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110화 (110/225)

# 110

33. 습격의 배후를 찾아라(4)

세은은 비네의 복부에서 빛의 검을 소멸시키지 않고, 그대로 비네를 제압해서 묶었다.

비네에게 세은이 오는 것을 알려준 것이 누구인지 알아낼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흑. 더 이상 치욕을 주지 말고 죽여라.”

마왕답게, 비네는 복부에 검이 박힌 와중에도 당당하게 말을 했다.

보는 이들이 놀랄 신체 능력.

그러나 일행과는 달리 세은은 당연하다는 듯 비네의 두 팔을 뒤로 돌려 단단하게 포박했다.

모든 작업을 끝낸 세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비네의 제압이 끝나자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어디 누워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묻는 말에 대답하면 깔끔하게 보내주지.”

“하!”

비네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짐은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냥 죽이는 게 나을 것이다.”

“그걸 정하는 건 승자인 내 마음이고, 너는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돼.”

“크르릉!”

세은의 말에 모욕감을 느낀 비네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복부에 검이 박힌 상태에, 온몸이 포박까지 된 모습이라 그다지 커다란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뭘 물어보려고 하시는 겁니까?”

이지호가 아직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비네를 힐끗 바라보면서 세은에게 물었다.

거대한 사자의 얼굴을 가진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와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제가 여기로 올 걸 알려준 놈이 있다더군요.”

세은은 어깨를 돌려 이완시키면서 대답했다.

지금은 비네가 꼿꼿하게 버티고 있지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하면 어느 정도는 대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누, 누구입니까 그게?”

어제의 습격과 더불어,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이지호가 물었다.

“그걸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세은이 간단하게 답하고는 비네에게 다가갔다.

비네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던 세은의 두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세은을 바라보는 비네의 두 눈은, 아직 전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심하게 그런 비네를 내려다보던 세은이, 신성력을 이용해 비네의 갑옷의 이음새를 모두 잘라냈다.

철컥― 철컥―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세은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비네의 갑옷을 모두 벗기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철커덕―

그리고 마지막으로, 갑옷 중에서 가장 커다란 흉갑 부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북실북실한 황금의 털로 뒤덮인 비네의 상체가 여과 없이 들어났다.

치욕적인 상황에 비네가 포효했다.

“시렌! 이게 무슨 짓이냐! 차라리 죽여라!”

“내가 그랬잖아?”

세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답해 주면 깔끔하게 보내준다고 말이야.”

“크앙!”

비네가 모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언제 비네가 고작 인간들 앞에서 이렇게 갑옷이 벗겨지는 치욕을 당할 일이 있었을까.

그러나 세은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뭐, 뭐하는 짓이냐?”

치익―

세은은 신성의 불을 만들어 비네의 풍성한 갈기로 가져갔다.

불이 갈기에 천천히 가까워질수록 무엇인가가 타는 냄새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그만두거라!”

“응? 뭐라고?”

“이 개자식아!”

“멍멍?”

“크, 크아앙!”

세은은 비네의 부질없는 반항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갈기에 불을 가져갔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복부에 박힌 검이 같이 움직여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비네는 그런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최대한 격렬하게 몸을 움직여 반항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타닥― 타닥―

결국 비네의 윤기 흐르는 황금빛 털이 열기에 서서히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윽, 이 정도로 짐이 굴복할 거…….”

“응? 뭐가?”

“크아아앙!”

타다닥―

세은은 비네의 말을 중간에 끊고 그의 털 한가운데 천천히 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마족들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비네의 풍성한 황금빛 갈기가 천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비네는 당장이라도 말을 하고 이 치욕을 끝내고 싶었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갈기는 비네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대답할 수 없단 자존심과, 치욕이 비네의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다투고 있었다.

“꽃잎처럼 만들어 볼까?”

세은이 말을 하고는, 꽃잎처럼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다른 분위를 지지기 시작했다.

“그, 그만!”

자신의 갈기를 꽃잎 모양으로 만든다고?

만약 그렇게 된 상태로 마계로 돌아가게 되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마계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그 사자두왕이, 대적에게 두 번째로 진 것도 모자라서 이런 치욕까지 당하다니 말이다.

타닥― 타닥―

그러나 그런 비네의 마음을 모르는지, 불은 무정하게도 계속해서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미 하나의 꽃잎 모양이 만들어 지기 직전이었다.

“크으으으윽!”

비네는 또다시 반항을 시도했지만, 복부에 검이 박힌 상태에선 더 힘을 내는 게 무리였다.

“천천히 생각해. 뭐가 그렇게 급해?”

세은은 비네를 조롱하며 말했다.

사실 세은으로서도 급할 것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말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비네가 자신의 갈기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마왕으로서의 자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세은은 사실 확률이 반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리적인 고문을 가하는 것보다는 비네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편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마, 말하겠다!”

그러나 생각보다 비네의 태세 전환이 빨랐다.

“아니야. 천천히 해. 하던 건 마무리해야지.”

세은은 더 애를 태우기 위해 비네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 해서 손을 움직였다.

“바싸고다! 바싸고가 짐에게 알려줬다!”

비네는 다급하게 외쳤다.

갈기가 없는 치욕을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바싸고 정도의 능력이라면, 자신이 말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예언의 귀공자라는 이명에 그만큼 어울리는 마왕이 바싸고였다.

“바싸고?”

비네의 외침에, 세은은 갈기를 태우는 것을 멈추고 물었다.

“그렇다. 짐에게 그대가 올 것이라고 알려준 것은, 바로 바싸고다.”

“흐음.”

비네의 입에서 나온 거물의 이름에, 세은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갑자기 10위 안에 드는 마왕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놈이 와서 뭐라고 했는데?”

“그대가 얼마 뒤에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했지. 그리고 협력을 제안했다.

“그리고 너는 거절했고?”

“그렇다. 그러자 바싸고는 아무 말도 없이 웃으면서 이곳을 떠났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모른다. 그저 지금 말한 대화가 전부다.”

“다른 놈들은 없었고?”

“오직 그 혼자였다. 이제 더 이상 아는 게 없다. 더 이상의 치욕을 주지 말고 명예롭게 죽여라.”

비네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세은이, 빛의 검을 손에 쥐고 비네를 겨눴다.

자신을 겨누는 세은의 검에, 비네는 오히려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아주 운 좋은 줄 알아.”

세은은 아직 그레모리와의 맹약에 묶여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소멸시키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

그렇다고 소멸과 역소환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맞추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에, 가볍게 심장을 관통해서 역소환을 시키는 것을 택했다.

그 정도만 해도 당분간 비네는 힘을 되찾으려면 고생을 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푸욱―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은의 검이 비네의 심장을 관통했다.

“……”

비네는, 심장이 뚫리는 고통에도 조금의 신음소리도 흘리지 않았다.

“꺼져.”

서서히 역소환이 되는 비네에게 세은이 일갈했다.

이내 가루가 된 비네의 몸이 완전히 흩날렸다.

비네가 완전히 역소환 된 것을 확인한 세은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빠!”

이지호의 말과 함께, 에린이 세은에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세은이 당하는 모습을 봤던 에린은, 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갑작스런 눈물에 당황한 세은이 그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지호에게 대답했다.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네요.”

세은의 말에 이지호와 사노의 얼굴에 삐질 땀이 흘러내렸다.

* * *

“몸은 괜찮으신 거니까?”

숙소로 돌아와서 다음 계획을 위해 다시 모인 이지호와 사노가 세은에게 물었다.

세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다 고쳤습니다.”

세은의 말에 사노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도의 치료 능력은 정말 보면 볼수록 놀랍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이지호가 사노의 말에 동의했다.

세은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중에는 에린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세은 씨 정도로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나중에 봐야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 같네요.”

세은의 생각보다 에린의 성장 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세은의 신성력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에일린이 특별히 신경을 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두 가지가 합쳐져 시너지가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여튼, 일단 동남아에서 없어진 놈은 누군지 알아냈습니다.”

“바싸고 말입니까?”

비네와 세은의 대화를 같이 듣던 이지호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은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바싸고는 마계 3위의 강력한 마왕입니다. 물론 위가 꼭 실력 순은 아니지만, 1위부터 10위는 실력 순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실제로 11위와 10위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적어도 10위 안에 올라 있는 마왕들은 세은으로서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 정도로 강합니까?”

이지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어렸다.

10위 안에 들지 않는 비네에게도 세은이 고전했는데, 더 강한 적이라니 자연스럽게 걱정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제가 이길 수 있겠지만, 문제는 비네에게 온 것처럼 다른 마왕들에게 협력을 요청할 경우입니다. 그 경우에는 함정에 빠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맹약의 첫 번째 조건에, 6개월이라는 시간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맹약 전체의 효력이 상실된다.

그러나 그 안에 일이 일어나지 않는단 법이 없기 때문에, 세은은 최악을 가정하고 계획을 해야만 했다.

비네와의 전투가 알려준 당연한 진리였다.

“일단, 남은 한 곳 더 살펴보고 거기에 마왕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확인하면서 움직여야겠네요.”

“아, 알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있어야 할 텐데요.”

하지만 비네에게 온 것만으로 봐서는 다른 곳에 있을 마왕에게도 이미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 그렇다면 숙소를 습격한 건 유럽일 가능성이 높아지는군요.”

사노의 말에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본인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마 그럴 겁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요. 단체로 미친 것 같습니다.”

“유럽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군요.”

사노가 이지호가 의견을 같이 했다.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모든 것이 추측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그 부분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노가, 결의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 * *

“비네는 결국 당했나.”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대충 걸친 소년이 중얼거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역부족이었나 봐.”

소년은 가늘고 하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소년의 주변에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지만, 마치 누군가에게 설명을 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럼 남은 건 바딘 정도인데…… 시렌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넘어오기는 하겠어.”

잠시 무엇인가를 계산하던 소년은, 어둠 속에 대고 명령을 내렸다.

“조금만 더 하면 되니까. 우선 통제를 강화하고,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해. 바단이 남은 이상 강제로 마찰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옛!”

그러자 아무 소리도 없던 어둠 속에서, 소년의 명령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을 들은 소년은, 만족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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