 속에서 시리도록 빛나는 세은의 쌍검을 보며 남은 두 명의 배신자가 오금을 떨었다.
이미 그들 중에서 가장 강했던 하이어가 단 한 수에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 상황.
그런 심리 상태로 제대로 된 반항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둘은 들켰다는 공포 때문에, 공황에 빠져 도망가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든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추기경님……!”
랜돌프는 항상 여유가 넘치고 규칙과 절차를 준수하던 추기경의 이번 결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크윽! 젠장!”
“죽어!”
세은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두 명의 배신자를 보며 자리를 지켰다.
비록 이미 도망간 배신자들이 있다지만, 눈앞의 둘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순서에 맞았다.
도망친 것은 추기경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었다.
추기경이 허허 웃는 노인으로만 보여도, 엄연히 마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세은이 이렇게까지 도와주면 남은 일은 그가 처리할 몫이었다.
‘역시 알아서 가는군.’
세은은 도주한 배신자 둘을 잡기 위해 움직이는 추기경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신은 이제 여기에 있는 셋만 처리하면 된다.
서걱― 서걱―
세은은 자신에게 날아 들어오던 무기를 가볍게 베어 넘겼다.
순식간에 무기를 잃은 두 명의 배신자가 절망감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살려고 한 행동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돼서 좋겠네.”
세은은 그런 둘에게 썰렁한 농담을 던지며 둘의 목을 베어나갔다.
쾅―!
“응?”
그런데 여태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체한이 갑자기 세은의 앞을 막아섰다.
더 놀라운 것은 세은과 검을 맞부딪혀 세은의 검을 막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세은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체한을 뚫어져라 살폈다.
“……호오?”
시선을 돌린 곳에는, 두 눈이 완전히 새까맣게 물든 체한이 서 있었다.
“체, 체한?”
랜돌프가 그런 체한의 모습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크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체한은 자신이 살아 나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배신을 했을 때 받은 능력을 사용했다.
어차피 이미 배신자라는 것을 들킨 상황.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자, 봤지? 이런 상황이니까 방해하지 말고 비켜.”
“체, 체한…….”
두 눈을 중심으로 얼굴이 점점 검게 물들고 있는 체한은, 랜돌프의 부름을 무시하고 세은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또 다시 체한의 검이 세은의 공격을 버텨냈다.
“마기는 전혀 못 느꼈는데?”
세은도 느끼지 못했던 마기가 체한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거지?”
“크흐으…….”
그 방법은 알 수가 없어도, 체한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세은은 가벼운 마음을 버리고 좀 더 단단하게 달과 별의 검을 바로 잡았다.
“크흐! 죽어!”
체한이 괴성을 지르며 세은에게 다시 무작정 달려들었다.
온몸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힘이 넘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이기지 못할 상대가 없을 것 같았다.
푸욱―
그러나 세은의 공격에 튕겨 나간 체한의 검은 그대로 주인의 어깨를 찍어냈다.
“크하악!”
시퍼런 칼날이 체한의 어깨를 그대로 통과했다.
하얀 살이 그대로 갈라지며 빨간 스테이크 같은 속살이 드러났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체한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세은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서걱―
어느새 체한에게로 달려든 세은이 그대로 체한의 반대쪽 팔을 잘라냈다.
자신도 느끼지 못한 마기가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낼 필요성을 느꼈다.
만약 이런 놈이 하나가 아니라면 그게 더 문제였다.
이놈처럼 당황해서 막 움직이는 놈이 아니라, 다른 동료가 있을 수도 있었다.
세은은 빠른 손놀림으로 체한의 다리에서 부상을 입혔다.
“크허하악!”
“어이.”
체한이 도주하기 못하게 조치를 취한 세은은 여전히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랜돌프를 불렀다.
“이거 잘 지키고 있어. 나머지 정리하고 올 테니까.”
“어, 어?”
그러나 세은은 랜돌프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몸을 날린 상태.
체한이 마기를 뿜어내며 저항하는 동안 정신을 차리고 도망간 두 명을 잡아야 했다.
“이게 대체…….”
그리고 랜돌프는 주위의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벌어진 일들이 정말 현실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목격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들뿐이었다.
그저 눈앞에서 지독한 부상을 입은 채 마기를 내뿜고 있는 체한을 내려다보는 것만이, 랜돌프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