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34. 일단 지켜봅시다(3)
이지호는 거의 한 달 동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당연히 유럽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미국의 제안대로 유럽의 약점을 하나씩 국제 사회에 공개하는 순간부터,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고 보면 됐다.
가히 신(新) 냉전시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유럽이 먼저 한 짓이 있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의 정보를 풀면 압박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더욱 전 방위적으로 달려들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의 정보를 마찬가지로 풀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존에는 동맹이었던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상상보다 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난 한 달 동안은 언론과 정보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잠시의 쉬는 시간도 갖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프리카로 접근하는 자체가 힘듭니다.”
아프리카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수월하지 않은 탓이었다.
정석적인 길은 유럽과의 대립으로 막혀 버렸고, 다른 길은 너무 오랜 시간 빙 돌아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돌아가는 방법이 현재는 안전한 루트 중에 최단 루트입니다.”
사노가 지도에 펜으로 선을 쭈욱 그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최단 거리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지원과 추가 병력 파병이 매우 힘든 거리입니다.”
사노의 말에 실내에 모인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봐도 현재 시국에서는 사노가 그린 선이 가장 안전하면서도 최단거리였다.
더 빠르고 안전한 길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려도 다른 길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머네.”
가만히 듣고 있던 세은이 말했다.
이지호에게서 사노가 말한 루트에 걸리는 소요시간을 들으니,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였다.
지원은커녕, 선발로 넘어가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시간.
그러나 이동 문제에서는 세은으로써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현지 정보원과 몇몇의 요원들이 계속 정보를 보내주고 있습니다만, 페루에서처럼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세은이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몇 번 말했지만, 지금은 기다리지.”
“하지만…….”
“어차피 당장 급하게 움직여 봤자 피해만 생길 테니까.”
그런 세은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각국의 이익을 계산했다.
아프리카에서 마왕이 활동을 시작한다면, 그 지역의 피해가 극심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나라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일은 없었다.
마왕이 아프리카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세은이 찾아 가서 토벌을 할 테니까 말이다.
‘나쁘지 않다.’
네 명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오히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들에게 좋은 제안이라고 봐야 했다.
세은이 지금 제시한 방법은 자국의 손해를 보지 않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가볍게 눈빛을 주고받은 이들이 세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이 건은 세은 씨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세은이 걱정하는 것은 피해도 피해지만, 이상한 점을 파악하려고 넘어간 각성자들이 바싸고에게 현혹되는 게 가장 주요했다.
잘못해서 현혹되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 관계는 둘째 치고, 폭주한 각성자들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이 몇이나 될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세은이 마왕들의 능력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초조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초조함에 쫓겨 움직이는 것은 악수가 된다.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먼저 가질 수밖에 없는 쪽은 마왕이었고, 세은은 그 틈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국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세은은 다음으로 이어지던 안건을 들으며,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피어스는 웻지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웻지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웻지는 갑자기 쓰러진 이후로 여태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피어스는 막스가 모종의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다음, 헤리자우의 일을 아예 막스에게 넘기고 넘어온 상황이었다.
웻지가 쓰러진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피어스였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 진술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
그리고 모든 진술과 보고서를 올리는 일이 끝난 다음에는, 막스가 있단 이유로 헤리자우로 가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헤리자우의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에 막스의 복귀는 아주 좋은 핑계였다.
“피어스!”
막 차에 올라타려는 피어스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뭐야?”
익숙한 얼굴에 피어스가 행동을 멈췄다.
피어스를 불러 세운 남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마르키시오 경이 찾습니다.”
남자의 말에 피어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이미 퇴근했어.”
“하하. 알고 있습니다.”
남자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급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꼭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아이 씨.”
남자의 말에 짜증이 난 피어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굳이 가지 않고 내일 아침에 일찍 가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퇴근한 사람을 다시 부르는 마르키시오가 잘못된 일이니까.
그러나 그 마르키시오가 급하다고 한 일이면 정말로 급한 일인 게 분명했다.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피어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집으로 가봤자 급한 일이 신경 쓰일 것이 분명했다.
“알았어. 지금 간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피어스의 수락에 남자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피어스는 더 이상 말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차에 탑승해 운전대를 잡았다.
“말을 할 거면 퇴근하기 전에 미리 하지. 짜증나게.”
엑셀을 밟으며 피어스가 불만을 토해냈다.
최근의 마르키시오는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막스야 원래부터 마르키시오의 부하처럼 움직이던 특이한 놈이었고, 협의회의 다른 사람들은 마르키시오의 눈치나 보는 딸랑이였다.
그나마 웻지가 마르키시오에게 제대로 된 의견을 내던 유일한 인물이었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이후로는 협의회가 마르키시오의 사조직처럼 변화해 간단 느낌을 받고 있었다.
물론 마르키시오가 딱히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피어스도 불만을 토해내면서도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피어스가 가장 불만인 건, 민주주의의 형식을 입은 독재 같은 의사 결정 방식이 만연해지는 게 싫어서였다.
마르키시오가 내는 의견보다 더 좋은 의견이 한 명쯤은 있을 만도 한데, 그가 말만하면 다들 좋은 방법이라고 방울만 울린다.
옆에서 보기에는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웻지가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웻지에게 생각이 미치자 피어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다.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 받는 의사들조차 대체 웻지가 의식을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저 정상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의사들이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런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
괜히 자신과 교대를 했을 때 일어난 일이라 피어스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끼익―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본부에 도착한 피어스는, 차를 그대로 앞에 세워두고 내렸다.
피어스가 차에서 내리자 본부를 관리하는 관리인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와 피어스의 차를 주차장으로 옮겼다.
피어스가 그 모습을 흘깃 보고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 퇴근한 피어스가 다시 본부로 오자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던 사람들은, 피어스에게서 흘러나오는 불편한 기운에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지금 피어스는 누가 봐도 매우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퇴근 후에, 거기에 불편한 기색까지 저렇게 몸에 두르고 있으니 좋은 일로 본부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피어스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 굳이 말을 걸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 멍청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탁탁―
피어스가 거칠게 마르키시오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노크와 잠깐의 시간 차이를 두고, 마르키시오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르키시오의 허락이 떨어지자 피어스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피어스. 퇴근 후에 불러서 미안해.”
“무슨 일이야?”
피어스의 얼굴을 확인한 마르키시오가 웃으면서 사과를 건넸지만, 피어스는 얼굴을 풀지 않고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화 많이 났어?”
“아! 됐고. 무슨 일이냐고.”
피어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은 확인한 마르키시오가 다시 말을 걸었지만, 피어스는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그런 피어스의 모습에 마르키시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퇴근 후에 그녀를 부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쪽에 미중러의 각성자들이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서 말이야.”
“그래서?”
“아무래도 아프리카에서 그들을 색출할 사람이 필요한데, 거기에 피어스 너만 한 적임자가 없어.”
마르키시오의 말에 피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작 이 얘기를 하려고 지금 부른 거야?”
“아니아니, 당연히 아니지.”
피어스의 거듭되는 짜증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한데도 불구하고, 마르키시오는 계속 웃는 낯을 유지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이 기회에 우리랑 미중러에 양다리를 걸치려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야. 당장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냥 놔두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아.”
마르키시오의 말에 피어스의 표정이 조금은 진지해졌다.
현재 유럽이 구상하는 계획에서, 아프리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
아무리 유럽이 하나로 뭉쳤다고 해도, 미중러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프리카의 치안을 잡아주고, 그 대가로 철저한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 첫 번째 계획 중에 하나.
중동과 동남아는 그다음이었다.
기본적인 인구수와 자원에서도, 아프리카는 안정만 된다면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을 가진 대륙이었다.
“그래서 협의회에서 피어스 너를 아프리카로의 파견을 결정했어. 갑작스럽지만 내일 출발을 해줘야 할 것 같아. 이런 일을 전화로 통보할 수는 없어서 오라고 한 거야.”
마르키시오가 싱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잠깐, 당장 내일이라고?”
“응. 한시가 급한 일이라고 판단이 됐거든.”
마르키시오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피어스가 되물었다.
그러나 마르키시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질문에 긍정을 표했다.
“아니, 무슨 출장을 그렇게 급하게…….”
“이건 출장이 아니야.”
피어스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마르키시오가 말했다.
“전쟁이야. 아직도 모르겠어?”
“아니, 전쟁이라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잖아.”
“…….”
잠시 침묵하던 마르키시오는, 뒤늦게 피어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뚜벅― 뚜벅―
자리에서 일어난 마르키시오가 천천히 피어스에게로 다가가며 말을 시작했다.
“너도 알겠지만 이미 분위기는 예전의 냉전만큼이나 최악으로 치달았어. 여기서 한쪽이 포기를 선언한다? 그건 앞으로 영원히 을의 입장에서 있겠다는 말이야.”
미소가 사라진 마르키시오의 얼굴에 피어스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형형한 눈빛을 빛내던 마르키시오는 방금 전과 너무나 다른 사람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상대가 포기를 할 때까지 우리가 먼저 포기를 할 수는 없어. 그리고 상대가 포기를 하게 하려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줘야 해.”
탁―
마르키시오의 손이 피어스의 어깨에 올라갔다.
피어스는 그때까지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러려면 최대한 빨리 그들의 정보를 봉쇄해야겠지?”
어느새 처음처럼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는 마르키시오가 피어스에게 말했다.
“내일 오전 출발이야.”
그러나 피어스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