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46. 마계의 사제들 (2)
“너무 일찍 죽였나?”
세은은 이제 30분 정도 더 가면 된다고 한 악마의 말을 듣고 그대로 악마를 참살했다.
그러나 곧, 조금 더 있다가 죽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재수 없게 안내인으로 뽑혀서 세은을 안내하게 된 악마는 영문도 모르고 그대로 생을 마감했다.
“아니야. 30분 뒤에 어차피 죽이기는 했어야 했으니까.”
잘못해서 악마와 같이 있는 것을 보이면 도움을 받기 쉽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신성력을 쓰는데 악마랑 같이 있는 것은, 신성력이 없는 사람이 악마와 같이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수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30분을 넘게 헤맸지만, 어디에서도 신성력은커녕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여기가 맞다는 얘기인데 말이야.”
세은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지런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러다가 해가 지는 거 아니야?”
해가 점점 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세은은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 주변에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을 리 만무.
세은은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끄응…….”
그러나 아무리 곧고 주변을 훑어도 신성력은 고사하고 생기도 느낄 수가 없었다.
“잠깐 쉬었다가 갈까.”
결국 지친 세은이 잠시 멈춰서 휴식을 취하려고 바닥에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응?”
턱-
갑자기 울창한 숲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뭐지?”
세은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탓-
그러나 소리가 처음 났던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또 다시 미미하게 들린 소리가 방금 전 그 자리에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냐?”
주변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세은이 엉덩이를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주변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은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역시나 몸이 온전한 상태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은신에 특화가 되어 있지 않은 이상,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동안 미행을 당했는데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공격이 들어왔으면 달라졌겠지만.
“이제는 들켰으니까 빨리 나오지그래?”
세은의 말에도 주변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흐음……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가.”
세은이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소리가 들리는지 탐지했다.
그러나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스릉-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세은은,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양손에 검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세은은 달과 별의 검을 가슴 위로 치켜들고, 숨어 있는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경고를 전했다.
“자, 나오지 않은 것은 네 잘못이니까, 알아서 잘 피하도록.”
서걱-
세은은 검에 신성력을 담아 휘둘렀다.
마치 거대한 검이 쓸고 지나가듯이 검을 휘두른 방향의 나무들이 가볍게 잘려 나갔다.
“이 검,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든단 말이야?”
절삭력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승한 것을 보면서 세은이 나지막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래서 장비발, 장비발 하는 건가?”
서걱-
세은은 감탄을 하며 다른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숨어 있는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럼 이쪽인가?”
타앗-
남은 방향은 한 번에 끝내기 위해 세은이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탓!
“자, 잠깐!”
“호오? 드디어 나왔네.”
“너 정체가 뭐지?”
숨어 있던 곳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한껏 경계심을 표추라며 세은에게 물었다.
“남에게 정체를 물을 때는 먼저 대답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흥. 마계에 우리 말고 여신을 모시는 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마계 말고 다른 곳에는 있지.”
세은의 말에 남자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철컥-
세은은 그런 남자의 반응을 무시하며, 휘두르려던 검을 검집으로 회수했다.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말이야.”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는 세은의 말에 남자가 다시 의심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세은이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직접 확인한 남자는, 의심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했다.
“신성력을 폭주시킨 다음에 관한 증상을 다룬 자료가 있을까 하는데 말이야.”
“신성력을 폭주시켰다고?”
세은의 말에 남자가 입을 떡 벌리며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떤 멍청한 놈이 그런 짓을 한 거지?”
“아아. 그건 알 필요 없고. 하여튼 그래서 자료가 있어, 없어?”
“필요한 건 그것뿐인가?”
“그래. 다른 건 필요 없어.”
“음.”
세은의 말에 남자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이내 세은에게 말했다.
“일단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봤으니, 한번 윗선에 물어보고 오지. 다만 따라오려고 한다면 더 이상의 호의는 없을 거야.”
“물론.”
남자의 경고에 세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물어보고 와주면 좋겠군.”
세은이 본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금방 다녀오지.”
그런 세은의 행동을 확인한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몸을 날려 이동했다.
세은은 가만히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자료만 얻을 수 있다면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마계에 있는 신도들이 외부인에 대해 의심이 깊은 것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당연한 일.
딱 원하는 자료만 얻고 빠져서,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상황을 보니 자료도 꽤 있는 것 같고…….”
아무래도 마계가 신성력을 폭주시키는 일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만 하더라도 이 위치를 알려준 것이 마족인 아바돈이니까.
세은은 편하게 앉아서 돌아올 남자를 기다렸다.
* * *
체한은 은신처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대신전으로 들어갔다.
비록 보고 절차가 있었지만, 지금의 일은 바로 직통으로 보고를 해도 될 정도의 중요한 일이었다.
직접적으로 듣지는 못했지만, 대화를 미루어보아서 밖을 헤매고 있는 남자는 다른 대륙에서 온 여신의 자식이 분명했다.
그러나 마계의 정세가 심각한 지금, 바로 은신처로 들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은신처의 위치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어떻게 알고 이 주변을 헤매고 있는지도 매우 의심스러운 문제였다.
벌컥-
“추기경님!”
체한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추기경이 뒤를 돌아봤다.
“체한? 무슨 일인가.”
이렇게 다짜고짜 자신에게 오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였기 때문에, 추기경은 가장 먼저 용무를 그에게 물었다.
“급하게 보고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말해보게나.”
담담한 추기경의 말에 체한이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대륙에서 온 것 같은 여신의 자식이 지금 저 밖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응?”
미처 예상하지 못한 체한의 말에 추기경이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체한은 최대한 잘 전달되도록 요약하여 추기경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주변을 자꾸 헤매는 수상한 사람이 있어서 뒤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은신처를 찾는 것 같아서 마족의 종자가 아닐지 의심을 했지만 마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실수로 위치를 들키고 말았습니다.”
“위치를 들켰다고?”
체한의 실력을 알고 있는 추기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아주 미세한 소리였는데 알더군요.”
“그래서? 계속 말해보게.”
체한은 너무 급하게 달려와서 잠기려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모르는 척 그대로 숨어 있었는데, 갑자기 무기를 뽑아 들더니 경고와 함께 주변의 모든 나무들을 베어 넘기더군요.”
“허허. 상당히 성격이 급한 자로군.”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무를 베어 넘길 때 신성력을 사용한 것이 중요합니다.”
“신성력을? 확실한가?”
“네. 몇 번이고 의심했지만 신성력이 맞습니다. 거기에 얼굴도 몸도, 온전히 인간이었습니다. 마계에서 보지 못한 자이니 다른 대륙에서 온 것은 맞는 듯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찾는 건가?”
“그의 말에 따르면, 신성력을 폭주시키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증상에 대한 자료를 원했습니다.”
“으음.”
체한의 말에 추기경은 한 손으로 의자의 모서리를 툭툭 내려쳤다.
“상황은 크게 의심이 될 만한 것은 없군.”
“예.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추기경은 단 한 가지 걸리는 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과연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는 사실이 걸리는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체한을 가만히 지켜보던 추기경은 생각에 잠겼다.
신성력을 사용한다면 마족의 앞잡이가 아니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생각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은신처의 위치를 알고 찾아 왔다는 사실이 걸렸다.
그 말은, 구성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라야 하는 은신처에 대한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추기경의 머릿속에 내부 단속에 대한 필요성이 박혀들었다.
“스파이…… 또는 배신자인가?”
답답해진 추기경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체한에게 말했다.
“일단 이 일은 다음에 나와 다시 얘기를 하지. 체한.”
“예!”
이 소식을 가져온 체한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추기경의 생각이었다.
스파이나 배신자가 의심되는 이상 이것에 대한 정보는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공개하는 것이 타당했다.
추기경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스파이나 배신자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들을 색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은신처에 있는 동료들은 전부 생사를 함께 넘나든 전우들이었다.
함부로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마족들에게 밀리자, 온몸을 바쳐서 이 은신처를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인 이들이 전부.
내부의 안녕을 위해서는 함부로 의심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럼 밖에 온 자는 어떻게 할까요?”
체한의 물음에 추기경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아, 그가 있었지. 자료를 넘겨주게. 다른 것도 아니고 정말로 그것만 원한다면 그 일 때문에 온 것이 맞겠지.”
“알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온 형제를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예!”
체한은 추기경의 자비와 인품에 감탄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나 추기경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료를 주기 전에 혹시 은신처의 정보를 어디서 누구에게 알았는지 꼭 물어보게나.”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럼 자료를 건네주지 말게. 아니면 일단 자료를 절반만 주고 거래를 하는 것도 괜찮지.”
“아…….”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추기경의 말에 체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담담하게 그런 체한의 시선을 받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줘야 하겠지만…… 내부의 스파이나 배신자를 색출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가 위험하네.”
“아!”
추기경의 말에 체한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얻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하네. 물론 잘 알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들키지 말고.”
“예!”
체한이 추기경의 말에 힘차게 대답하고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은신처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