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45. 상급 마족 아바돈 (2)
아바돈은 오연히 드워프의 마을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온 것을 느낀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바돈은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았다.
다른 생명체들이 자신을 보고 공포와 경외심을 갖는 일은 당연했다.
그것은 아바돈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느꼈을 때부터 숨 쉬듯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마왕이라는 존재들은 반대였다.
오히려 그들은 아바돈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난생처음, 마왕 중 하나인 바알을 처음 맞이했을 때의 공포를 아바돈은 잊지 못했다.
그리고 바알이 물러간 뒤에는 자신을 가득 채웠던 공포감만큼의 수치심이 밀려왔다.
감히, 감히 자신이 공포감을 느꼈다고?
아바돈의 목표는 그 뒤로 마왕이 되었다.
그것도 어중간한 마왕이 아니라, 바로 아바돈 그에게 수치심을 주었던 바알.
그가 가지고 있는 제1위를 노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바돈은 자신의 힘이 아직 바알에 미치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바돈은 주변의 미개하고 약한 것들을 지켜주는 대신 그들에게 마목과 마정석을 상납 받았다.
비록 아직 바알을 상대하기에는 턱도 없다지만, 아바돈은 천천히 강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보다 몇 백 년은 먼저 마계에서 마왕으로 군림해 온 바알을 목표로 하는데, 조급한 마음은 오히려 독이었다.
거기에 거사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더욱더 여유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바돈은 느긋한 마음으로 곧 드워프들이 가져올 상납품을 기다렸다.
이미 이 마을의 드워프들에게는 두 번의 기회를 주었다.
이번이 아바돈의 세 번째 방문.
다른 곳의 드워프들보다 더 규모가 큰 마을이라 특별히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지만, 그 이상 자신을 헛걸음하게 한다면 용서할 수 없었다.
만약 이번에도 마목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본보기를 보일 차례였다.
“헉헉!”
조금 더 기다리니 저 멀리서 급하게 달려오는 드워프 하나가 보였다.
익숙한 얼굴.
마을에서 가장 직책이 높은 장로인 엔블이었다.
“아, 아바돈 님!”
엔블은 급하게 뛰어와 아바돈의 앞에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엔블.”
물건이 준비되었는지 물어보려던 아바돈은, 엔블에게서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응?”
아바돈이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엔블이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무, 물건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리로 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
그러나 아바돈은 엔블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오직 엔블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이고 불쾌한 기운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신성력?”
아바돈은 곧 엔블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마기와는 상극인 기운.
바로 신성력이었다.
“신성력이 왜 느껴지는 거지?”
“예?”
아바돈의 말에 엔블이 당황했다.
그러나 아바돈은 엔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마계에도 에일린의 사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활동할 정도로 세력이 크지 않았다.
마치 대륙에서 핍박받는 흑마법사들과 같은 위치.
그리고 드워프들은 그런 자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들은 오직 물건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는 종족이니까.
그렇다면 아바돈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확했다.
“누군가 여기에 있군.”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하니 엔블은 단순히 신성력을 사용하는 자와 같이 있던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다시 와봐야겠군.’
저 멀리서 드워프들이 허겁지겁 마목을 가져오는 모습을 본 아바돈이 생각했다.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굳이 지금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아니지, 이 마을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말인데…….’
그때, 아바돈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직 바알을 잡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계획은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
어차피 바알을 잡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준 바알을 처치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다면 이놈을 미끼로 사용할 수도 있겠군. 마왕 놈들은 예전의 사태 이후로 신성력이라면 치를 떠니까 말이야. 바알도 마찬가지일 거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아바돈은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거대한 고함을 질렀다.
“신의 종자여! 여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나오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나 아바돈의 이름을 걸고 마신의 이름 아래 맹세하겠다! 하지만 끝까지 시치미를 떼고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마을을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릴 것이다!”
갑작스런 아바돈의 돌발행동에 근처에 있던 모든 드워프가 놀라서 바닥에 엎드렸다.
아바돈은 그런 드워프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공중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자! 잠깐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아무리 신의 종자라고 해도 마족인 이 몸이 마신의 이름 아래 맹세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말을 마친 아바돈은 오연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 *
엔블이 다른 장로의 부름을 받아 급하게 창고에서 나갔다.
그러나 세은은 오드레와 함께 지하 창고에서 달과 별의 검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달과 별의 검.
달의 힘을 머금은 운석과 별의 힘을 머금은 운석으로 만들어진 검답게 쉬이 세은의 손길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러 사용자가 아니라서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옆에서 보고 있는 오드레가 더 당황할 정도로, 검은 세은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의 종자여……!”
그때, 지하 창고의 밖에서 거대한 소리와 함께 자신을 향한 아바돈의 경고가 들려왔다.
상당히 깊은 곳에 있는 창고라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아바돈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을 정도.
검과 열심히 씨름을 하던 세은은, 아바돈이 지칭하는 신의 종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흐음?”
우웅―
세은의 신경이 잠시 분산된 틈을 타서 검의 반항이 다시 거세졌다.
웅―
세은은 다시 신성력을 밀어 넣어 제압을 시도하면서 오드레에게 물었다.
“방금 목소리가 마족이 맞는 건가?”
“마, 맞다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아바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드레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귀에는 마을을 흔적도 없이 사리지게 만들겠다는 경고만 맴돌고 있었다.
‘그럼 나를 부른 게 맞는 것 같은데?’
우우웅―
어떻게 자신을 발견했는지 의아해하던 세은은, 지금 자신과 열심히 씨름을 하고 있는 검에 시선을 주었다.
“혹시 이놈이랑 싸우느라 힘을 사용한 걸 알아본 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세은의 혼잣말에 오드레가 반응했다.
그러나 세은은 그런 오드레의 질문을 무시하고 일단 창고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이거 잠깐 들고 나가도 되지?”
“검의 선택을…….”
“아, 끝까지 못 받으면 다시 돌려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렇다면 괜찮네.”
웅― 웅―
세은은 여전히 반항을 하는 달과 별의 검을 쥐고 아바돈을 만나기 위해 올라갔다.
마신의 이름을 걸었으니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상급 마족을 상대할 정도로 세은의 몸 상태가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목숨이 보장되었는데 겁을 먹고 나가지 않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후. 엄청나게 반항하네. 진짜.”
“달과 별의 검과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네, 에고를 가진 검이 탐난다면 다른 검도 있으니…….”
“일단 더 해보고.”
옆에서 다른 무기를 권유하려는 오드레의 말을 자르고, 세은이 위로 올라가 장로들의 거처 밖으로 나섰다.
“나왔는가? 신의 종자여.”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 하나가, 공중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세은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아바돈이 오연하게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허공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아바돈은, 날카로운 뿔이 머리 위에 솟아나 있었다.
요요하게 빛나는 은빛 눈은 당장에라도 학살을 저지를 것 같은 흉신악살의 느낌을 여과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아바돈이 팔짱을 끼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세은이 말했다.
“건방지게 어디서 마족 새끼가 머리 위에 있어. 안 내려와?”
“호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구나.”
아바돈은 당당한 세은의 태도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허공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마신의 이름으로 약속한 것을 믿고 이렇게 나오는 건가? 나쁘지 않아. 나는 이런 당당한 신의 종자들을 아주 좋아해.”
아바돈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당당한 놈들일수록 머리를 부숴 버릴 때의 쾌감이 색다르거든.”
“미친 새끼.”
아바돈은 천천히 세은의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생각보다 강한 신성력이 느껴지는군. 이거 대어를 잡은 건가?”
웅웅―
아바돈에게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달과 별의 검이 더욱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응?”
세은은 자신의 손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검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은의 신성력에 기를 쓰고 저항하던 검들이, 지금은 오히려 세은의 신성력을 허겁지겁 받아들이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래?”
세은은 갑작스럽게 변한 검들의 태도에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아바돈에게서 더욱 강하게 흘러나오는 마기에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우웅―
성물이 세은의 의지를 받아 주변의 마기를 차단했다.
특이한 것은, 달과 별의 검도 세은의 힘을 받아서 마기를 물리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동의 적이 오니까 협력하는 건가?’
너무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어이가 없었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세은은 검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아바돈에게 시선을 던졌다.
“뭐?”
“호오…….”
주변을 채우는 신성력에 불쾌할 법도 하건만, 아바돈은 세은의 힘이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단순히 미끼 역할로 사용하는 것 말고도 더욱 많은 효용이 있을 것 같았다.
“거래하지.”
“미친 새끼.”
아바돈의 말에 세은은 단박에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족들이 거래하자는 말은 믿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아바돈은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신의 종자인 네놈이 내 말을 믿을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각자의 신을 걸고 거래하는 것은 어때?”
각자의 신을 걸자는 아바돈의 말에, 세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레모리도 그렇고, 요즘 마족들은 왜 이렇게 미친놈들이 많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족이 마신의 이름을 건다는 것은, 그레모리와 맺었던 피의 맹약만큼이나 무게감 있는 말이었다.
이 정도까지 말하면 한 번은 들어볼 만한 일인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자리를 옮기지. 주변 드워프들이 불편해하잖아.”
주위를 둘러본 세은이 아바돈에게 말했다.
아닌 것이 아니라, 아바돈과 세은이 흘리는 신성력과 마기의 충돌이 만만치 않은 여파를 주변에 흩뿌리고 있었다.
덕분에 드워프들은 잔뜩 겁을 먹은 채로 상황을 주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엔블은 마을의 수석 장로라는 책임감으로, 온몸을 후들후들 떨면서도 용케 근처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지.”
아바돈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흔쾌히 세은의 제안을 수락했다.
어차피 지금부터 해야 할 말은 감히 드워프들이 알아서도, 들어서도 안 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