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42. 마계(1)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갑자기 새카만 구멍이 열렸다.
그리 잠시 후.
새카만 구멍에서 세은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털썩.
다행히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진 세은은, 큰 충격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의식이 없는 상태인지 떨어진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꽈릉― 꽈르릉―
쏴아아―
이내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세은의 위로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툭― 투둑―
그렇게 얼마나 차가운 장대비를 맞고 있었을까.
깊이 가라앉아 있던 세은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오듯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푸, 어푸…….”
정신을 차린 세은이 물에 빠진 것 같은 사람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혀 있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푸하아…….”
물이 차올라 막혀 있던 호흡이 돌아오자, 세은은 긴 들숨을 마시며 산소를 공급했다.
“크으으…….”
몸을 일으키려던 세은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질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결국 세은은 바닥에 누운 상태로 비를 맞으며 누워 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살아는 있나 보네.”
이 정도로 아픈 걸 보니 적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다음으로는 폭주시켰던 신성력을 점검했다.
최후의 방법을 사용한 만큼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 끝을 모르고 가득 차 있던 신성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메말라 있었다.
이래서는 견습 사제만도 못한 상황.
더 심한 것은 이미 망가진 신체가 신성력을 전혀 회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신성력이 모이지 않으니 몸을 회복할 만한 신성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신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고 해도, 그릇이 멀쩡해야 힘도 담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릇이 망가진 이상 그릇을 고치기 전에는 힘을 담을 수가 없었다.
웅―
그나마 모여 있는 신성력을 이용해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신성력으로는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우우웅―
세은의 목에 걸린 성물이 주인의 의지에 따라 신성력을 증폭시키고 있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후우우…….”
그러나 어느 정도 고통을 가시게 만들 수는 있었다.
긴급 처방을 끝낸 세은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먹구름이 끼어 있음에도 여전히 붉게 빛나는 하늘.
어딘가 익숙한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숲.
결정적으로, 방금 전까지는 고통으로 인해 느끼지 못했던 진하고 순수한 마기.
“마계잖아……?”
바로 마계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세은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숲 한가운데서 비를 맞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일단 아픈 몸을 이끌고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 아래로 몸을 이동했다.
“마계? 여기가 확실히 마계가 맞는 건가?”
세은은 나무에 몸을 기대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식물들이 세은이 알고 있던 마계의 식물들과 똑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공기 중에 마기가 너무 강해.”
거기에 이 정도 농도의 마기는 마계가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만약 지구가 마계화가 된다면 모를까.
“아! 바싸고는?”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마지막에 승부를 보지 못했던 바싸고가 떠올랐다.
“마르바스는 소멸까지는 아니었나 보네.”
일단 여기가 어디든지, 사후 세계가 아닌 이상 맹약을 어기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혹시나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여기가 바싸고에 의해 테라포밍 된 유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까지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말이 되지 않는 일.
거기에 머리카락과 수염도 자라지 않은 그대로인 상태였다.
“결국 여기가 마계가 맞다는 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계로 이동된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처럼 나를 다시 부른 건가? 아니야, 그럴 거면 마계로 부르지는 않았겠지.”
어찌 되었건 지금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당장은 몸을 추스를 장소가 필요했다.
마계의 숲은 다른 곳과는 달리 마물들이 활동하는 위험 지역이니까 말이다.
지금 세은의 엉망인 몸 상태로는 하급 마물을 상대하기도 벅찰 것이 분명했다.
잘못하다가는 마계에서 급사할 위기.
다행히 비가 내려서 사람 특유의 냄새는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 몸을 숨길 은신처를 찾아야만 했다.
차가운 비를 맞을 때마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비가 그치기 전에 은신처를 마려내야만 했다.
비가 소리와 냄새, 발자국을 지워줄 지금이 적기였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이끌며 세은은 커다란 나무 사이사이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어차피 나무 위에서는 편하게 지낼 수도 없고, 올라갈 힘도 없었다.
커다란 나무 밑둥치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구덩이가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곳을 찾아서 조금 더 손을 보고, 입구를 위장하면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끄응…….”
그러나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탁― 탁―
세은은 바닥에서 적당한 길이의 막대기를 하나 집어 지팡이 겸 탐지 목적으로 사용했다.
어차피 나무의 밑둥치는 자연적으로 쌓인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인해 가려져 있을 확률이 더 높았다.
눈으로 봤을 때 보이는 장소는 찾기에는 좋아도, 은신하기에는 감점 요소가 너무 많았다.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을 돌아다니며, 세은은 막대기로 밑둥치를 구석구석 찌르고 다녔다.
푸욱―
“으악?”
꽤 많은 나무를 찔렀지만 조건에 맞는 장소를 찾을 수 없어 지쳐갈 때쯤, 막대기가 허공을 찔렀다.
헛손질에 세은이 몸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굴렀다.
“끄으응!”
가뜩이나 단 한 군데도 성치 않은 몸으로 굴렀으니 신음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덕분에 적당한 장소를 발견한 세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수풀과 낙엽들로 잘 가려져 있던 밑둥치로 굴러 들어간 것이다.
“어찌 됐건 찾긴 찾았네…….”
비명을 지르는 몸을 추스르며 세은은 방금 발견한 구멍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세은 하나 정도는 들어가서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장소였다.
조금만 더 옆의 흙을 파내면 다리도 뻗을 수 있을 만한 크기.
들고 있던 막대기를 옆에 꽂아두고 세은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비를 잔뜩 머금어서 무게는 올라갔지만, 오히려 한 번에 파내기에는 더욱 용이했다.
“좋아…… 넓이는 이 정도면 된 거 같고.”
세은은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는 습기를 막기 위해 바닥에 마른 낙엽을 깔아줘야 하지만, 이렇게 장대비가 떨어지는 와중에 마른 낙엽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히려 세은이 땅을 파내느라 바닥이 덜 축축하게 느껴질 지경.
구멍 위에는 무성하게 피어난 나뭇잎들이 천연 우산이 되어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최대한 마른 낙엽들을 모아야겠네…….”
나무가 커다란 만큼, 나무 주변에는 물을 덜 먹은 낙엽들도 꽤 있었다.
세은은 우선 낙엽들을 덮을 수 있게 나뭇가지를 구해서 구멍 안에 집어넣었다.
충분한 양을 모았다고 생각되자, 그다음에는 가장 덜 습기를 먹은 나뭇잎을 모아 구멍으로 옮겼다.
몸이 성치 않다보니 일을 하나하나 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툭― 투둑―
그러다 보니 끝을 모르고 쏟아지던 비도 어느새 그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후. 조금 서둘러야겠어.”
비가 그치면 마물들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그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안으로 은신해야만 했다.
탁― 탁!
세은은 일단 몸을 구멍 안에 뉘였다.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대충 뚜껑을 만들었다.
낙엽을 올릴 수 있게 가운데는 비어두었는데, 그 구멍을 통해 낙엽을 위로 올려 구멍을 가리기 시작했다.
“휴우…….”
그리고 가운데 있는 남은 구멍은 미리 구해놨던 커다란 나뭇잎을 이용해서 막았다.
이 모든 작업이 끝나자 비가 완전히 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까지 그치자 구덩이 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으로 가득 찼다.
입구를 덮어 놓은 낙엽 사이로 아주 조금씩 새어 들어온 빛이 완전히 먹구름이 개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우웅―
안전하게 몸을 숨겼다는 확신이 서자마자, 세은은 신성력을 운용해 몸을 치료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심한 부상을 입어 제대로 몸 상태가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끄응…….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적이기는 한데…….”
최소 폐인이 될 각오로 신성력을 폭주시켰지만, 마지막에 바싸고를 처리하지 못했다.
거기에 마계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상 어떻게든 망가진 몸을 회복해야만 했다.
“후…… 일단 쉬어야겠어.”
세은은 무리하게 신성력을 운용하지 않고 치료를 멈췄다.
괜히 무리하다가 몸이 신성력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일.
대신 은신처를 구하느라 지친 몸을 쉬게 하기 위해 그대로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킁킁―
“……”
크응―! 킁!
“……?”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세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킁―!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려던 세은은 바로 옆에서 낯선 숨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작은 신음소리도 내서는 안 되는 상황.
밖을 볼 수 없는 세은은 대신 귀를 기울여 청각에 집중했다.
“크르르르…….”
아니나 다를까.
은신처 근처에서 마물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사람의 냄새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근처에서 풍기는 세은의 냄새를 맡고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놈이지?’
어떤 마물인지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만약에 조금이라도 낙엽을 움직이다가 들키는 순간 세은으로서는 반항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참고 세은은 바깥 상황에 청각을 더욱 집중했다.
우우웅―
그리고 동시에 또다시 신성력을 움직여 몸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푹 자고 일어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성물의 도움을 받아 신성력이 더욱 활발하게 움직여 갔다.
‘후우우우우…….’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의 채 5푼도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근육의 손상은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내상이 심해 신성력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았다.
깨진 그릇에서 쉬지 않고 물이 새나가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근육의 손상을 치료한 것만으로도 움직이는 데 느껴지는 불편함을 모두 해소할 수가 있었다.
크응― 킁!
바스락. 바스락.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해서 들리던 소리.
마물의 숨소리와 마물에게 밟혀 부셔지는 나무 부스러기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 와중에도 마물은 계속해서 세은의 주변을 돌고 있었다.
분명히 냄새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모양.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변을 돌고 있었다.
세은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입구를 바라보았다.
툭―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낙엽 몇 장을 떼어내 밖을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