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46. 마계의 사제들 (3)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세은은 은신처로 돌아간 남자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불만을 터트렸다.
딱히 시간을 재고 있지는 않았지만, 족히 한 시간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땅으로 내려오고 있던 태양은, 어느새 지평선과 거의 맞닿기 직전.
밀려오는 지루함에 세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안 나오는 거 아냐?”
세은은 순간 의심이 불쑥 치솟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자신에게 자료를 건네주는 데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다면, 차라리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판단이기는 했다.
부탁을 들어줄 것도 아닌데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물러서기도 여의치 않았다.
“일단 딱 한 시간만 더 기다려 보고…….”
원래 어느 조직이든지 아래에서 위로 보고가 올라가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
세은은 그런 시간을 감안해서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만약 나오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실력행사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 근처에 있는 것은 확실하니까.”
다른 상황이라면 막 들이치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마계로 넘어와서 유일하게 발견한 희망이었다.
거기에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마계에서, 신성력이 폭주하고 난 다음의 상태에 대해 그들 말고 달리 아는 놈들이 있을 리가 없다.
“어이!”
그러나 다행히도 세은이 번거롭게 실력행사를 해야 하는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은이 설정한 기한인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안으로 들어갔던 남자가 한 손에 종이 더미를 한 묶음 들고 찾아왔다.
“오긴 왔군.”
“당연하지.”
지루함에 지쳐 굳은 표정이었던 세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손을 내밀었다.
“잠깐.”
그러나 남자는 세은의 행동에 뒤로 한발 물러나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왜?”
남자의 행동에 세은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대놓고 자료가 있음을 보여주는 걸 보면 자신에게 주려고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뒤로 물러나는 거지?
“이 자료를 주기 전에 물어볼 것이 있다.”
“난 또 뭐라고.”
별거 아닌 남자의 말에 세은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가 궁금한데?”
세은이 순순히 협조하자 오히려 맥이 빠진 남자가 말했다.
“이 장소로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체한이다.”
“그래. 체한.”
남자, 체한의 이름을 들은 세은이 정확하게 그를 지칭하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아까 체한 네게 말을 했잖아?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그 자료를 받으러 왔다고 말이야.”
그러나 체한은 그런 세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이 장소에 우리가 있다고 확신하고 찾아온 이유.”
“아아. 그거?”
아바돈에게 정보를 듣고 안내를 받은 세은으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미리 생각해 둔 답이 있었는지, 세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술술 대꾸했다.
“드워프 마을에서 들었는데 말이야.”
“드워프 마을?”
세은의 대답에 체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 드워프 마을.”
“드워프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안다는 거지?”
“나도 모르지, 그건.”
세은은 태연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드워프들이 마물 때문에 곤혹을 당하고 있는 것을 도와줬어. 그러면서 얘기를 하다가 이곳에 대해서 정보를 얻게 되었고.”
“드워프들이 우리 위치를 알 리가 없는데?”
“아,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알 리가 있어?”
말을 하는 세은의 태도는 너무 당당해서, 거짓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체한도 일부 드워프들이 마족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예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닌지라 커다란 의심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 가지.
드워프들이 알고 있을 정도면 마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은신처가 무사한 거지?’
체한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본 세은은, 다시 손을 내밀며 그에게 요구했다.
“일단 대답을 했으니 그 자료부터 주고 생각하지그래?”
“그러지.”
체한은 순순히 자료를 세은에게 넘겼다.
‘역시 교단 애들이 착하다니까.’
간단한 말로 쉽게 자료를 넘겨받은 세은은 곧바로 종이를 확인했다.
어차피 일이 잘 풀리든 풀리지 않든, 은신처를 옮기라고 조언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보니 알아서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세은은 체한에게 건네받은 자료에 집중했다.
『마나와 오러는 폭주를 시킬 수가 있는데, 왜 신성력은 그렇지 못할까?
이 작은 의문에서 신성력의 폭주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의문은 떠오르지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신실한 여신의 사도들이 신성한 힘을 폭주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족들의 세력이…….』
여기까지 읽은 세은은 그대로 종이를 여러 장 휙휙 넘겼다.
자료의 앞을 차지하고 있는 서론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폭주 이후로 치료가 된 사람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였다.
“여기군.”
빠르게 종이를 휘리릭 넘기던 세은의 시선은, 이내 찾던 정보가 있는 쪽에서 멈췄다.
『……마나와 오러의 폭주와는 달리 신성력의 폭주는 여신의 사랑을 받는 이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행동이다.
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며, 여신은 아무리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도 사랑하는 자식들이 몸을 해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 뒤로, 폭주시킨 다음에는 왜 신성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는지, 그리고 여신이 왜 그러한 뜻을 지니고 있는지 상당히 길게 서술되어 있었다.
길고 긴 설명이 적혀 있었지만, 자료의 내용을 요약하면 딱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여신은 자신을 해치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신의 의지가 깃든 신성력 역시 마찬가지.
그러므로 다시 신성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신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결론은 기도를 하라는 얘기네.’
그리고 자료의 마지막에는, 기도를 통해서 여신에게 신성력의 사용을 다시 허락받은 몇몇의 사례가 적혀 있었다.
“거 참…… 너무하네, 이건.”
세은도 분명히 예전에 여신의 부름을 받아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처음에 막 이계로 소환되었을 때, 그것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일이었지만.
자료에 적힌 설명은, 그때 만난 여신, 에일린의 성격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삐졌다는 말인데…….’
자료를 모두 읽은 세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왕을 상대하다 그런 건데 사정은 봐줘야지.’
삐졌다고 하기에는, 교리 자체가 스스로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세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신성력이 회복되었는데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고작 그런 교리 때문이라니.
세은의 입장에서는 삐진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 다 읽었으니까 가져가.”
세은은 일단 자료를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체한에게 넘겼다.
“다 본 건가?”
“그래.”
별다른 내용도 없었기 때문에 세은은 미련 없이 자료를 돌려주었다.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군.”
“후우…….”
체한의 질문에 세은은 그냥 한숨을 깊게 쉬는 것으로 대답했다.
물론 방법은 찾긴 찾았다.
그러나 그 방법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말로 교리에 적힌 것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세은은 예쁨을 받은 만큼 에일린이 더 화가 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 안 그러면 죽는데 어쩌라는 거야. 죽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그러나 원래 신들은 조금씩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 어느 신화의 신이라도,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단점이 있으니까.
차오르는 짜증에 세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탁― 타다닷―
“멈춰라!”
“……?”
세은이 머리를 벅벅 긁고 있던 그 때, 몇 명의 인원이 체한과 세은을 포위했다.
세은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체한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제이슨 경!”
체한의 말에 제이슨이라고 불린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지?”
그랬다.
돌발 상황에 체한이 경계 근무 교대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자, 이상을 느낀 책임자 제이슨이 인원을 끌고 밖을 탐색한 것이었다.
그리고 체한과 세은이 내부의 서류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내통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외부인에게 우리 교단의 자료를 빼돌려 준 건가?”
“자, 잠깐만!”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체한이 손을 내저어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이슨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세은과 체한, 둘에게 달려들었다.
일단 잡아놓고 심문할 생각이었다.
“후우!”
가뜩이나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라서 실망하고 있는 세은이다.
거기에 무작정 자신에게 달려드는 제이슨을 보고 세은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오해를 받는 것뿐이니 상대를 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물도 아니고 여러 명의 사람이 진심으로 덤벼드니 세은으로서는 난감한 상황.
검술밖에 사용할 수 없는 세은으로서는 까닥하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스릉―
일단 세은은 허리춤에서 달과 별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장 먼저 달려드는 제이슨의 검을 깔끔하게 절단해서 공격을 막아냈다.
“크흣! 강하다! 조심해!”
“제, 제이슨 경, 잠시만!”
체한이 제이슨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세은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전투는 벌어졌다.
상대의 선공으로 시작되었으니, 어느 정도는 거칠게 다뤄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이미 공격을 시작한 상대를 말로 설득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제이슨이 생각했던 것처럼 일단 잡아놓고 설득하는 것이 더 간단했다.
“홀리 애로우!”
체한이 한 명에게 잡혀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이, 다른 남자가 빛의 화살을 생성했다.
서걱―
그러나 세은은 가볍게 빛의 화살을 잘라냈다.
너무 간단하게 자신들의 공격이 세은에게 막히자, 남자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퍽―!
“컥?”
세은은 그대로 힐트를 이용해 근거리에 있는 남자 하나를 제압했다.
달의 검의 힐트에 제대로 후두부를 강타당한 남자는 그대로 바닥과 진한 포옹을 하게 되었다.
“큭!”
그를 무시하고, 세은은 신성 마법을 발동하던 제이슨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마법을 취소시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발을 걸어서 넘어트리고 등을 밟았다.
“허억!”
아주 짧은 공방만으로도 벌써 두 명을 제압한 세은은, 다른 두 명을 제압하기보다 검을 제이슨의 급소로 가져가는 것을 택했다.
“동작 그만.”
세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일대일로 겨루고 있던 체한과 상대까지 자신에게 집중되자 세은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둘의 목숨을 없다.”
스르릉―
저물어가는 노을의 빛을 받은 별의 검이 빨갛게 빛났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검신의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지만,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마치 요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일단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고 판단해야 할 거 아냐. 그치?”
“이, 이 악마!”
“악마라니?”
세은은 그대로 검을 인질들의 급소에 가져가며 체한에게 명령했다.
“가서 사정 설명할 만한 높은 사람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