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39. 반격(4)
“기껏 불러놓고 이게 전부야?”
협곡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세은은 더 이상 아무런 장치가 발동되지 않자 비웃음을 담아 물었다.
협곡의 끝에는 정체를 모를 복면인 열 명이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복면인들에게서는 짙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범한 오러 유저나 마법사들에게는 충분히 두려운 상대겠지만, 세은을 상대로 너무나도 부족했다.
“겨우 이런 장난을 치려고 나를 불렀다는 말이지?”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세은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가만히 세은의 얘기를 듣고 있던 복면인 중 한 명이 뒤로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주군께서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 많으니 천천히 음미하며 즐기길.”
촤악―
사내의 손이 허공으로 곧게 뻗는 것과 동시에 마기가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촤악― 좍―
다른 복면인들도 처음 손을 뜬 복면인을 따라 같이 손을 들었다.
열 명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한 곳으로 뭉쳐서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뭉클뭉클.
바닥으로 스며든 마기가 열쇠였는지, 바닥에서 검붉은 운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응?”
빠르게 주변을 잠식하는 운무에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세은이 재빨리 신성력을 운용했다.
우웅―
“독?”
정화가 가능한 이상 독이 크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끊임없이 신성력을 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원래 독은 일정 이상의 실력자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독으로 공격을 받으니 오히려 생소함이 느껴졌다.
“겨우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흐흐. 성격도 급하시군. 조금만 기다려라.”
세은은 여전히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며 물었다.
협곡의 뒤는 막혀 있고, 복면인들은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 잡은 쥐라는 생각에 세은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꿍!
복면인들이 또다시 마기를 모아 마법진을 발동했다.
“응?”
이번에 발동된 마법진은 확실히 달랐다.
그동안 발동한 마법진과는 마기의 총량에서부터 궤를 달리했다.
치이잉―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마기로 이루어진 벽이 세은을 사방으로 둘렀다.
“이거 예전에도 한 번 당해봤던 기술인데?”
세은이 기억을 더듬으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단숨에 뚫기 힘든 단단함이 전해지는 마기의 벽.
분명히 예전에 마왕들을 상대할 때 겪어본 적이 있는 마법진이다.
그러나 워낙 많은 마왕들을 상대해 봤던 탓에 정확히 누구와 싸울 때 겪은 일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후우. 일단 이것부터 부수고 잡아서 물어봐야겠네.”
세은이 큰 보폭으로 앞으로 나섰다.
부수기 힘든 마법진임은 분명하지만, 단순히 그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 한 번 해보시지.”
앞으로 나서는 세은을 보며 복면인이 조소를 흘렸다.
꿍―!
그리고 또다시 발동하는 마법진.
이번에는 바닥이 마치 늪처럼 천천히 융해되기 시작했다.
바닥의 융해에 세은의 담담하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독도 문제가 없고, 앞을 막은 마법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발을 디딜 곳이 사라지는 것은 문제가 된다.
적어도 한 번에 앞에 있는 마법진을 부술 만한 공격이면, 앞의 복면인들까지 휘말려서 한 번에 사라질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거 이런 걸 생각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흐흐. 겨우 이 정도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복면인이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더 남았지. 어디 한 번 선물을 잘 받아서 풀어봐.”
꾸웅!
또다시 복면인들이 마기를 모아 마법진을 발동한다.
그러나 아무리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고는 해도 벌써 네 개의 마법진을 발동 중이었다.
거기에 하나같이 애초에 그들의 능력을 벗어난 것들.
처음과 달리 마기의 양이 현격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마법진을 발동하기에는 충분한지 다음 마법진이 차질 없이 발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치이이이잉―
무엇인가가 강렬하게 긁히는 소리가 나며 마법진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후두둑―
“비?”
마법진이 발동되는 것과 동시에 세은의 머리 위에서 마기를 가득 머금은 비가 떨어졌다.
마기를 머금은 비는 마치 먹물처럼 새까만 색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역시 독이 섞여 있었다.
허공에 퍼진 독과 다른 종류인 독은 세은의 몸을 적시며 중독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후. 독보다 바닥이 문제군.”
그러나 역시 독보다는 다른 점이 문제였다.
방금 전까지는 단순히 마른 모래 늪이었던 바닥이, 독의 비를 머금으며 점점 질척하게 변해갔다.
처음보다 더 빠져나오기 힘들게 변하던 바닥에 세은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눅눅하고, 질척거리고. 이거 정말 짜증나는 건 다 만들어 놨네.”
당장이라도 천벌을 사용해서 마법진을 부셔도 된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복면인들까지 휘말리게 된다.
거기에 휘말리는 건 상관없다고 하더라도, 천벌을 사용하고 난 다음에는 신성력이 상당히 비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때 마왕이 나타난다면 세은으로서도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자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신성력이 부족하면 끊임없이 흡입하고 있는 독을 해독하는 것에 조금은 부담이 된다.
어찌 되었든 천벌을 사용하지 않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
세은은 일단 신성의 검을 만들어 손에 쥐었다.
“어디 한 번 얼마나 튼튼한지부터 볼까?”
구성과 생김새는 똑같다지만, 발동을 마왕이 한 것이 아니니 전에 겪은 것보다 더 약할 가능성도 있었다.
복면인들이 마기를 열쇠로 발동만 했다지만, 정말로 힘을 전부 회복했다면 이렇게 숨어 있을 이유도 없었다.
세은은 더 이상 발이 빠지기 전에 앞으로 치고 나가 마법진을 검으로 내려쳤다.
텅― 터엉!
공기를 찢어발기는 충돌음이 허공을 가득 채웠다.
텅!
세은이 신성의 검을 휘두를수록 더욱더 공기가 고조되었다.
하지만 그 반탄력으로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세은의 몸은 발목까지 땅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다시 몸을 빼내서 검을 휘두르려고 하면 마법진은 어느새 회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는 끝이 안 나겠네.”
세은은 자신의 앞을 굳건히 막고 있던 마법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 *
까득― 까드득―
처음에는 뭉쿨뭉쿨하게 공간을 일그러트리던 게이트는, 이제는 마치 호두를 까는 소리를 내며 공간을 어긋 내고 있었다.
“이거 언제 끝나는 거예요?”
생각보다 길어지는 게이트의 생성에 채연이 그레모리에게 물었다.
그레모리가 슬쩍 게이트로 시선을 주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거의 끝났네.”
“이거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아니, 크기가 클수록 오래 걸려.”
“아. 그럼 이건 꽤 크다는 말이네요?”
“어.”
그레모리에게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들은 채연이 다급히 존에게로 다가갔다.
게이트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게 정설이니까.
역시나 채연의 말을 들은 존은 얼굴에 긴장을 그리며 주변에 더욱 단단히 당부를 전파했다.
“자, 아마도 생각보다 큰 게이트가 나올 것 같으니 긴장 풀지 말고 대기하도록. 거의 끝나간다고 한다.”
“예!”
생각보다 느린 게이트의 생성에, 긴장을 풀고 있던 일행들이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존의 지시를 들은 각성자들의 얼굴에 설핏 긴장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각성자가 몰려 있다고 해도 죽음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법이었다.
긴장은 곧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까득― 까드득―
각성자들이 자리를 잡는 동안, 허공에서 나던 소리가 더욱 격렬해졌다.
키이잉―
그리고 갑자기 환한 빛이 사방으로 터지며 무엇인가 열리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조, 조심해!”
심상치 않은 소리에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을 알아챈 존이 경호성을 발했다.
재빠른 존의 외침에 모두가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꾸오?”
빛이 사그라진 게이트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오우거였다.
마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온 오우거는, 자신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꾸어어어웍!”
그러나 이내 흉포한 외침을 발하며, 흉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었다.
“오우거다! 다들 대처법은 알 테니 특이 사항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자율 전투에 맡긴다.”
존의 말에 가장 앞에 있던 조가 오우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우거가 상위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모인 각성자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
오우거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각성자들의 맹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꾸어억!”
그러나 이내 하나의 오우거를 다 처리하기도 전에, 게이트에서 또 다른 오우거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대기하고 있던 다른 조가 새로 나온 오우거를 전담했다.
“이 게이트의 웨이브는 오우거가 주 구성인 듯하니 방심하지 말고 차분히 전투에 임하도록!”
“예!”
그 뒤로도 오우거가 몇 마리 더 튀어나왔지만, 차분한 각성자들의 대처로 하나둘씩 차가운 땅 위에 그 육중한 몸을 뉘였다.
“후우. 이제 끝인가?”
어느새 늘어났던 오우거들 때문에 전투에 참가했던 존이,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큰 부상자 없이 전투가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자잘한 부상자들은 에린의 신성 마법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치료되었다.
확실히 상처가 그 자리에서 바로 치료되는 이적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를 일으키게 하는 장면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이제 16살, 미국 나이로 15살인 에린의 나이를 생각하면 적어도 몇 십 년 동안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거기에 치료에만 전념하면 연령에 대한 제한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괜히 위에서 에린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라는 게 아니었다.
이제 성인으로 성장하는 단계이니만큼, 생각이 더 확고해지기 전 미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외모로 봐서는 나중에 홍보 모델로 써도 될 것 같기는 한데…….’
에린은 원래 미국인인 만큼 외모에 이질감도 없었다.
거기에 아직 앳된 티가 나지만, 성인이 되면 상당히 예쁠 게 분명한 외모였다.
성장이 빠른 서양인의 특성상 지금도 슬슬 어린 티를 거의 벗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면 16살이 아니라 18살까지는 봐줄 수도 있을 만한 외모.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얼굴에 아직 남아 있는 젖살이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일단 최대한 친해져 봐야겠어.’
존은 자신에게 부여된 또 다른 임무를 상기하며 다짐을 다졌다.
그리고는 일단 세은이 내린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주변의 정리를 시작했다.
“자! 오우거 시체 정리하고, 챙길 것 챙기고 게이트 안으로 진입한다.”
“바로 들어갑니까?”
“팀장은 먼저 들어가면 따라온다고 했으니 먼저 가서 진행하고 있지. 팀장에게 모두 맡길 순 없는 일 아닌가?”
일을 진행하는 만큼 아무런 직책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세은은 팀장의 직위를 받았다.
단순히 호칭 상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서 더 높은 직위를 가질 필요도 없었다.
굳이 더 높은 직위가 아니라도 세은에 대해서 모르는 각성자는 이제 없었으니까.
존은 오우거의 시체가 정리되자마자 잠깐의 휴식을 부여했다.
“자, 이제 10분 뒤에 진입한다.”
“예!”
‘그래도 이왕이면 들어가기 전에 와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치료가 가능한 에린도 있고, 팀원들의 수준을 봐서 게이트도 문제가 없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래도 세은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상당한 심리적 차이를 만들고 있었다.
존이 자신의 팔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