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42. 마계(4)
세은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태양에 시선을 주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지만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지리를 모르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
거기에 몸마저 정상이 아니니 어제처럼 다이어 베어라도 만나면 더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기약 없이 마냥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시 빨리 지구로 돌아가야 했지만 막상 좋은 방법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세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있었다.
“후우. 어쩔 수 없이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기는 한데…….”
생각해 보면 어차피 지구로 돌아간다 해도 이 몸 상태로는 바싸고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 지구로 돌아가기는커녕 돌아갈 방법을 찾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었다.
결국 조금 조급해도 우선순위를 결정한 세은은 몸을 먼저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웅―
다행히 성물이 끊임없이 세은의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동안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모르고 있던 성물의 효능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는 순간이었다.
마기로 가득한 마계에서도 주인의 몸을 보호하며, 끊임없이 부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거라도 없었으면 진짜 막막할 뻔했네.”
헤이런에게 전해줬다가 돌려받은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이어 베어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다이어 베어를 상대로 고전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답답해서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에휴…….”
세은은 쉴 새 없이 한숨을 내쉬며 우선 냇가로 향했다.
부상을 전부 치료할 생각을 하면 막막했지만 이대로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마음이 다급한 상태에서는 더 정신을 붙잡고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냇가로 향하는 세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우웅―
다른 것 없이 오로지 몸의 회복에만 주력한 지 열흘.
드디어 세은의 손에서 빛의 검이 생성되었다.
아직은 이 정도가 한계.
그러나 무기 하나 없는 상황에서 무기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전처럼 나무 막대를 가지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
다행히 냇가에 지내는 동안 다른 마물들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냇가의 특성상 언젠가 흉포한 상위 마물들이 찾아올 가능성은 10할이었다.
그런 와중에 무기라도 다시 얻은 것은 커다란 소득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쥐여진 빛의 검을 바라보던 세은의 시선은 답답하기만 했다.
“몸에서 나가지 않으니까 답답해서 미치겠네.”
세은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신성력에 머리끝까지 짜증이 가득 치솟았다.
신성력을 지금처럼 몸에서 발출해서 운용하는 것과, 신성 마법처럼 아예 방출하는 것은 그 개념이 다르다.
몸에서 떨어지고도 그 힘이 유지되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몸 상태로 몸에서 발출하는 게 한계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몸 상태가 멀쩡해야 문제없이 일을 진행할 수가 있다지만, 그렇다고 하면 이 몸만 회복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몸을 회복하는 것도 좋지만, 적절한 때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막상 몸을 다 회복하고 돌아갔더니 이미 일이 끝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지구에서 마기를 회복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에 보았듯이 사람들을 희생하면 빠르게 회복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헤이런만 믿고 있기에는 바싸고의 이름값이 너무 무겁기도 한 상황.
“일단 움직이기는 해야겠어.”
결국 세은은 천천히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빛의 검 정도면 위급한 상황에 몸을 지킬 수는 있을 것이었다.
적어도 최상급 마물이나 마왕급만 조심하면 될 일.
그리고 그 정도의 마물들이라면 멀리서도 그 존재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잘 피해서 다니면 문제가 없었다.
“후우. 어쩌다가 내가…….”
마치 피포식자처럼 이리저리 도망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도망 다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엄연히 현실이었다.
세은은 마지막으로 수분을 한껏 보충하고는 해가 떠오르던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왕 방향을 정할 거면 정확한 기준을 두고 움직여야, 만약의 사태에도 다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물론 다시 돌아올 만한 일이 생기지 않는 게 가장 최선.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것이 항상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차라리 어중간한 놈보다 아주 강한 놈이 있는 게 나을 수도 있긴 있는데 말이야.”
걸음을 옮기며 세은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차라리 어중간한 마물이 있는 곳보다, 아주 강한 마물의 영역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런 곳은 그 영역의 주인만 피하면 오히려 더 안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영역의 주인인 마물을 피하기 위해 어중이떠중이들은 모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숲을 얼마나 걸었을까.
크게 변함이 없는 풍경을 뒤로 하며 걸어가던 세은의 코에 비릿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신성력의 발출이 어려우니 오로지 타고난 오감에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잔뜩 예민해진 세은의 후각에 느껴진 이상 징조.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세은이 주위를 경계했다.
‘…….’
피 냄새뿐만 아니라 익숙한 소리도 세은의 청각을 자극했다.
세은은 최대한 기척을 줄이며 천천히 감각이 이끄는 곳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마계라고 오직 마물과 마왕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마계에도 주민이 있고, 나름대로의 법과 규칙이 있었다.
다만 마물의 워낙 득세해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
세은이 전에 마계에 왔을 때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때는 교단의 군세가 워낙 대단했으니 그쪽에서 피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거기에 교단이 마왕을 제외한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굳이 없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지금은 여전히 숲이었기 때문에 마물이 아닐 가능성은 드물었지만, 피 냄새와 더불어 낯익은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서걱― 서걱―
날카로운 도구로 살을 베어내는 것 같은 소리가 규칙적으로 세은의 귀를 울렸다.
물론 마물의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확신할 수는 없는 일.
천천히 이동할수록 세은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코로 더욱 강하게 짖쳐 들어오는 비릿한 혈향.
소리의 진원지에 도착한 세은이 조심스럽게 수풀 뒤에서 앞을 살펴보았다.
‘음?’
상황을 파악한 세은이 놀라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거대한 낫을 팔 대신 달고 있는 마물이 익숙한 체형의 시체를 해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은 아닌데…….’
그러나 마물이 열심히 해체해서 섭취하고 있는 시체는 사람의 그것은 아니었다.
‘멘티스…….’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시체를 열심히 먹고 있는 마물은 멘티스였는데, 그 이름처럼 흡사 사마귀의 그것과 비슷한 팔과 날개를 가지고 있는 마물이었다.
툭 튀어나온 눈과 비대한 몸은, 그 징그러운 모습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생긴 것과는 다르게 비행이 가능하고, 낫처럼 달린 양팔이 상당히 위협적인 마물.
공중전이 힘든 세은으로서는 상대하기 힘든 마물이었다.
‘지금 잡으려면…… 카운터밖에 없을 텐데…….’
세은은 잠시 고민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는 아무리 봐도 마물의 시체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마계 주민들의 거주지가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저 시체가 숲에서 생업을 종사하는 직업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던 상태.
그러나 아무런 단서 없이 숲을 헤매는 것보다 나았다.
‘끄응…….’
세은이 고민에 빠지는 동안 멘티스는 더욱 가열 차게 시체를 섭취하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뼈를 씹어내던 소름끼치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세은은 그 역겨운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며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마계 주민들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얼마 전에 케인에게 마법을 받았으니 소통에 문제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과연 마계 주민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
적어도 신성력을 가진 세은을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왕한테 데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마왕들이 직접적인 통치 행위는 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그의 권역 아래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서로 아무런 종속 관계도 아니었지만, 세은이 위협이라고 생각되면 마왕에게 보고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가 이런저런 걱정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멀리서 또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끼이―?
멘티스도 무엇인가 발견했는지,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은 전혀 조심성 없이 이곳으로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세은은 더욱 몸을 수풀 사이에 깊숙이 숨겼다.
타다닥―
전혀 조심성 없이 질주하는 두 명의 인형이 반대쪽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크카멜!”
“으으으!”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인형은 처참하게 분해되어 있는 시체를 보며 경악했다.
‘드워프…… 맞나?’
문헌에서나 보던 작은 키에, 넓은 어깨.
그리고 배꼽 아래까지 길게 기른 수염까지.
산산이 해체되어 그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던 시체와는 달리, 지금 새로 나타난 두 명의 인형은 문헌으로 보고 듣던 드워프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했다.
두 명의 드워프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소리쳤다.
“더러운 마물 새끼!”
“크흑. 같이 들어가자니까.”
끼익?
한 명은 멘티스를 보며 분노에 찬 표정을.
다른 한 명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멘티스는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먹잇감에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개를 기울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먹잇감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파악―!
“라크밀! 조심해!”
그러나 이내 날개를 펼친 멘티스의 모습에 분노에 찬 표정을 짓고 있던 인형이 소리쳤다.
끼이!
멘티스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빨갛게 물든 양팔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오늘은 축제가 분명하다!
저절로 굴러 들어온 새로운 먹이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 먹기 힘든 드워프가 이렇게 많다니.
날개를 펼친 멘티스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또 한 번 토해냈다.
끼이이―!
이 정도면 며칠 정도는 사냥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밀크. 어, 어쩌지?”
라크밀이라고 불린 드워프가 동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료가 위험에 빠진 흔적을 발견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급하게 달려오기는 했지만, 막상 멘티스가 앞에 있으니 오금이 졸아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거기에 세 명이면 모를까 두 명이서 멘티스를 상대하기는 조금 어려웠다.
“뭐, 어떻게? 도망갈 수도 없고 잡아야지.”
“으…….”
카밀크라 불린 드워프가 담담하게 양손에 도끼를 꺼내들며 대답했다.
라크밀과는 다른 당당한 태도.
그러나 긴장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듯이 그의 목울대에서는 쉴 새 없이 마른 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끼이!
“온다! 조심해!”
멘티스가 또다시 한 번의 울음과 함께 날개를 퍼덕여 드워프들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그 모습에 드워프 둘이 양쪽으로 몸을 굴려 멘티스의 공격을 피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