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42. 마계(3)
“죽겠군.”
세은은 처참하게 죽은 다이어 베어의 옆에 주저앉았다.
너무 긴장을 했더니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거기에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무리를 했더니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
그러나 여기서 오래 쉴 수는 없었다.
다이어 베어 정도면 이 구역의 패자가 될 만했다.
아마도 주변 영역의 마물들이 다이어 베어의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올 것이 당연한 일.
다른 마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몸을 피해야만 했다.
“어디 보자…….”
그렇다고 아무 대책 없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탁― 탁!
세은은 우선 주위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 두 개를 집어 서로 맞부딪쳤다.
돌들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더 약한 돌이 작은 불꽃과 함께 돌가루가 튀며 날카롭게 변했다.
“이 정도면 되나?”
그렇게 몇 번을 더 돌을 세공하자 날카로운 돌이 만들어졌다.
세은은 다이어 베어의 커다란 체구를 돌려 가장 부드러운 부위인 배를 하늘로 향하게 했다.
콱― 찌이익―
그리고 있는 힘껏 세공한 돌을 박아 다이어 베어의 가죽을 가르기 시작했다.
“흐읍!”
워낙 단단한 다이어 베어의 가죽은 쉽게 잘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은은 같은 부위를 계속해서 긁어내는 방법으로 결국 다이어 베어의 배를 가르는 데 성공했다.
“크으…… 냄새 한 번 죽이네.”
세은이 꽂은 나무막대로 인해 헤집어진 다이어 베어의 내장과, 안에 품고 있던 배설물이 뒤섞여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흘러나왔다.
세은은 나무막대로 안을 휘저어 마정석을 찾아냈다.
“혹시 또 모르니까 이건 가져가야지.”
당장 사용하기에는 무리지만, 마정석은 여러모로 쓸 일이 많았다.
특히 위급상황에서 마물들의 시선을 끌어주는 미끼 역할을 충분히 하고 넘치는 것이 마정석이다.
마기를 품고 있는 마정석은 그 존재만으로 마물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엄지와 검지로 마정석을 집어든 세은이 바닥에 있는 낙엽과 나뭇잎으로 마정석을 대충 닦아내고 주머니에 넣었다.
“후우. 정신이 없어서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마계일 줄이야.”
처음에 마계에 떨어졌을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다이어 베어를 상대하고 나니 이곳이 마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 된 상황.
“대체 어떻게 마계로 오게 된 거지?”
세은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마지막에 힘이 모자라 바싸고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는 암전.
의식을 잃은 탓에 그 뒤의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오직 눈을 뜨니까 마계에 도착해 있다는 사실 하나뿐.
“……어찌 됐건 일단 몸부터 회복해야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봐서는 언제 회복될지도 불투명한 상태.
근육은 쉽게 회복이 된다지만, 폭주로 인해 신성력을 모으는 그릇이 깨진 것은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 상태였다.
물탱크에 담긴 물을 수도로 꺼낸 것이 아니라 탱크를 깨서 한 번에 쏟은 것과 마찬가지.
깨진 탱크를 수리하기 전에는 적은 양의 물밖에 담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번도 지금 같은 경우가 없었기에, 차분히 자신의 몸 상태를 관조할 장소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일단 이동.
세은은 일단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세은이 마계의 지형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우선은 다이어 베어의 시신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이 중요했다.
이 근처에 다이어 베어 말고 또 어떤 마물들이 서식하고 있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
다행인 것은 세은이 예전에 마계를 와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는 이렇게 아무 대책 없이 혼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교단의 인원들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왔던 예전하고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예 초행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적어도 마계의 숲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세은이 알고 있는 마계는, 적어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끔찍한 환경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동물도 살고, 식물도 살며 과일도 열렸다.
날씨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마기로 인해 동물들이 상당히 흉포하거나 마물화가 되고, 식물이나 나무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마물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보통 무리 생활을 하는 종류가 많았다.
‘일단은 물을 찾아야겠어.’
음식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물.
마계의 물은 역시나 마기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선은 마시고, 나중에 신성력이 회복되면 천천히 몸에 흡수된 마기를 정화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방금 전의 다이어 베어처럼 천천히 마물화가 진행되어 마물이 되어버리니까.
그렇다고 마기가 무서워서 물을 마시지는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척.
방향을 정해 열심히 걷던 세은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전방을 살펴보았다.
워낙 나무들이 커서 앞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단체로 움직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상당히 거리가 있는데다가, 숲의 지형적 특성상 커다란 것이 하나가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작은 무리가 뭉쳐서 움직이는 것인지 정확한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어찌 됐건 조심해야 하는 상황.
세은은 긴장을 끌어올리며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낙엽 밟는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최대한 조용히 거리를 좁혀 나갔다.
끼이잉― 끼잉!
“후. 사슴이네.”
세은의 시야에 들어온 것들은 한 무리의 사슴들이었다.
물론, 마계에 사는 사슴들이니 일반 사슴보다 흉포하고 덩치가 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다른 위험한 마물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세은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럼 근처에 물이 있다는 얘기인데?’
비록 흉포하다지만, 원래가 초식동물인 사슴이다.
당연히 일반 동물처럼 물을 섭취해야만 했다.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움직여야겠어.’
세은은 사슴 무리가 이동할 때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물은 필요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장소에서 혼자서 물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사슴들은 물을 먹으로 꼭 한 번은 갈 테니까.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몸을 치료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좋아, 그럼…….’
털썩―
세은이 근처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 세은을 보고 경계를 하던 사슴들은, 세은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으니 신경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바닥으로 박고 풀을 뜯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지금은 식사를 하고 있던 모양.
밥을 다 먹고 사슴 무리가 움직일 때 따라서 움직이면 됐다.
괜히 언제 움직일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전까지 서서 기다릴 필요는 하등 없었다.
“휴우…….”
천적이 나타나면 사슴들이 먼저 반응할 테니 조금은 긴장을 풀 수도 있었다.
가시처럼 잔뜩 곤두서 있던 세은은 긴장을 풀고 다시 몸의 회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웅―
세은이 집중하는 것과 동시에, 또 다시 성물이 낮게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성물은 얼마 되지 않은 신성력을 인도하며 세은의 몸을 휘돌았다.
세은은 눈을 감고 신성력이 몸 곳곳을 돌아다는 것을 지켜봤다.
부스럭―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슴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세은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마친 사슴들은 느긋하게 삼삼오오 모여 이동을 시작했다.
세은은 그런 사슴들을 자극하지 않게 조심하며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왕이면 지금 바로 물을 마시러 가면 좋겠는데.’
사슴무리를 쫓아가며 세은이 생각했다.
여기가 마계라면 어떻게든 빨리 방법을 찾아서 지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마지막에 바싸고가 역소환 되지 않았던 건 확실히 기억이 나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없으면 바싸고를 막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
그나마 헤이런이 있어서 아예 대응도 하지 못하고 당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얼른 돌아가서 끝을 내야만 했다.
이번에도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함정을 파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더 시간이 지나서 기상천외한 방법을 생각해 내기 전에 잡아서 끝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이 냄새는?’
다행히 사슴들은 물을 마시러 이동한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고민하는 세은의 코에 비릿한 물 향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거진 수풀 사이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걸로 물은 구했고…….”
어제부터 한 모금도 물을 마시지 못한데다가, 다이어 베어와의 사투 때문에 상당한 갈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세은은 사슴들이 먼저 물가에 도달할 때까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물가로 오는 먹잇감을 노리는 동물들이 많다는 건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슴들이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끼잉― 끼이이잉―
사슴들은 물가에서 서로 울음소리를 주고받으며 물을 마셨다.
그 모습에 안전을 확신한 세은이 천천히 물가로 나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크으. 시원하다.”
가뭄에 단비가 오듯이 물을 마시자 갈증이 해갈되며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거부터 씻어야겠네.”
세은은 주머니에서 챙겨온 다이어 베어의 마정석을 꺼내 물에 씻기 시작했다.
피와 내장이 달라붙어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악취도 악취지만, 이대로는 후각이 예민한 다른 마물들에게 포착되기 좋은 상태였다.
마정석을 씻은 세은이 아예 옷을 벗어 빨래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붙어 있던 다이어 베어의 피와 뇌수가 신경 쓰였다.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청결에 신경을 써야 했다.
물에 빨면 냄새도 지울 수 있어서 일석이조.
간단하게 옷을 빨아서 바위 위에 넓게 펼쳐놓은 세은은, 이참에 자신도 냇가에 들어가 몸을 씻어냈다.
“으으. 은근히 차가운데?”
신성력이 풍부했다면 느껴지지 않았을 추위가 조금이지만 느껴졌다.
냉기가 느껴지니 다시 한 번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것을 깨닫게 된다.
“푸우…….”
어느 정도 몸을 씻어낸 세은이 밖으로 나와 바위 위에 누웠다.
좀 떨어진 옆에서는 여전히 사슴들이 신선놀음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사슴들을 따라다닐 필요는 없지만, 이곳에서는 훌륭한 경보기가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사슴들에게서 신경을 놓지 않으며, 세은이 누운 자세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꼬르륵―
“배도 좀 고프네…….”
갈증을 해갈하자 이제는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도 시간이지만, 당장은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었다.
옆에 있는 사슴들은 물론 훌륭한 식량이지만, 몸을 지킬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 냄새를 풍기는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는 일.
세은은 우선 주변에 잠을 잘 만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내일 아침부터다.
더 해가 지기 전에 잠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물론 마계의 밤은 다른 곳과 달라서 두 개의 달이 빛났다.
그래서 밤에도 시야를 확보하는 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밤은 밤.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자리를 잡는 것이 더 편하고 안전했다.
물가 근처는 다른 포식자들도 물을 마시러 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서 잠자리를 탐색했다.
그러나 어제와 같이 마땅한 구멍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하나…….”
아무래도 냄새도 막아주고, 땅 속이 더 아늑하기는 하지만 장소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가 없었다.
세은은 우선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