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39. 반격(3)
“야.”
잠시 게이트가 생성되는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세은이, 흥미를 잃고 구석에 있는 그레모리에게 다가갔다.
“아, 왜?”
그레모리는 세은을 바라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거 만들어지는 중에 주변이 위험하지는 않지?”
“어.”
또다시 이어지는 성의 없는 대답에 세은이 다시 물었다.
“그 위험의 기준이 네가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 기준으로.”
“아! 하나도 안 위험하다고!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 될 거 아냐?”
어쩐지 심하게 예민한 그레모리의 태도에 세은이 마주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아, 답답해서 그런다. 왜? 협조 좀 하면 구경 좀 제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하는 거라고는 일 뒤치다꺼리밖에 없는 거 아냐?”
“그러니까,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못해서 불만이다?”
“그래! 어차피 여기로 넘어온 마왕들 전부 알려줬으면 내 역할을 거기서 끝난 거 아니야? 대체 언제까지 부려먹으려고 하는 거야? 완전 악덕 상인도 아니고 말야.”
듣다 보니 그레모리가 예민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세은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무해한 척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마왕인 그레모리를 자유롭게 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딱히 피해를 끼치려는 게 아닌 것 같은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굳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놓아줄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세은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레모리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응?”
“어?”
그레모리와 세은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방향을 향했다.
잠깐이었지만, 방금 느낀 기운이 착각이 아니었단 사실을 서로의 반응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너도 느꼈지?”
“당연하지. 이건 뭐야? 어떤 미친놈이야?”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분명히 방금 전에 느껴진 건 마기가 확실했다.
거기에 이 정도로 선명하게 감지되었다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누가 봐도 대놓고 자신이 그 방향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꼴이었다.
한마디로, 누군가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유인당한단 걸 알려주는 행동.
이 근처에서 마기를 가진 놈이 유인할 만한 사람은 세은밖에 없으니 대상이 누구인지도 명확했다.
그 누구라도 그레모리가 있는 건 모를 일이 명약관화했다.
그러나 설사 그레모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부르기 위해 세은의 앞에서 마기를 뿌린다는 사실이 말이 되지 않았다.
“너무 대놓고 유인하는데?”
“어떤 병신 새끼인지 나도 얼굴이나 보고 싶다.”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맞장구를 쳤다.
그녀가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게이트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는 있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게 가능하면 나부터 벌써 왔다 갔다 했겠지. 얼마나 가져오고 싶은 게 많은지 알아?”
“그렇기는 한데…….”
세은이 어딘가 찜찜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한데? 여태까지 가만히 있다가, 새로운 게이트가 생성되는 이 시점에 맞춰서 나를 유인하다라…….”
“아는 게 없으니까 나한테는 더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게 없어.”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은 세은의 태도에 그레모리가 하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대답했다.
아무리 둘 사이가 그럴 수밖에 없는 관계라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의심을 받는 것 같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니, 의심해서가 아니라 이상해서 그런 거지. 맹약이 있는 동안은 크게 의심할 필요가 없잖아?”
“크게?”
애매한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뭐, 크게지. 그렇다고 내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대답해 주지는 않을 거잖아.”
“맞는 말인데 재수 없다. 꺼져 미친 새끼야.”
“가지 말라고 해도 갑니다.”
세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그레모리를 뒤로하고 존에게로 향했다.
존은 여전히 게이트가 생성되고 있던,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광경을 넋이 빠져라 구경하고 있었다.
“존.”
“…….”
“존!”
“아? 아! 네. 부르셨습니까?”
넋을 놓고 있던 존은, 세은이 강하게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기에, 세은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존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우리가 찾던 목표가 나를 유인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너무 대놓고 유인을 해서 찝찝하기는 해서 가봐야 할 것 같거든.”
“유인…… 입니까?”
“그래, 유인. 너무 대놓고 나를 불러서 말이야.”
“아, 그렇다는 건?”
“어차피 다 같이 가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 내가 다녀올 동안 여기서 게이트 발생 상황 주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정리하고 있어.”
“아! 알겠습니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존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세은의 말에 대답했다.
세은은 존에게 모든 지시를 내리고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려 마기를 느낀 방향으로 이동했다.
* * *
“계획대로입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사내, 헤더 막스에게 부하가 보고를 올렸다.
“게이트가 생성되는 것까지 확인했나?”
“물론입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게이트가 확인되자 적들이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마기도 적당히 흘렸겠지?”
“예!”
“좋아. 그럼 한 번 더 마기를 흘린다. 폐하께서 준비하신 이곳으로 유인해야 해.”
“예!”
막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는 또 다시 자신이 지닌 마기를 주변에 퍼트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세은은 분명히 마기를 감지하고 여기로 찾아올 게 분명했다.
그들의 주군에게 들은 세은이란 사람은 바로 그런 존재였으니까.
막스는 마기를 흘리는 부하를 보며 주군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어이.”
“예. 폐하!”
“그래 너, 이름이 뭐였지?”
“헤더 막스이옵니다.”
“그래. 너 마르키시오가 꽤 아끼는 놈인 것 같은데 말이야.”
갑작스럽게 주군, 바싸고의 부름을 받은 막스가 잔뜩 긴장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거 참. 난생 처음 인간들을 부리려니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죄, 죄송합니다.”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바싸고의 모습에 막스가 몸을 더욱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아아. 책망하려고 부른 것은 아니다. 인간밖에 없는 곳이니 인간을 부하로 부리는 게 맞겠지. 그래도 백성들이라고 부르려면 지능은 남아 있어야 할 테니까.”
“…….”
엄청난 말을 마치 일상적인 대화처럼 내뱉은 바싸고의 태도에 막스는 더욱 긴장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하여튼, 짐이 이번에 짐의 대적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는데 말이다.”
“예. 폐하.”
“사실 그 정도 함정으로는 그놈을 잡을 수가 없다는 건, 짐이 잘 알고 있는 터. 이번 함정은 단순히 대적과 그의 부하들을 떼놓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바싸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애완용 악어의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조만간 짐의 대적이 유럽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맞춰 게이트가 하나 생기겠지.”
“예. 폐하.”
“분명히 게이트가 열리면 먼저 게이트를 없앨 생각부터 할 것이다. 그놈은 그런 놈이니까. 하지만 게이트 안에서는 대적의 옛 부하들이 나올 터.”
“옛 부하라 하시면……?”
“알 필요가 없느니라.”
“죄, 죄송하옵니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던 막스는 바싸고의 반응에 식은땀을 질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싸고는 그런 막스의 상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대적이 없으면 말이 통하지 않으니 분명히 싸움이 일어날 터. 이 함정의 목표는 대적의 지금 부하들과 옛 부하들이 다투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느니라.”
바싸고는 악어를 쓰다듬던 손가락을 들어 막스를 가리켰다.
“조금 더 가까이 오너라.”
꿀꺽.
바싸고의 지시에 막스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전진했다.
“조금 더.”
“예, 옛!”
그리고 이내 막스와 바싸고의 거리는 2미터까지 줄어들었다.
“사실 함정은 버리는 패지만…… 짐의 수족이 슬퍼할 테니 어쩔 수 없지. 너는 함정이 성공적으로 발동하는 것만 확인하면 돌아와서 보고하도록 하라. 어차피 그 이상의 예지는 불가능해서 하나 정도 살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해가 되지 않는 바싸고의 말에, 막스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서 있었다.
치이이이잉―
그때 바싸고의 손가락 끝에서 뭉클거리는 마기가 울음을 토해내며 모이기 시작했다.
“컥?”
그리고 이내 어느 정도 응축된 마기가 막스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막스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지금의 실력으로는 다른 놈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 조금 도움을 주마.”
고통에 꿈틀거리는 막스의 위로 바싸고의 말이 이어졌다.
“가서 짐의 대적을 함정에 잘 빠트리고, 잘 빠져나와서 보고를 마치도록 하라.”
말을 마치는 바싸고의 머리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분명히 이쪽 방향이었는데?”
세은은 처음에 마기가 느껴졌던 지점에 도착했다.
유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자리에 오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마기가 너무 사방에 너저분하게 퍼져 있어서 추적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았다.
“응?”
그러나 그런 세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시의적절하게 저 멀리 방금 전과 같은 마기가 느껴졌다.
“제대로 유인을 해주겠다 이거지?”
더 멀어진 거리에, 세은이 순간 게이트에 두고 온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나름 연합의 정예들이었다.
케인 정도가 아니더라도, 그 아래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게이트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에린이 있어서 부상자도 걱정이 없었다.
만약 그들 모두를 몰살시킬 만한 능력을 지닌 자라면 세은이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으니 일단 걱정은 접어두어도 될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세은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또다시 마기가 느껴진 방향으로 이동했다.
몸을 날릴수록 숲이 울창해지는 게 느껴졌다.
“흐음…….”
누가 봐도 함정이 있을 만한 장소였다.
“이건 너무 대놓고 나를 불러들이는데?”
그리고 세은이 마기를 쫓아 마지막으로 도착한 장소는, 거대한 협곡이었다.
좁은 입구 양쪽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이 입구를 제한하고 있었다.
산은 경사가 아주 가파르고 바위로 이루어져, 타고 올라가기 힘들게 구성되어 있었다.
“들어가야 하나?”
함정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이렇게 대놓고 함정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으니 꺼림칙한 건 사실이었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
세은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다시 안에서 노골적으로 마기가 퍼져 나왔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던져주는데 돌아갈 수도 없고.”
마지막 하나 남은 마왕이 제 발로 단서를 던져준 셈이었다.
항상 유리한 위치에서만 싸울 수는 없는 일.
결국 세은은 눈앞에서 흔들거리던 미끼를 잡기로 마음을 먹었다.
타닥―
이곳까지 추적을 할 때와는 다르게, 세은은 천천히 평범하게 걸음을 걸어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는 세은의 감각에 협곡의 안쪽에서 계속 마기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세은이 정확한 방향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키이잉―
“역시.”
세은이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마기가 화려하게 폭발하며 협곡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마법진인가?”
이미 예상한 상황이기에 세은은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키잉―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마법진이 발동 되는 것이 느껴졌다.
벌써 두 개의 마법진.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가는 건 죽도 밥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세은은 발동된 마법진들의 수준을 살피고는 더욱 깊숙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