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45. 상급 마족 아바돈 (4)
“그래도 드워프들에게 말은 하고 가야지.”
“그런 하찮은 놈들 때문에 내 시간을 뺏길 수는 없다.”
“그럼 먼저 가고 부하 중에 아무나 보내. 따라갈 테니까.”
세은의 말에 아바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굳이 지금 바로 갈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세은의 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부하를 보내지.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시지.”
여전히 당당한 세은의 눈을 직시하던 아바돈은, 이내 몸을 날려 자신의 성으로 돌아갔다.
아바돈의 신형이 먼지처럼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세은은 드워프들의 마을로 다시 들어갔다.
“이, 이, 인간!”
세은이 홀로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엔블이 세은에게로 달려들었다.
“무, 무슨 일인가 대체?”
“아아. 별일 아니야.”
세은은 놀란 엔블을 손을 내저으며 진정시켰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바로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설마, 아바돈님과 척을 진 건가?”
말을 하는 엔블이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만약 세은이 아바돈과 척을 진 것이라면, 세은이 있던 이 마을도 위험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세은은 정신이 없는 엔블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랬으면 주변이 이렇게 조용했겠어? 아바돈이 부하를 보낼 테니 얼굴 좀 다시 한 번 보자니까 걱정하지 마. 마을에는 아무런 해도 없을 테니까.”
“그, 그런가?”
마을에 아무런 해도 없을 것이란 세은의 말에 엔블의 혈색이 그나마 조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아바돈님은?”
“돌아갔어.”
세은이 말을 이었다.
“금방 부하를 보낸다고 했으니 마족이 다시 온다고 괜히 놀라지 마. 미리 말해주는 거야.”
“아, 알겠네.”
시종일관 태연하고 담담한 세은의 태도에 엔블이 천천히 진정을 하기 시작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허옇게 질려 있던 얼굴도 이제는 거의 혈색이 돌아온 상태.
“뭐, 차라리 일이 잘 풀린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제대로 보답도 하지 않고 보내려니 마음이 편하지 않구만.”
세은이 곧 떠난다고 하자 엔블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에 세은의 태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마을에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거기에 마목까지 구해다 줬으니 제대로 된 무기라도 얼른 골라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나저나 들고 있는 달과 별의 검이 얌전하구만?”
“응?”
엔블의 말에 세은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처음과는 달리 검들은 세은의 손에서 아무런 반항도 없이 얌전하게 잡혀 있었다.
“그러게. 왜 이래?”
너무 빠른 태세 전환에 세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구만? 갑자기 검이 얌전해졌어.”
지하 창고에서 세은이 계속해서 검과 씨름한 것을 지켜본 오드레가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달의 검과 별의 검이 온전히 세은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흐음. 마기 때문에 그런가?”
방금 전. 아바돈과 마주했을 때 두 검이 신성력을 이용하던 것을 생각하며 세은이 중얼거렸다.
“하긴, 얘들도 마기보다는 신성력이 낫겠지.”
일단 검들이 얌전해졌다는 사실에 만족한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려하게 잘 빠진 디자인도 그렇고, 검신을 이루고 있는 은은한 색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달과 별의 검으로 하겠나?”
엔블이 세은에게 물었다.
“이제 반항을 안 하니 괜찮을 것 같은데?”
“물론, 검이 인정한 것처럼 보이니 그 검으로 가져가도 된다네. 소중하게 다뤄주게. 우리 조상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들이니까.”
“걱정하지 마.”
세은은 엔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드워프들이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던 검을 막 다룰 생각은 없었다.
“그럼 언제쯤 오려나? 기다리면서 차나 한잔 하지. 목도 마른데 말이야.”
“그러지. 따라오게나.”
엔블과 오드레가 세은의 제안에 먼저 이동했다.
세은은 아바돈이 말한 부하가 오기 전까지 엔블과 오드레와 함께 장로실에서 다과 시간을 가졌다.
* * *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아바돈을 보좌하는 마족, 몽마 릴리트는 급작스런 주군의 명령에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의 종자와 손을 잡다니.
물론 마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자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선이 있는 법이었다.
릴리트의 생각에 신의 종자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바돈의 평판은 그걸로 끝이었다.
설사 그가 바알을 잡는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부하 마족 중에 하나가 신의 종자를 데리러 드워프들의 마을로 떠난 뒤였다.
릴리트는 아바돈의 명에 따라 신의 종자가 도착하면 계획을 설명할 임무를 맡았다.
아바돈은 다른 마족들과 달리 거래를 할 줄 아는 마족이었다.
덕분에 상당히 늦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족들보다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마족들은, 대부분 아바돈이 약속한 차후의 보상을 위해 아래에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신의 종자라니.
아무리 아바돈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하들이라도 분란이 일어날 일은 자명했다.
그리고 릴리트가 할 일은, 그 분란을 최대한 줄이는 일이었다.
될 수 있다면 다른 마족들에게는 신의 종자가 바알을 처리하는 계획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이롭다.
“정리해야겠지.”
말을 하는 릴리트의 눈이 순간 매섭게 빛났다.
신의 종자를 데리러 간 악마는 이제 영문도 모르고 릴리트의 손에 죽게 될 예정이었다.
“오, 릴리트. 왜 다시 왔지?”
나른하게 자신의 권좌에 앉아 있던 아바돈이 안으로 들어오는 릴리트를 발견하고 물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바돈님.”
“아아. 신의 종자에 대한 얘기라면 거절한다.”
릴리트가 또 다시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아바돈은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미 정해진 일이야. 다시는 언급하지 마.”
그런 아바돈의 태도에 릴리트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신의 종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
“예.”
“그럼 얘기해 봐.”
아바돈의 허락이 떨어지자 릴리트는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제 생각에 신의 종자를 이용하시는 계획은 저만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런 이유로, 신의 종자를 데리러 간 악마를 처리하겠습니다.”
“흐음…….”
릴리트의 말에 아바돈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한 손이 부족한데 말이야. 입단속을 하든가, 맹세를 받든가.”
“안 됩니다. 생각을 읽는 마왕들도 있으니까요.”
아바돈의 말에 릴리트가 단호하게 반대를 표했다.
“끄응. 표정을 보아하니 이건 양보하지 않을 것 같군.”
“…….”
아바돈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릴리트는 물론 훌륭한 보좌관이었지만,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정말로 골치가 아팠다.
물론, 이렇게까지 조직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릴리트 덕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는 아바돈은 릴리트를 포함한 몇 명에 한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주군이었다.
“좋아. 그 일은 마음대로 처리해.”
“감사합니다.”
결국 아바돈의 승인이 떨어지자, 릴리트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주군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남은 일은 실행뿐이었다.
덜컥―
“아바돈님의 명을 받아 말씀하신 인간을 데려왔…… 커헉!”
납작 바닥에 부복해서 보고를 올리던 악마는, 그대로 릴리트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주르륵―
제대로 관통한 급소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의 양탄자를 흥건하게 적셨다.
“나중에 처리하지.”
더러워지는 바닥에 아바돈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자신의 앞에서 죽였다는 불쾌감보다, 단순히 자신의 공간이 더러워지는 것이 기분 나쁜 듯이 보였다.
“후환은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릴리트도 마찬가지로, 주군의 앞에서 부하를 죽였다는 것에 대한 조심성이 없어 보였다.
둘에게 이런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는 그럼 신의 종자에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괜히 싸우지 말고.”
“죽이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말씀이라도?”
“흐음. 아니다. 다녀와.”
말을 하려다가 마는 아바돈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릴리트는, 이내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느 정도인지 한번 확인이나 해볼까?”
릴리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바돈은, 이내 일어날 이벤트 생각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 * *
세은은 아바돈의 성 내에 마련된 은밀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자신을 데려온 악마는 아바돈에게 보고를 하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세은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여유롭게 마족의 성을 둘러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전투를 위해서 쳐들어갔을 때만 마족의 성들을 구경했었으니까 말이다.
“별 다를 건 없네.”
마치 인간처럼 꾸며놓은 응접실을 보며 세은이 중얼거렸다.
애초부터 이상한 마족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꾸며놓은 인테리어가 전혀 마족의 취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특이한 취향의 인간에 가깝다고 할 만했다.
세은이 그렇게 응접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덜컥―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요염한 자태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은 거의 헐벗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는데, 온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색기가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몽마?”
“호오? 인간 주제에 제법이네.”
자신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은을 보며 릴리트가 살짝 놀랐다.
인간은 물론, 어지간한 악마들도 자신을 똑바로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눈앞의 인간은 자신과 두 눈을 마주치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앉아.”
릴리트가 먼저 소파에 앉으며 요염하게 다리를 꼬았다.
살짝 숙여진 상체는 얇은 옷으로 인해 조금만 신경 쓰면 안이 다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꼬아 올린 다리는 매끈하게 뻗어서 누구라도 시선을 주지 않고는 배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위로 시선을 줘도, 아래로 시선을 줘도 둘 곳이 없는 자태.
보통은 넋이 나가서 멍하니 그런 릴리트의 몸매를 훔쳐보는 놈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세은은 반대 자리에 앉으며 릴리트에게 말했다.
“보여주니까 보기는 하는데, 이왕 보여줄 거면 화끈하게 보여주지?”
“뭐?”
세은의 말에 릴리트가 당황해서 반문했다.
릴리트는 그냥 앉아 있던 것이 아니다.
몽마 특유의 섭혼술을 발휘해서 세은을 완전히 파헤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담담하게 이렇게 말을 하니 그녀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거, 건방진……!”
감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 인간은 없었기 때문에, 당황이 가신 릴리트는 분노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왜? 보여주려고 그렇게 입은 거 아냐? 그럴 거면 아예 벗는 게 낫지, 뭐하러 천 조각을 걸치고 있어.”
그러나 세은은 릴리트가 분노하든 말든, 담담히 그녀를 도발했다.
강자존이 기본인 마족들과의 관계에서는 지고 들어가지 않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눈앞의 몽마가 상당한 고위 마족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세은이 상대하지 못할 마족은 아니었다.
몽마는 그 특성상 정신 계열의 마법이 강력하다.
하지만 세은에게 정신 계열의 마법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릴리트는, 이어진 세은의 도발에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