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47. 솎아내기 (1)
타닥― 타다닥―!
“빨리 빨리 움직여!”
“뭐,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밤의 적막을 걷어내는 요란한 소리가 은신처를 가득 채웠다.
은신처의 입구를 지키던 남자는 갑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한껏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무기를 잡고 있는 두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체한? 무슨 일이야?”
“샘! 비상 태세야. 오늘 밤에 바로 준비하고 있던 은신처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체한의 말에 어리둥절한 샘이 되물었다.
“다음 은신처는 아직 다 준비도 되지 않았잖아? 거기에 지금 은신처도 아직 들키지 않았는데, 대체 왜?”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단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어. 얼른 준비해!”
누가 배신자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체한은 자세한 내용은 말해주지 못하고 샘을 재촉했다.
댕― 댕― 대앵―!
“비, 비상 종?”
갑작스러운 체한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던 샘은, 이내 울리기 시작한 비상 신호에 두 눈을 치켜떴다.
“정말이야?”
샘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체한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의 은신처로 숨어 들어온 지 이제 반년이 겨우 넘어가고 있었다.
들어올 때 꼬리를 전부 자른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벌써 은신처의 위치가 들킬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혹시 은신처의 위치를 들켰다고 하더라도 경계 근무를 서는 인원들이 미리 침입을 감지했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 마기를 가진 자들을 느낄 수 없는 이는 없으니까.
“그럼 빨리 움직여!”
체한이 비상 상황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다급하게 달려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샘에게 말했다.
“그, 그래!”
샘은 체한을 보내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비상 태세! 바로 다음 은신처로 이동할 예정! 우리는 미리 약속된 대로 선두와 후미를 나눠서 주민들을 지킨다!”
샘이 동료들에게 상황을 간단하게 전파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달려 나오던 동료들은, 샘의 말을 듣고 그대로 각자의 위치로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한번 흔들린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봐도 당황했다는 사실이 여실하게 보이는 샘은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몸을 날렸다.
“아! 대장님께 보고를!”
물론 대장도 비상 종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당장 달려가서 대략적인 상황을 보고해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 * *
체한은 은신처 외곽의 외진 곳에 있는 자신의 수련장에서 걸음을 멈췄다.
원래 각자의 수련을 지켜보지 않는 것이 예의인 데다가,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수련장의 주변에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의 시간을 두고, 체한은 혹시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꼼꼼하게 확인을 거쳤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따라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체한이 그제야 수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누군가 이런 체한의 모습을 봤다면 수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이렇게 외진 곳까지 방문할 이유가 없다.
수련장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게 중요한 물건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말인즉슨.
체한이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수련장으로 올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이게 다 밖에서 온 그 새끼 때문이야.”
체한이 얼굴 가득 인상을 쓰면서 입을 열었다.
“후우. 이걸 발견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할 텐데.”
체한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여기 있군.”
체한은 수련장 구석에서 종이와 펜을 찾아 들었다.
사각― 사각―
그리고는 종이에 펜으로 무엇인가를 다급하게 휘갈기기 시작했다.
“후우. 일단 대략적인 위치를 적어놨으니, 다시 접촉을 하면 되겠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은 종이를 대충 꾸깃꾸깃하게 접어서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체한은, 그대로 수련장을 빠져나왔다.
하늘을 보니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바로 돌아가면 되겠어.”
할 일을 마친 체한이 다시 은신처로 몸을 날렸다.
혹시나 자신이 이곳에 있던 것을 다른 이들에게 들킬까 싶어 주위를 경계했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체한 말고, 이 다급한 시점에 은신처를 벗어나는 사람은 없으리라.
체한은 돌아가는 길에도 자신의 행적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휴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후퇴 준비에 바쁜 은신처로 뛰어 들어갔다.
“빨리빨리 움직여!”
그리고는 마치 계속 은신처 안에 있었던 것처럼 혼신의 연기를 시작했다.
대앵― 대앵― 댕!
주기적으로 비상종이 울렸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잠결에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경고였다.
“얼른 얼른 움직이라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대단하네.”
“허허. 뭐가 대단한가?”
사람들의 대피 준비를 살피고 있던 세은의 말에 추기경이 물었다.
“아니, 여기 있는 건물들을 보니까 임시로 지은 가건물도 아닌데 말이야. 이렇게 아무 미련 없이 전부 버리고 이동하네.”
“집보다는 목숨이 중요하지.”
추기경의 말에 세은이 물었다.
“이럴 거면 그냥 건물도 가볍게 짓는 것이 낫지 않아?”
“그렇지 않다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추기경은 말을 이었다.
“원래 사람은 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이런 사치가 필요한 법이지. 쫓기는 와중에 거주 환경까지 좋지 못하면 마음부터 병이 드는 법이라네.”
“흐음. 그렇기는 하겠지만…….”
추기경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최악이라도 주변 환경이라도 좋으면 기분이 더 전환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도 세은이 보기에 도망치는 입장에서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뭐…… 당장 진짜로 버릴 것도 아니지는 않은가? 빠른 시일 내에 옮기기는 해야겠지만 말일세.”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추기경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했다.
“뭐. 그것도 그렇기는 하지.”
추기경의 말에 세은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은 이동 준비가 다 끝나면 그 때부터 반응을 확인하면 되겠어.”
“한 번에 모아놓고 할 테니 걱정 말게. 자네는 아까 내가 부탁한 대로 꼬리만 잘 잡아주면 된다네.”
“그건 걱정하지 마.”
“허허. 여신의 인도가 자네를 우리에게 이끈 듯싶으이.”
추기경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기꺼워하는 추기경의 태도에 세은은 동의의 의미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추기경의 부탁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거의 준비가 끝난 것 같군. 한번 이동해 보세.”
먼저 말을 꺼낸 추기경은 느긋한 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은 역시 그런 추기경의 뒤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노약자와 여자들을 가운데에 세워! 침착하게 움직여!”
히이잉―!
“워워!”
조금 걷다 보니 줄을 맞추기 위해 독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흥분한 말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런 말들을 진정시키는 소리까지.
가히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소란이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에 세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작전을 시행하다가 여기 위치를 다 들키겠는데?”
세은은 가만히 추기경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나 추기경은 그런 세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좀 들키면 어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장소인데 말이야.”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모르는 놈들이 더 많을 텐데.”
“어차피 솎아내기만 하면 바로 옮길 생각이라 괜찮다네.”
추기경은 세은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그대로 간이로 설치된 연단으로 올라섰다.
“쉿! 추기경님이시다!”
추기경이 연단으로 올라서자 소란스럽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치 방금 전의 소란이 없던 일이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단 위의 추기경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확인한 추기경이 예의 그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렇게 피난을 하게 되어서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저의 신실함이 부족하여, 저의 부족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어려움을 미리 알아채지 못하고 이런 사달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저희에게 기회를 주신 여신님께 감사드립니다.”
추기경은 나긋하게, 그러나 힘 있게 연설을 이어나갔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매일매일 새 역사를 써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손에게, 어둠이 아니라 빛을 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감히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에 맞서 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고통스럽고 눈물겨웠습니다. 앞으로의 시간 역시 더 지독하게 치욕스럽고, 힘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고의 세월을 주춧돌로 삼아, 여신께서 인도하시는, 약속하신 그날을 향해 항해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일관된 톤으로 연설을 하던 추기경의 목소리에 갑자기 단호함이 서렸다.
“우리, 이미 나선 이 항해를 계속해서 이어갑시다. 정말로 해야 하는 일들이 아직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질고 시린 세월을 버티고, 이겨내 왔던 힘으로, 여신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을 만들어 나갑시다. 빛을 지키고! 어둠을 물리쳐! 이 황량하고 악으로 물든 마계에도 여신의 은총이 흐르게 합시다!”
추기경의 연설이 끝나자 주변의 모든 인원들 위로 숙연함이 감돌았다.
보통의 연설 후에 쏟아지는 환호 대신, 성호를 긋는 소리와 짧은 기도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 * *
히이잉―!
“후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은신처 경계를 총괄하고 있는 랜돌프는, 피난을 하는 행렬의 후미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느 때나 이동할 때는 후미가 가장 취약하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때문에 가장 무력이 강한 사람인 랜돌프가 후미를 방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응?”
그런데 행렬이 움직이는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제대로 보고 체계가 이어지지 않는 긴급 상황을 대비해서, 랜돌프 정도 되는 간부들은 다음 은신처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행렬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 미리 알고 있던 은신처의 방향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히잉!
“이럇!”
랜돌프는 그대로 말을 달려 행렬의 앞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정상적으로 바뀐 거라면 이미 자신에게 연락이 왔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알기에 교단에서 다른 은신처를 준비할 시간이나 자본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가 생긴 건가?”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행렬을 이동할 리가 없었다.
히이이잉―!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랜돌프만이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서 간부들이 선두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랜돌프! 이게 무슨 일인가?”
“나도 그게 궁금해서 가고 있는 길이야!”
랜돌프는 자신에게 행렬이 약속되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연유를 물어보는 동료에게 대답했다.
동료 역시 모르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랜돌프는 동료와 함께 나란히 말을 달리며 더욱더 말을 재촉했다.
“추기경님!”
“오. 랜돌프 왔는가?”
말을 극한까지 재촉한 랜돌프는, 이내 곧 행렬의 선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선두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추기경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행렬을 인솔하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행여 다른 이들이 들을까, 랜돌프는 목소리를 낮춰 추기경에게 물었다.
이런 중요한 정보에 대한 것은, 항상 조심해도 과함이 없었다.
“허허. 글쎄. 다른 이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려 보지.”
그러나 추기경은 그런 랜돌프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