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35. 아프리카 정보전(3)
피어스는 손발이 단단하게 포박된 채로 감금되었다.
나미비아에 있던 각성자들 중 최상위권 실력자들이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밀착 감시했다.
세은이 마법사들에게 상대방의 마나를 구속하는 마법을 알려주었지만, 부족한 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 마법은 더 높은 경지에 있는 마법사가 하위 경지의 마법사들을 구속할 때 쓰는 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6써클인 피어스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가 없던 관계로 마법을 걸고도 피어스를 감시하는 데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대체 어쩔 셈이지?”
피어스가 자신을 감시하던 각성자들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굳이 포로와 말을 섞을 필요도 없고, 그런 행동을 취해서도 안 됐다.
괜한 오해를 받을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니까.
이렇게 되자 오히려 피어스가 더 답답한 노릇이었다.
자신에게 정보를 캐묻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단단하게 묶어서 가둬놓고 있을 뿐이었다.
잡힌 순간 가혹한 취조와 고초를 예상했던 피어스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어스의 가슴은 타들어갔다.
상대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전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뭔가 질문을 하거나 캐내려고 해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에 맞춰서 협상이라도 해볼 텐데.
그냥 잡아서 감금만 시켜두니 아무 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철저한 정보의 부재가 피어스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낼 만한가 보네”
“큭.”
세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곁엔 어느새 사노가 파견한 취조 전문가와 통역이 함께 하고 있었다.
세은을 본 피어스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안 될걸?”
“그건 지켜봐야지.”
“흥. 내게서 뭔가를 듣는 건 불가능할 거야.”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세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미국이랑 러시아가 아주 벼르고 있거든.”
많은 각성자가 당했지만, 그중에서도 러시아와 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러시아는 당장이라도 보복에 나서야 한단 입장이었지만, 세은의 의견에 따라 참고 있던 중이었다.
나중에 꼭 지금의 일을 되갚아줄 수 있게 도와준다는 세은의 약속이 인내심의 원천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급하게 나서서 일을 그르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궁금한 건 말이야. 기껏 숨어 있는 놈 찾아서 없애줬더니, 왜 뒤통수를 쳤는지가 궁금하거든.”
“흥.”
피어스가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세은이 그런 피어스를 비웃으며 방을 나섰다.
“뭐, 얘기 잘 해보라고.”
세은이 밖으로 나가자 안에는 미국에서 온 취조 전문가와 피어스, 그리고 경계를 하고 있는 각성자들만 남았다.
일단 위에서 시키니까 취조를 하기는 하지만, 일단 취조를 하기에 아주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상대는 각성자에다가, 취조를 위한 환경도 조성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이유로 투입된 것이었다.
어차피 주 목적은 아프리카에서 잡는 다른 잔챙이들을 취조하는 것이니까.
경계를 서던 각성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취조 전문가가 피어스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 * *
“자, 이제 잡은 놈을 어떻게 이용하냐가 가장 관건인데 말이야.”
“일단 유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글쎄……. 전에 브뤼셀에서 봤을 때는 적어도 지금 잡힌 놈보다 강한 놈 몇 없었는데.”
세은이 자신의 앞에 있던 요원에게 말했다.
유럽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마르키시오는 실제로 보지 못해서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상대했던 각성자들 중에서 피어스보다 강한 사람은 몇 없었다.
“웻지라고 했던가…… 하여튼 두세 명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편이야. 유럽에서 최상의 카드를 초반에 꺼내든 셈인데.”
“최상의 카드가 막혔으니 무리수를 던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아예 포기할 수도 있지만…….”
이미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유럽이 포기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큰 소득이 없는 거지?”
“예. 아무래도 방법이 한정되다 보니까…….”
“이미 예상했으니까. 그럼 그거 말고 정보망은 다시 복구한 건가?”
“예. 새로운 인원들로 기존의 정보망을 완전히 복구했습니다.”
“유럽도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하겠군.”
“필승의 카드가 실패했으니 적잖이 당황스러울 겁니다.”
“일단 유럽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최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예!”
“흠. 그리고 상황을 봐서는 일단 나미비아 정부가 유럽보다 우리에게 호의적인 건 확실하네.”
“맞습니다. 이번에 도가 발견한 집의 명의자를 추적하는 방법으로 세 군데의 비밀 거점을 더 발견할 때도 나미비아 정부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지.”
나미비아 정부가 유럽에 더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면, 은연중에 활동에 문제가 생길 것은 당연히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일이었다.
“일단은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평소대로 움직여, 저쪽에서 움직임을 보이면 그때 움직이지. 우리의 목표는 따로 있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 맞아, 그리고 말이야.”
세은은 대답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던 요원을 붙잡았다.
“유럽이 하던 짓을 내가 좀 하려고 하니까. 우리 측 요원들한테 내 얼굴 확실히 인식시키고, 내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봐.”
“아, 알겠습니다!”
일단 기다린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게 유럽의 견제를 막아내던 일은 간단하면서도 효율이 좋은 일이었다.
요원 입장에서도 세은이 그렇게 움직여 주면 정보원들의 활동에 커다란 이점이 생긴다.
오히려 세은이 하기 싫다고 해도 부탁하고 싶은 일이었다.
* * *
덜컥―
문이 열리며 마르키시오의 집무실에 보좌관이 급한 걸음으로 들어갔다.
마르키시오가 자신의 탁자에 산처럼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웻지의 입원, 피어스와 막스의 파견 업무로 많은 서류가 분담되지 못하고 마르키시오에게 집중된 상황이었다.
마르키시오는 항상 웃는 얼굴로 그 과중한 업무를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덕분에 마르키시오가 지시한 헤리자우의 일을 못마땅해 하던 사람들도, 유럽에 대한 마르키시오의 열정을 폄하하지는 않았다.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유럽을 위하는 마음은 인정한다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마르키시오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그의 지시라면 껌뻑 죽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사람을 끄는 묘한 마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느낌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나미비아로 파견된 피어스에게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보좌관이 급하게 마르키시오에게 보고를 했다.
마르키시오는 엄청난 소식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고개를 들어 보좌관에게 되물었다.
“다른 요원들한테도 확인했나?”
“예. 평소처럼 습격을 나갔다가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재 확인은?”
“현재 소재 파악에 주력하고 있으나 확인이 힘들다고 합니다.”
“흐음. 연락이 두절된 정확한 시간은?”
“일주일 전입니다.”
그 말에 마르키시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보고가 지금 올라왔다고?”
“아, 아닙니다.”
보좌관이 다급히 변명했다.
“원래 피어스가 사나흘 정도 연락이 없는 건 흔한 일이라 이틀은 여유를 잡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주일째에도 연락이 되지 않아 바로 탐문을 시작함과 동시에 보고를 올린 겁니다.”
“사나흘이나 연락이 두절이 됐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군.”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피어스를 다룰 사람이 있을 리가.”
마르키시오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 피어스가 연락이 두절되었다? 나미비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닙니다.”
“그럼 습격을 하다가 당했다는 얘기인데.”
피어스가 제멋대로인 부분은 있지만, 실력은 마르키시오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웻지가 쓰러진 지금, 마르키시오가 가장 믿을 수 있는 패 중에 하나였다.
“골치 아프군…… 웻지는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피어스는 임무 중에 실종이라…….”
마르키시오는 보고를 받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당장 한 손이 부족한 시국에 고급 인력들의 이탈이 심각했다.
임무 중에 실종되었단 사실은 거의 적에게 잡히거나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9할 이상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다른 각성자들을 더 파견해서 소재를 파악하라고 지시 할까요?”
“글쎄?”
마르키시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내려쳤다.
“피어스가 다른 곳에서 직무 유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습격을 하다가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각성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현장에 도움이 될까 모르겠군.”
피어스가 당했다면 막스와 마르키시오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를 보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한 번에 여러 명을 짝지어서 보내기에는 모든 부분에서 손이 부족했다.
마르키시오는 여전히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예상보다 빠른 상대의 행보에 머리가 복잡해지던 걸 느꼈다.
언젠가 피어스가 역부족을 느끼거나, 당할 것이란 걸 알았지만 시기를 맞추지 못했다.
보좌관은 마르키시오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그를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탁―
“일단, 이 일은 조금 더 생객해 보고 알려주지.”
생각을 끝낸 마르키시오가 보좌관에게 말했다.
“일단 당장 현장에 있는 인원들보고 흔적 지우고 숨어 있으라고 해. 피어스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어떤 수를 쓸지 모르는 일이니까.”
“예.”
보좌관은 그 말을 끝으로 마르키시오의 집무실을 나섰다.
자신의 집무실을 나서는 보좌관의 뒷모습을 보며, 마르키시오가 중얼거렸다.
“골치 아프게 됐어. 지금 다시 자리를 비우기는 힘든데.”
마르키시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깊은 짜증이 서린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절대로 타인에게는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었다.
당장도 그깟 쉬운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피어스를 고래고래 욕하고 싶었지만, 감정을 꾹 누르고 있던 터였다.
“벌써부터 잡히다니, 하여간 천박한 년.”
마음같아서는 피어스를 어디에 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의 말을 따르고 있는 동안은 아주 유용한 패였다.
수족이 되어줄 다른 각성자들의 실력 향상이 될 때까지 그 간격을 메워 줄 패로는 아주 적절했다.
어중간한 놈들로는 미중러를 적절히 견제하면서 도발까지 하기는 힘들었으니까.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잘못 움직이다가 계획이라도 망치게 된다면 얼굴을 들 낯이라고는 남지 않을 터.
아니, 낯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마르키시오의 주인은, 겉으론 매우 온화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수가 있었다.
정말로 온화한 사람이라면 이런 계획을 짜지도 않을 것이고, 마르키시오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당장 자리를 비워 문제가 생긴 것을 알릴 수가 없으니,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평소 같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움직이겠지만, 또 다른 계획이 브뤼셀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막스도 헤리자우에 있는 이상, 자리를 비울 일은 위험했다.
“정 안 되면 막스를 불러들이고 다른 놈들을 더 파견해야겠어.”
웻지가 순순히 자신의 말에 따랐다면 더 편했을 것을.
마르키시오는 멍청한 정의심에 휘둘리던 웻지를 욕했다.
가만히 자신을 따랐으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 알량한 정의감과 윤리에 휘둘리다니.
그러나 그동안의 정이 있어서 단숨에 그를 쳐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시세가 기울고 나면 웻지도 어쩔 수 없지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사태를 최대한 잘 수습해야 했다.
마르키시오의 눈에 아, 아주 잠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