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46. 마계의 사제들 (4)
체한이 안으로 들어가서 추기경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세은을 은신처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물론 체한이 혼자 돌아가면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다른 믿을 만한 사람들이 따라 나오는 번거로움은 필요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오해를 거둔 사람들을 풀어주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리로 들어오시게.”
세은은 은신처로 들어가자마자 추기경에게로 안내되었다.
은신처는 상당히 넓고 건물들도 높았다.
특히 중앙의 신전은 작았지만, 가지고 있어야 할 구성은 모두 지니고 있었다.
여신의 조각품은 물론, 대예배당에서부터 성기사들의 연무장, 그리고 사제들이 기도하는 참회실까지.
이런 커다란 은신처를 여태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은은 은신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신이 왜 이런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단순히 신성력을 이용해서 막은 것이 아니라, 마법과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은신처 전체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마계에서 마법은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신의 자녀들을 찾는 데 마법에 주의를 기울일 이들은 없었다.
“어서 오시게.”
추기경이 반갑게 세은을 맞이했다.
“그래, 다른 대륙에서 온 형제라고?”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형제들이 오해를 해서 실례를 범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네, 형제여.”
“괜찮아.”
“아니?”
세은이 추기경에게 반말을 하자 근처에 있던 남자가 바로 미간을 굳히며 세은에게 한마디를 쏘아붙이려고 했다.
“아니야, 괜찮다네.”
그러나 추기경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남자를 만류했다.
다른 대륙에서 온 형제에게 자신의 직위를 내세우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은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범상치 않았다.
추기경인 자신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신성력.
하긴, 마계까지 넘어와서 자신들을 찾아오려면 꽤 고위 성직자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오해가 풀렸으니 이대로 세은을 다시 돌려보내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굳이 세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체한을 빼고 모두 나가 있으시게나.”
“하, 하지만!”
“괜찮네.”
추기경이 단호하게 체한과 세은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덜컥―
결국 방 안에는 추기경과 체한, 그리고 세은 셋만 남게 되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네.”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 추기경이 세은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뭐가 궁금하지?”
“분명히 체한이 물어봤겠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직접 자네의 입에서 듣고 싶어서 말이야.”
추기경은 자애로운 미소를 한껏 지으며 세은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이곳의 위치는 어떻게 알아낸 건가?”
세은은 방금 전에 체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드워프들에게서 알아냈지.”
“드워프?”
세은은 살짝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금 전에 체한에게 전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음…….”
추기경은 세은의 말을 심각하게 들으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안에 스파이나 배신자가 있다는 말이군.”
“그게 상황에 맞는 타당한 추측이겠지.”
“그렇겠군.”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추기경은, 갑작스런 부탁을 꺼냈다.
“부탁이 하나 있네.”
그러나 세은은 냉정하게 손을 내저었다.
“이미 우리의 거래를 끝난 것으로 아는데?”
“허허. 형제여.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네.”
물론 세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원래라면 세은이 먼저 도와준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같은 신을 모신다는 것은 그만한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세은의 마음에는 그 정도의 여유가 없다.
세은의 표정에 크게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한 추기경은, 새로운 제안을 그에게 건넸다.
“내가 건네줬던 자료를 읽었다면 신성력의 폭주, 그 해결 방안이 크게 없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정말 별거 없던데.”
추기경의 말에 세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허허. 하지만 나를 도와준다면 그 후유증에서 벗어난 사람을 소개해 주지.”
“뭐?”
추기경의 말에 세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과 같은 증상에서 벗어난 사람이 이 마계에 있다니?
놀란 세은의 표정에 추기경이 계속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왜 이런 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마족들을 피해서라네. 그리고 이곳을 구축하는 동안 많은 이들이 자신을 희생했지. 여신의 교리를 어기는 일이지만…….”
거기까지 말한 추기경은 매우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쳤다.
“그러나 인간이 여신의 말씀을 오롯이 따르기에는 항상 너무나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렇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거기까지 말하고 추기경은 잠시 짧은 기도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던 체한도 추기경을 따라 같이 성호를 긋고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세은의 생각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추기경이 말한 폭주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불명확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확실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먼저 길을 밟은 사람에게는 더 자세한 조언을 들을 수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지?”
짧은 기도를 마친 추기경에게 세은이 물었다.
세은은 다시 죄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자애로운 얼굴로 세은의 물음에 대답했다.
“별일 아니라네.”
곧 이어지는 추기경의 말을 들은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같이 배신자를 색출해 주기만 하면 되네. 반응은 내가 볼 테니 그저 자네는 밖에서 우리의 정보를 얻었다고만 해주게.”
그렇게 새로운 거래가 성립되었다.
* * *
“추기경님 들어오십니다!”
세은은 추기경과 체한을 따라 대예배실로 이동했다.
대예배실에는 은신처에서 한가락씩 하는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추기경의 긴급 호출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여서 수군거리고 나누고 있었다.
“뒤는 누구지?”
그 와중에 모르는 얼굴인 세은이 추기경과 함께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에 세은에게로 집중되었다.
“자자, 다들 자리에 편하게 앉지.”
추기경은 그런 사람들의 궁금증을 뒤로하고, 먼저 평상시와 다름없이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현재 대예배당에 모인 인원들은 모두 일정 직위 이상의 역할을 맡고 있는 자들이었고, 이들이 아니면 밖과 접촉할 만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 없었다.
“우선 갑작스럽게 이렇게 회의를 하게 돼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추기경의 사과에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현재 이곳의 교황 자리가 공석인 지금, 최고 책임자는 누가 뭐래도 눈앞의 추기경이었다.
이 은신처가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전에 받은 피해를 완전히 수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덕분에 추기경이 더욱 예민하고, 다급한 것이기도 했다.
“일단 나와 함께 온 형제를 소개하지.”
추기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세은에게로 집중되었다.
“형제는 다른 대륙에서 온 여신의 자녀라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 이곳으로 찾아왔지.”
“아아…….”
추기경의 말에 모두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대륙에서 온 형제라면, 추기경이 이렇게 긴급회의를 소집할 만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진 추기경의 말은, 그런 모두의 생각을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그런데 말이야, 어떻게 이 형제가 우리의 위치를 알고 찾아올 수가 있었을까?”
“…….”
추기경의 말에 대예배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냉각되었다.
이 말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멍청한 자는, 지금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 말씀은?”
성기사 한 명이 추기경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네. 매우 유감스럽게도…….”
추기경은 분위기 조성을 위해 바로 말을 하지 않고 장내의 모든 이를 일일이 돌아보았다.
“이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이겠지.”
“……!”
추기경의 입에서 모두가 믿고 싶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범인이 당황한 틈을 타서 그대로 밀어붙어야 했다.
추기경은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자, 그럼 이 형제에게 물어보지. 형제여, 우리의 위치는 어떻게 알았는가?”
“드워프들에게 들었다.”
“드워프들이 우리의 위치를 알고 있었나?”
“그래.”
벌써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세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다만 처음과 두 번째에 말했던 것과 내용이 다르지 않게 말하는 것이 중요했다.
“허어…….”
세은과 추기경의 대화를 듣던 장내의 누군가가 한숨을 터트렸다.
이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에, 세은이 추기경에게 말을 놓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사이에 추기경과 세은의 대화는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는 것은 확실하겠군.”
“그렇지 않겠어? 드워프들이 알고 있을 정도면 말이야.”
“좋아. 얘기 고맙네.”
추기경의 몸이 다시 장내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추기경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하자 장내의 사람들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비록 자신이 배신자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의 오해만 받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모두의 심장이 작게 오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를 심문하는 것은 불가능하군.”
추기경이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추기경과 오랜 시간 함께한 이들의 눈에는, 그가 들끓는 분노를 참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러니 우선은 명령을 내리겠네. 이제부터 모든 외부 활동은 금지. 오늘 밤에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대기하시게.”
“알겠습니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추기경은 그대로 긴급회의의 끝을 선언했다.
“자, 그럼 모두 돌아가게.”
사안에 비해 너무나 빨리 끝난 회의에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주변에는 절대로 회의의 내용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노파심에 하는 말이니…… 지켜주길 바라네. 만약 회의의 내용이 새어 나간다면…….”
추기경은 말을 끝까지 매듭짓지 않았다.
그러나 숨겨진 말이 무엇인지 다들 상상할 수 있었다.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예배당에서 물러났다.
모든 사람들이 장내에서 물러나는 것을 본 추기경이 체한에게도 얘기했다.
“체한은 록펠러를 데려오게. 약속한 것은 지켜야겠지.”
“예. 알겠습니다.”
추기경의 명령을 받은 체한 역시 인사를 올리고 천천히 대예배당에서 물러났다.
“록펠이란 사람이 바로 그 신성력 폭주 후유증을 이겨낸 사람인가?”
“그렇다네.”
세은의 질문에 추기경이 흔쾌히 대답했다.
“아, 그리고 말일세…….”
“응?”
체한까지 대예배당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추기경이 세은에게 말했다.
“자네, 상당히 고위 사제인 것 같은데 말이야.”
“뭐…… 그렇지.”
세은은 추기경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여유가 없는 것은 알겠지만 하나만 더 도와주시게. 형제여.”
“이번에는 어떤 일을?”
어차피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다른 곳도 아니고 신전이 있는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는 것이 더욱 수월할 터였다.
그리고 이왕 여기까지 도와준 거 배신자 색출을 도와야 자신의 기도가 먹힐 가능성이 더 높았다.
“잠시 후 완전히 달이 중천에 뜨면 그때 내가 한 가지 명령을 내릴 걸세…….”
세은이 자신의 부탁에 관심을 보이자, 추기경은 계획을 세은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떤 내부인도 아닌 바로 세은이었다.
“아하. 확실히 그렇게 하면 알 수 있겠어.”
세은은 추기경의 계획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