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46. 마계의 사제들(1)
릴리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한 옷들 사이로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너무 격하게 일어나서 얇고 작은 옷 옆으로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이 모두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아 그 노출은 더욱 심했다.
그러나 여전히 릴리트를 보는 세은의 눈은 무심했다.
단순히 잘 빚은 예술 작품을 보고 감상하고 있는 그런 눈빛.
릴리트의 섭혼술은 세은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몸매가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목숨이 달린 지금 여자에 정신이 팔리는 멍청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뭐?”
세은은 가볍게 자신의 귀를 파며 릴리트의 말을 받았다.
“벗는 것밖에 모르는 몽마가 하는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콰앙―!
세은의 말과 동시에, 릴리트의 신형이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세은은 어느새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달의 검을 뽑아 릴리트의 공격을 막아냈다.
“크흣!”
달의 검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운에 릴리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달의 검이 지니고 있는 달의 기운과, 밤에 은밀하게 꿈에 숨어서 활동하는 릴리트의 기운은 완전히 상극.
릴리트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인간과 거리를 벌렸다.
“싸움은 사람을 보고 거는 거라는 거, 마계에서는 안 가르치나?”
세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릴리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흐음. 막상 있으니까 쓸 만하네?”
거추장스러워서 들고 다니지 않았던 검이지만, 마계의 특성상 신성력은 어지간하면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달의 검과 별의 검은 세은을 도와줄 수 있는 최적의 무기였다.
탓―!
세은이 순간 검에 집중한 사이, 릴리트가 다시 세은에게 달려들었다.
방금 전에는 도발을 하면 자신이 달려들 것을 알고 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막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을 제대로 보라니까. 학습을 못하네.”
서걱―
세은은 가볍게 릴리트의 공격을 피해내며 달의 검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옷의 끈을 끊어버렸다.
덕분에 릴리트의 몸을 가리고 있던 천 조각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릴리트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신을 가릴 생각을 하지도 않고 세은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 제대로 했으면 벌써 끝났어. 알지?”
세은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릴리트에게 말했다.
릴리트는 잠시 분한 표정으로 세은을 바라보다가 이내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어 다시 걸쳤다.
잘린 끈은 가볍게 묶어서 응급처치를 마칠 수 있었다.
짝짝짝―
그때 문이 열리며 유쾌한 박수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하하. 릴리트가 이렇게 맥도 못 추고 당할 줄이야.”
“아바돈님!”
“이왕 구경을 할 거면 안에서 구경하지?”
놀란 릴리트와는 달리, 밖에 아바돈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세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바돈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자신의 실력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미끼라도 바알을 꾀어낼 정도라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하니까.
세은은 그런 아바돈에게 자신의 실력을 가볍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아바돈이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릴리트는,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바돈은 그런 릴리트에게 진정하라고 손짓을 하고는, 소파에 먼저 털썩 자리를 잡았다.
“좋아. 앉아서 얘기하지.”
“그게 편하지.”
세은도 마찬가지로 아바돈의 건너편에 앉았다.
릴리트는 조심스럽게 아바돈의 뒤에 자리를 잡고 시립했다.
“상당한 실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릴리트가 손도 못 쓰다니 대단하군.”
“비교하면 기분이 상하는데.”
“아, 이거 실례했군.”
자신을 무시하는 아바돈과 세은의 대화가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릴리트는 흔들림 없는 무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솔직히 실력은 릴리트가 모자라도, 외모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마계에서 외모에 넘어가는 얼간이가 있을까?”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은 유독 외모에 약하니까. 릴리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뭐, 솔직히 몽마 중에서도 예쁘기는 하네.”
“그래?”
세은의 솔직한 말에 아바돈이 말했다.
“어차피 자네가 이겼는데 원한다면 품어도 좋아. 릴리트도 아무 말 하지 못할 테니까.”
“사양하지.”
“호오?”
노골적인 자신의 제안해도 세은이 사양하자 아바돈이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굳이 급하지도 않고 말이야. 적이 득실한 곳에서 빈틈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아니야, 아니야. 신의 종자. 아니, 실력이 있으니 대접을 해줘야겠지. 너 정도면 내 대계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정도 배려는 해줄 수 있어.”
아바돈이 은근하게 세은에게 권유했다.
릴리트에게 빠지면 더욱 조종하기 쉽다는 계산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뭐,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서로의 이익이 맞으면 협력을 할 테니 그만 제안하는 것이 어때?”
“그렇다면야.”
세은의 완고한 말에 아바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인간은 신기한 느낌이었다.
다른 인간들은 자신을 보면 그대로 공포에 오물을 지리고 주저앉기에 바빴다.
그렇지 않은 인간이 생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여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그렇지.”
딱!
세은의 말에 아바돈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뒤에서 가만히 시립하고 있던 릴리트가 살짝 앞으로 나서며 세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바알이 마왕들과 마족들을 초대한 날은 앞으로 한 달 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이긴 세은과 주군인 아바돈이 함께 있어 릴리트의 말은 어느새 존대로 돌아서 있었다.
“우리의 계획은 단순합니다. 끝까지 남아서 바알의 성의 구조를 파악하고, 바알이 방심하거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았을 때 친다.”
“상당히 허술한 계획이군.”
세은이 구체성이 없는 계획에 혹평을 내렸다.
그러나 릴리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운이 많이 필요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밖에서부터 바알의 성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있는 계획입니다.”
“그건 그렇기는 하지.”
바알의 성 정도면 안으로 진입하는 것만 해도 커다란 일이었다.
전에 세은이 마계에 왔을 때도 바알과는 적당히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일이 있었으니까.
“이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연 바알이 방심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바알의 시선을 끌 만한 사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이제 그 문제는 해결이 됐습니다. 인간…….”
“그냥 세은이라 해.”
세은을 뭐라고 호칭해야 할지 애매해하던 릴리트는 세은의 말에 호칭을 바꿔서 말을 이어나갔다.
“세은님이 바알의 시선을 충분히 끌어주면, 아바돈님이 단숨에 빈틈을 노릴 겁니다.”
“흐음…….”
릴리트의 설명이 끝나자 세은이 아바돈을 바라보았다.
“가능하겠어?”
“흥. 바알과 이몸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세은의 말에 아바돈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지만, 이미 바알의 전력(全力)을 겪은 적이 있는 세은은 쉬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대로는 자살 행위 같은데?’
다른 마왕도 아니고 바알이라면, 더욱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한 달이라…….’
세은은 릴리트가 말한 기한인 한 달 안에 몸을 회복할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아! 여기 사제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신의 종자들?”
“그래.”
“있지.”
세은의 말에 가볍게 대답한 아바돈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너, 마계에 있던 인간이 아니군.”
마계는 정말 여러 종족이 있었다.
그중에는 아주 드물지만 인간도 몇 존재했다.
물론 다른 종족들과의 혼혈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간의 피가 가장 진하게 발현되어서 인간의 후예들은 편하게 인간이라고 통칭했다.
세은도 당연히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아바돈은, 세은의 질문에 단박에 그가 마계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기는 하지.”
어차피 마계의 사제들을 찾아가려면 들킬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세은은 담담하게 아바돈의 말을 인정했다.
“어쩐지. 원래 너 같은 인간이 있었다면 그렇게 신의 종자들이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겠지.”
아바돈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내 조건은 간단해. 그들을 만나보고 싶은데 말이야.”
“이유는?”
“알아볼 것이 있어서.”
세은은 거기까지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잠재적 적에게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
“흐음.”
세은의 제안을 들은 아바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릴리트.”
“예. 아바돈님.”
“어떻게 생각해?”
“계약을 맺고 난 다음에는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긴 하지?”
여전히 정자세로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릴리트는, 아바돈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릴리트와 자신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 아바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위치는 당연히 알고 있지. 대신 미리 계약은 맺고 가야겠어.”
“당연하지.”
자신이 아바돈을 믿지 못하는 만큼, 아바돈도 세은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좋아. 그럼 바로 계약을 진행하도록 하지.”
아바돈은 손을 들어 가볍게 상처를 냈다.
뚝― 뚝―
이내, 상처에서 굵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마계라서 그런지 계약의 마법진은 아바돈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바닥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자.”
아바돈의 눈짓에 세은 역시 자신의 손을 들어 가볍게 피를 냈다.
뚝―
세은의 피까지 들어가자 마법진은 은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레모리와 계약할 때와는 사뭇 다른 빛.
그레모리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맹세했지만, 지금의 계약은 서로의 신을 걸고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계약을 어겨도 존재는 유지가 되지만, 자신의 신의 분노를 받아 모든 힘을 잃게 되니 피의 맹약과 비슷한 조건이었다.
아바돈이 먼저 자신의 조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마계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위대한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그의 자식인 나 아바돈이 맹세한다. 아버지의 직계 자손인 나 아바돈은 바알을 처치 할 때 눈앞의 인간의 도움을 받는 대신, 그가 원하는 신의 종자에 대한 정보를 주고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
아바돈의 말이 끝나자 세은이 말을 받아 계약을 이었다.
“세상 만물의 어머니이자 자애로운 여신인 에일린의 이름을 빌려 나 도세은이 맹세한다. 마족 아바돈이 바알을 처치할 때 계획에 도움을 주며, 그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 대가로 마족 아바돈에게 내가 원하는 정보를 받는다.”
화아악―!
두 명의 계약 조건에 대한 맹세가 끝나자, 은은하게 빛나던 마법진의 빛이 중앙으로 모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번쩍이며 빛이 두 갈래로 나뉘어 아바돈과 세은의 손등에 표식을 남겼다.
“계약 성립이다.”
아바돈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바알을 잡는다는 계획의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
세은도 역시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그레모리랑 맺은 맹약의 기한이 아직 안 끝났네.’
아직 손등에 남아 있는 그레모리와의 피의 맹약을 보며, 세은이 생각했다.
둘의 계약이 완전히 마무리되자, 릴리트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세은에게 원하는 정보를 전해주기 시작했다.
“마계에 있는 신의 종자들은 여기서 꽤 먼 거리에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안내자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좋아.”
“아, 그리고 안내자는 도착하면 그대로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응?”
릴리트의 말에 세은이 의아함을 담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처음 세은을 데려왔던 악마를 처리했을 때처럼, 릴리트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증거는 없애는 게 좋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