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39. 반격(9)
막스는 자신이 받은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위해 상부에서는 단순히 유럽을 위해 일을 한단 걸 알고 있던 각성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막스도 당연히 세은을 상대할 때 입었던 음침한 후드를 벗어버린 상태였다.
지금은 평소의 과묵하고 멀쩡한 상태를 하고 있었다.
바싸고가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서 세은이 탈출을 할 게 아주 높은 확률로 분명하다고 일렀지만, 거대한 협곡이 무너지는 장면을 직접 본 그로서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부하가 가져온 정보는 그런 막스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게이트에 말씀하신 인상착의를 가진 자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래?”
‘주군의 말씀은 틀리는 법이 없구나.’
막스는 새삼 바싸고의 통찰에 놀라며 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른 적들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흐음…….”
부하의 말에 막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이 정도로는 안에서 제대로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세은이 보이면 더 이상 무리하지 말고 바로 도망치라고 한 것이 막스였기 때문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비록 지금 부리는 부하에겐 마기가 전혀 없었지만, 멀리 사람이 지켜보고 있단 정도는 쉽게 들킬 것이 뻔하니까.
“그럼 그자의 행동은 어땠지? 차분했나? 아니면 불안정했나?”
“옷차림은 상당히 넝마였던데다가, 무엇인가를 급하게 찾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옷차림은 말고, 다급해 보이는 것이 확실한가?”
“먼 거리를 유지하라고 한 지침 때문에 자세하게 확인은 못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게이트에서 뛰어나왔습니다.”
“좋아. 수고했어.”
부하의 보고를 들은 막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급하게 나왔다는 건 안에서 무엇인가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 되기 때문.
아마도 바싸고가 계획한 대로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다만 정확한 확인이 불가한 게 아쉬운 점이다.
그래도 바싸고가 지시한 모든 임무를 정확히 이행했다는 사실이 막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 스스로 자신이 지시 받은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자평할 수 있을 정도.
만약 이 이상은 일이 잘못되어도 자신의 손을 벗어난 소관이었다.
막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부하에게 퇴각을 지시했다.
이제는 보고를 위해 바싸고를 만나러 돌아갈 시간이었다.
물러나는 막스의 발걸음이 처음과 달리 매우 가벼웠다.
* * *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세은은 게이트 밖으로 나와 그레모리의 흔적을 탐색했다.
다행히 밖으로 나오니 그레모리의 마기가 그의 감각에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어찌나 잘 숨겼는지 세은으로서도 감지하기 힘들 정도.
어찌어찌 느껴지던 마기를 따라 세은이 몸을 날렸다.
“그레모리!”
그리고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구석에서 몸을 숨긴 채 기계를 만지고 있던 그레모리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얼마나 교묘하게 숨었는지 마기를 느끼는 것이 아니었으면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장소.
“여어.”
자신을 부르는 세은을 발견한 그레모리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부하들 있더라.”
“알아. 그래서 온 거야.”
“나를? 왜? 마기는 잘 지우고 왔을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걔들 돌아가야 하는데 출구가 안 보인다는데. 출구가 다른 곳에 생길 수도 있나?”
“아니.”
세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레모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너무 단호한 대답에 세은이 다시 물었다.
“뭐라고?”
“없다고.”
“그러니까, 출구가 다른 곳에 없다고?”
“아! 짜증나게 하네 진짜. 출구가 없으면 사라진 거야. 다른 곳에 출구가 왜 있어.”
“그럼 애들은 어떻게 해?”
“여기서 사는 거지 뭐. 아니면 나처럼 역소환 돼서 돌아가든가.”
“무슨 미친 소리야 그게. 걔들이 죽으면 그냥 죽는 거지 무슨 역소환이야?”
“아, 미안. 착각했네. 다들 가능한 줄 알고.”
그레모리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교단에 대한 그레모리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으니 당연한 행동.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세은으로서는 짜증이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왜 없어. 통로라며?”
“아, 내가 전에도 말했지? 그런 방법이 있으면 내가 벌써 마계로 돌아가서 가져오고 싶은 것들 가져왔다고. 내 말은 아주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만.”
“아니, 지랄 말고. 정말이야?”
“아! 정말이라고! 전에도 말했잖아 병신아! 되묻는다고 안 되는 게 되는 줄 알아? 어떻게 이렇게 머저리 같은 새끼한테 졌는지 시발.”
그레모리가 짜증과 분노를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도대체 안 된다는 것에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지.
그레모리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교단이 지구에 남게 되면 누구보다 피해를 보는 건 그레모리 자신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교단 놈들은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한마디로 교단을 피해서 지내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
즉, 지금처럼 편안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지낼 수 없다는 말이었다.
괜히 세은 근처의 사람들에게 평소처럼 기계나 돈을 얻으려고 만났다가 잔존 마기라도 남아 있으면 교단이 난리를 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짜증이 치밀어 오른 그레모리와 달리, 세은은 돌아갈 길이 없다는 말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돌아갈 방법이 없다고?’
그럼 세은이 에일린에 의해 이계로 넘어가서 평생을 지냈던 것처럼, 교단의 사람들도 지구에서 평생을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사람이 많은 것만 해도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과연 적응할 수가 있을까?’
오러와 마법이야 지금 생겼으니 차치하고서라도, 단순히 정치 체재나 문화에 대한 차이가 너무나도 심했다.
특히 언어를 익히는 것부터 문제였다.
자신이야 넘어가면서 여신의 도움을 받았지만, 교단의 사람들은 그런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결국 세은은 그레모리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방법이 없어?”
“아! 없다고!”
“바로 대답하지 말고 생각 좀 하고 대답해라. 아예 방법이 없는 거야 정말?”
“아오…….”
세은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레모리가 대답했다.
“뭐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그게 뭔데?”
처음으로 나온 긍정적인 대답에 세은이 말했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왜 없다고 했어? 지금 시위하는 거야?”
“닥쳐 미친놈아. 아예 방법이 없냐고 해서 말하는 거니까.”
그레모리는 다시 한 번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차원을 비틀 정도로 거대한 에너지가 있으면 가능하지.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아냐?”
“대충 얼마나 필요한데?”
“대충 마왕 다섯 명 정도?”
“끄응…….”
이번에는 세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말이 마왕 다섯 명이지.
단순히 마력의 총량을 더한 것이라면 다섯 명의 마력양은 어마어마했다.
전투에서는 다섯 명이 합친다고 다섯 배의 힘을 내는 것이 아니었지만, 단순한 계산으로는 달랐다.
세은으로서도 그 정도 힘을 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까 없다고 하는 거야. 어디서 이 정도 에너지를 구할 건데?”
그레모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세은의 염장을 긁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세은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그것보다 교단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돌려보낼 수 없다면 같이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눈앞의 그레모리도 문제였다.
피의 맹약을 맺고 도움을 주고받는 입장이라지만, 융통성 없는 교단의 인물들이 이걸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레모리가 중간중간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따로 떨어트려 놓을 수도 없는 일.
거기에 맹약이 끝나면 바로 역소환 시킬 생각도 하고 있어서 주변에서 멀리 보내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하여튼, 그것들 어떻게 좀 해봐. 얼마나 불편한 줄 알아? 으. 힘만 완벽했으면 상대도 아닌 놈들인데 짜증나네.”
“알았으니까 여기에 있어. 상황 좀 해결하고 올 테니까.”
“그래 빨리 꺼져. 나도 마지막으로 편하게 자유 시간 좀 가지게.”
빈정 상한 그레모리의 욕설을 뒤로 하고, 세은은 다시 게이트 안으로 향했다.
* * *
“폐하께서 분부하신 명을 모두 완수했습니다.”
“호오. 그래?”
“예!”
막스가 자신감 있게 바싸고에게 자신이 수행한 임무를 보고했다.
바싸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수염 하나 없는 자신의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막스의 보고를 들었다.
“예상외로 잘했구나.”
“황공하옵니다.”
“뭐, 결과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도 내가 지시한 일. 수고했도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나머지는 다른 신하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라.”
바싸고는 막스의 공을 치하하며 그를 물렸다.
축객령을 내리는 손짓에, 막스가 조심스럽게 뒷걸음을 치며 밖으로 나갔다.
탁―
이내 문이 닫히고, 어둠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꿉놀이가 꽤 재밌나 보군.”
“뭐, 나름 재밌어.”
“자,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글쎄?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바싸고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어둠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 짙어졌다.
“장난치지 말고, 그런 대답을 들으려고 물어본 건 아니니까.”
“아아. 예민하기는.”
“단순히 네 목표에 동의해서 함께하는 것일 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나는 바로 떠나갈 것이다.”
“아, 조금만 기다려. 그래도 결과는 확인하고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 마르바스?”
“흥. 말은 번지르르하군. 적이 많은 이유를 알겠어.”
마르바스.
마계 서열 5위의 마왕이 바싸고의 대답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언제까지 이 좁은 곳에 숨어 있기도 지치는 참이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움직였으면 좋겠군.”
노랗다기보다 금색에 가까운 피부에,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머리부터 턱수염까지 북슬북슬하게 나 있던 수염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소년의 모습인 바싸고와 달리, 마르바스는 완연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로 이루어진 옷차림과, 양손과 목에 차고 있는 장신구가 잘 어울리던 복식.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집도 솜씨 있는 장인이 만든 게 분명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금방 마음껏 움직일 수 있게 해줄 테니 기다려. 시렌만 없으면 걸릴 것이 없으니까.”
“후. 고작 한 명 때문에 이렇게 협잡을 꾸며야 한다는 사실도 가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마르바스의 말에 바싸고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르바스도 지금의 몸 상태로 혼자서 세은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뭐,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멍청하게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말이야.”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마르바스. 역시 다른 멍청하고 덜 떨어지던 놈들하고는 다르게 말이 통하는군.”
“그런 입에 발린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으면 하는군.”
“하하. 정말로 조금만 기다려. 일단 이번 일을 확인하러 수하가 갔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우리 둘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나?”
바싸고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마르바스가 대답했다.
“……흥. 자존심 상하지만 온전치 않은 몸 상태라 반박을 할 수가 없군.”
“그러니 기다려.”
솔직한 마르바스의 대답에 바싸고가 입가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이렇게 협력하기로 한 거. 영악한 대어는 한 번에 잡아야 하지 않겠어? 하하하하!”
바싸고의 기대감에 찬 흥겨운 웃음소리가, 한동안 주변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