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38. 마왕 바딘(4)
어느새 바딘의 손에도 마기로 이루어진 창이 쥐어져 있었다.
바딘도 세은의 손에 무기가 들리자, 방금 전까지의 흥분은 어디로 사라졌냐는 듯 침착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세은과 바딘이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바딘도 당당히 마왕의 위를 차지하고 있는 강자.
비록 세은이 한 수 앞서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방심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방심에 대한 대가는 이미 비네에게 충분히 치른 터.
똑같은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화르륵―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로 탐색을 펼친 지 상당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화마가 지척까지 다가온 상황.
바딘의 얼굴에 조급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성의 화마가 더 퍼진다면 불리한 건 세은이 아니라 바딘 그 자신.
결국 바딘이 먼저 행동을 개시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히이잉!”
바딘의 애마가 주인의 뜻에 따라 기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에 맞서는 세은의 반응도 매우 기민했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파쇄할 기세로 들이치는 기마를 피해 세은의 몸이 옆으로 회피했다.
쾅―!
그러나 바딘은 세은을 지나치면서 창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세은의 방패와 바딘의 창이 부딪히며 굉음을 만들었다.
다각. 다각.
바딘의 기마가 다시 방향을 바꿔 세은을 향해 들이쳤다.
빠르게 다가오는 바딘의 기마에 세은의 머릿속에 고민이 스쳤다.
막아낼까. 아니면 또다시 피해야 하나.
그러나 이번에도 세은의 선택은 회피.
아무리 세은이라도 기마의 무게까지 가미된 마왕의 일격을 받아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 비록 말이지만, 마왕의 애마라는 것 자체가 평범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괜히 무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언제까지 겁쟁이처럼 피하기만 할 거냐!”
콰앙―!
또다시 바딘이 세은을 스쳐 지나가며 일격을 날렸다.
한껏 기고만장한 어조.
기마가 있는 이상 자신이 유리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방어에도 한계가 있는 법.
특히 둘과 같은 수준의 전투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크흐. 방금 전까지 기고만장하던 자세는 어디 가고 방어하기에 바쁘구나.”
바딘의 진득한 목소리가 또다시 세은을 자극했다.
그러나 세은은 묵묵히 방어에 치중했다.
여기서 도발에 넘어가 봤자 기마와 한 몸이 되어 달려들던 바딘을 힘으로 이기기에는 역부족.
참는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한 번에 들이쳐야 했다.
화마가 계속해서 그 몸집을 불리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승기가 세은에게 올 게 자명했다.
그 사실을 알던 바딘도 더욱 거세게 세은을 몰아붙였다.
쾅― 콰앙―!
바딘의 공격이 더욱 빠르고, 강해졌다.
방패를 위로 든 세은의 신형이 그의 공격 한 번에, 한 번씩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잠시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치고 나갈 것이 분명한 눈.
앙다문 입술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재롱은 다 부렸지?”
콰직.
계속 되는 공격에 바딘의 긴장이 조금 무뎌진 틈을 타 세은이 방패를 그대로 휘둘렀다.
방패에 얻어맞은 바딘의 애마의 몸에서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윽?”
순식간에 애마를 잃은 바딘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세은에게 당한 말은 바닥에 쓰러져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바딘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이제 내 차례군. 어디 능력이 되면 한 번 잘 막아봐.”
마치 바딘을 놀리듯이 말하는 경고성.
우우웅―
세은은 신성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며 바딘을 들이쳤다.
방금 전까지 마상에서의 유리함이 주던 압박감도, 기마가 쓰러진 지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쉐엑―
거리에서 유리함을 점하고 있는 바딘의 창이 먼저 휘둘러졌다.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던 창날은 경시할 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세은은 방패를 들어 자연스럽게 창날을 흘려보냈다.
터엉―
그러나 미처 완전히 흘리지 못한 공격.
마상이 아니라도, 바딘의 공격은 마왕이란 이름을 지니기에 손색이 없었다.
텅!
또다시 이어진 이격.
창이 가지는 거리상의 이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세은은 바딘의 공격을 막아내며 서서히 거리를 좁혀 나갔다.
“이익!”
좀처럼 뒤로 밀려나지 않는 세은의 신형에 바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우우웅―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다는 것을 느끼자, 세은의 신성력이 더욱 강렬하게 울음을 토했다.
터어엉!
힘차게 휘두른 방패가 바딘의 창을 멀리 튕겨냈다.
동시에 반대 손에 들고 있던 신성의 검이 공간을 잘라내며 바딘에게로 향했다.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공격에 바딘이 재빨리 창을 회수했다.
파아아아앙―
급하게 검을 막아선 바딘의 창에, 두 공격이 상쇄되어 마기와 신성력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크흑!”
그러나 대결은 세은의 우세.
급하게 내지른 창으로는 완전히 충격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공간을 뻗어나가는 세은의 검.
마기와 신성력의 소용돌이를 가르며 그의 검이 바딘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 공격을 막기 위해 방금 전의 대결로 고개를 숙였던 바딘의 창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역부족.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자세가 망가진 상태로는 세은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다시 손해를 본 바딘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창을 타고 흘러오는 신성력이 바딘의 육체를 침투했다.
“젠장!”
바딘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세은은 묵묵부답.
지금 그의 집중력을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쿵.
결국 바딘의 발이 바닥을 찍었다.
동시에 바닥에서 검은 마기를 타고 수많은 뱀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모두 지옥의 업화에서 서식하는 독사들.
세은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당장 신형을 정비할 동안 잠깐의 시간이라도 끌어줄 게 필요했다.
피식.
결국 바딘이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세은이 입가에 비웃음을 지었다.
“에일린. 홀리 노바.”
세은의 입에서 신성 마법이 영창이 된다.
순식간에 그의 몸에서 퍼져 나가던 신성의 원에 세은에게 달려들던 독사들의 태반이 사라졌다.
세은의 힘이 더 강한 만큼, 신성력과 서로 상극인 암흑 마법은 그 파쇄가 너무나도 쉬웠다.
터엉―
그러나 그사이에 균형을 되찾은 바딘의 창이 다시 짓이겨 들어왔다.
잠깐의 틈을 타 온 힘을 다한 일격이었다.
신성 마법을 발동하느라 생긴 약간의 빈틈을 파고 들어갔다.
콰아아앙!
세은이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바딘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무시무시한 굉음.
이번에는 반대로 세은의 신형이 흔들렸다.
대결에서 손해를 본 세은의 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시없을 기회.
바딘이 때를 놓치지 않고 세은을 몰아붙였다.
세은이 바딘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역시 경시할 수 없는 상대.
바딘의 창을 막는 세은의 몸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쏟아지는 공격에 세은의 표정이 다시 굳어갔다.
하지만 이대로 다시 흐름을 내줄 수 없는 일.
우우우우웅―
무리를 해서라도 신성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이제 그만 끝내자!”
방패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내고, 검을 휘둘러 앞으로 한 걸음 전진했다.
그 기세에 이번에는 바딘이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서는 바딘.
그러나 둘의 전투 동안 어느새 화마는 그 몸집을 더욱 크게 부풀려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
“젠장! 이 비겁한 개새끼!”
“글쎄 그게 네가 할 말인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스위스에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놈이 할 말이냐는 거야.”
승기를 잡았으니 정보를 캐낼 차례였다.
세은은 자연스럽게 바딘을 자극하며 질문을 던졌다.
“알아듣지 못할 말 하지 마라 에일린의 기둥서방 새끼야!”
‘그렇군.’
바딘의 대답을 들은 세은의 눈이 빛났다.
스위스의 일은 바딘이 한 것이 아니다.
심증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
세은은 태연하게 입을 열어 바딘의 말에 대답했다.
“모른 척 하는 건 알아줘야겠어. 부끄러운 건 아나 보지?”
“개소리!”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유럽에 있는 마왕은 다른 놈.
바딘은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마왕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으니 더 이상 시간을 지체 할 필요는 없다.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
세은은 말을 마치고 몸을 날렸다.
바딘이 잔뜩 긴장하며 세은의 공격을 막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콰직―
세은의 검이 자신을 막아선 바딘의 창을 그대로 부러트렸다.
마기로 이루어진 창이 부러지며 그대로 소멸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바딘의 두 눈에 망연자실함이 떠올랐다.
“자, 끝내자.”
세은의 검이 바딘을 겨눴다.
자신을 겨눈 세은의 검을 본 바딘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눈앞의 검과 등 뒤의 화마.
두 가지를 번갈아 보던 바딘이 순간 몸을 돌렸다.
타다다닥―
“엇?”
스스로 화마로 뛰어 들어가는 바딘의 뒷모습을 보며 세은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한 죽음과 도박.
그사이에서 바딘은 도박을 골랐다.
지금 세은에게 역소환이 된다면 회복에 또다시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재수가 없으면 소멸.
그레모리와 세은의 맹약을 모르는 바딘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후우. 귀찮게 하는군.”
잠시 한숨을 내쉰 세은이 바딘을 쫓아 화마로 뛰어 들어갔다.
자신의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불길.
주인인 세은에게 화를 끼치지는 않았다.
다만, 신성의 화염은 바딘이 도주한 길에 남아 있어야 할 마기까지 순식간에 정화했다.
‘찾을 수가 없네.’
세은이 일단 앞으로 달려 나가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화마가 마기를 빠르게 지우고 있어 추적이 힘들었다.
다만 무작정 앞으로 도망갔으리라는 추리는 할 수 있었다.
바딘으로서도 이 안에 오래 머무는 건 힘들었다.
그렇다면 최단거리인 직선으로 도망갔을 게 분명했다.
‘역시!’
그렇게 얼마를 더 달리자 앞에 바딘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세은이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바딘의 발걸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그러나 화마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있는 바딘의 속도는 세은이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을 정도.
푸욱―
“커어억…….”
결국 얼마 가지 못해 바딘의 등을 세은의 검이 관통했다.
방금 전까지의 일전이 무색하리만큼 허무한 결말.
화마를 이용한 작전이 결정적이었다.
다만, 바딘이 죽고 나서 결계가 사리진 이곳에 불이 더 번지는 일을 막아야 할 번거로움이 있었다.
“개…… 새끼…….”
“뭐 이 뱀새끼야. 내가 사정이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
원래 같으면 이대로 완전히 소멸시켰을 거였다.
세은은 검을 뽑아 바딘을 망설임 없이 역소환시켰다.
키이잉―
동시에 바딘의 힘으로 유지되던 결계가 사라졌다.
세은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불부터 꺼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