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32. 숙소 습격(1)
“역시 피곤하군.”
페루의 리마에 도착한 세은이 찌뿌둥한 몸을 길게 늘어트리며 말했다.
이지호와 에린과 채연 역시 세은과 마찬가지인 듯 피곤한 얼굴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영한과 소진은 안보원의 다른 의뢰를 받아 이번 일정에 동참하지 못했고, 재호는 아예 그레모리에게 맡겨놓고 왔다.
차라리 쭉 맡겨놓고 최대한 빨리 6서클이 되기를 바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채연과 에린을 데려온 이유는, 마냥 실내에서 하는 수련보다, 실전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적어도 실전에서 직접 목숨을 걸고 하는 것과, 안에서 대련의 형식으로 수련을 하는 건 정말로 천지 차이였다.
특히 지금의 페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안이 안정된 상황이었다.
비록 미중러의 각성자들이 머물러 있는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어차피 다른 지역에 갈 일도 없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다른 나라의 각성자들을 만나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특히 돌발 사태에 벌어질 세부적인 상황의 조율을 위해 동행한 이지호의 식견을 높이는 것도 중요했다.
다른 국가들과 한국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도 수련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페루 리마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장거리 비행에 지친 일행들이 끙끙거리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뉘였다.
세은이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꽤 많은 곳을 함께 다니다 보니 나름 정이 든 것 같았다.
“일단 오늘은 푹 쉬면 됩니다.”
건드려도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채연과 에린을 보며 이지호가 말했다.
현재 페루에 있는 게이트 중에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치클라요(Chiclayo)에 생성된 게이트였다.
이곳은 미국이 치안을 관리하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다른 곳보다 가장 특이한 점들이 많았다.
중국이 맡았던 도시는 너무나도 평범한 게이트라 바로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혹시나 페루가 아닐 상황을 대기에 휴식을 취하며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지호가 피곤한 발걸음을 이끌고, 세은을 안내해 호텔에 준비된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방엔 이미 이고르와 장위건, 그리고 사노가 도착해 있었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비해 관련자들이 페루에 함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세은이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치클라요에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게 준비를 해놨습니다. 현재 우리 미합중국의 각성자들이 주변을 모두 정리해 놓은 상황입니다.”
“그럼 내일 바로 출발하지.”
“혹시 치클라요가 아니면 어떻게 합니까?”
“우선 제2후보지인 페루의 다른 게이트에 가보고, 페루도 아니라면 다른 남미 지역을 찾아봐야지.”
“페루가 아니라면 일이 정말로 힘들어지겠군요.”
사노의 말에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클라요의 게이트가 찾는 장소가 맞기를 바라던 건 세은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이곳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바로 출발하도록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세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페루에 도착한 첫날.
간단한 대화가 끝났다.
* * *
“확실히 남미는 분위기가 다르네요.”
치클라요에 도착하자마자 채연이 감상을 말했다.
페루에선 커다란 도시에 속하는 곳이었지만, 게이트가 생긴 이후로 상당한 인구의 감소가 있었다.
때문에 빈집이 많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기기도 했다.
그러고 그런 곳은 필연적으로 할렘가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현재 게이트의 확보를 위해 치클라요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각성자들 역시, 어지간하면 할렘가로는 가지 않았다.
명색인 각성자인 자들이 약쟁이나 빈민들이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할렘가로 걸음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치클라요의 분위기는 정말로 상반되었다.
미국의 각성자들 때문에 일시적이지만 치안이 잡힌 도심의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가득 찬 반면, 할렘가는 도심과 비교되어 더욱 음울한 기운을 풍겼다.
채연은 그런 할렘가를 보면서 말을 한 것이었다.
“지금은 이런 분위기지만, 게이트가 나타나기 전만 해도 이 도시는 상당한 숫자의 관광객들이 방문하던 도시지.”
“게이트 때문에 관광객이 줄었나 보네요?”
“전 세계 어느 지역이든 비슷하겠지만, 아무래도 가뜩이나 불안한 치안이 더 불안해지니 다른 곳보다도 타격이 컸다네.”
이제는 상당히 친해진 사노와 채연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일 때문에 자주 만난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세은은 방해받지 않은 채 조용히 이동을 할 수가 있었다.
한편 호기심이 많은 에린이 연신 호텔로 가던 차량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세은에게 말을 거는 것은 잊지 않았가.
세은은 에린의 말을 자상하게 모두 받아주었다.
“생각보다 빈 집이 엄청나게 많네요.”
“치안이 불안하니까 다들 떠나간 거지.”
“그럼 저 빈집은 그냥 방치되어 있는 건가요?”
“행여 호기심에 빈집이라고 막 들어가지 말게나.”
사노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약물 중독자가 많으니까. 빈집에서 폐인처럼 늘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혹시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할렘가엔 아예 접근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네.”
사노가 진지하게 경고했다.
이미 미국의 각성자들이 치안을 유지하면서 많이 겪은 일 중에 하나였다.
“각성자라고 약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정말로 조심하게.”
혹시나 약물에 중독된 각성자가 있을 수도 있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여자를 보면 달려들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채연도 꽤 수준이 높은 각성자이니만큼 당할 일이 없겠지만, 적어도 불필요한 살인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사노는 계속해서 세은의 일행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어차피 오늘은 컨디션을 조절하고, 바로 내일 게이트로 향할 거니까. 어지간하면 숙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추천하네. 아무리 우리가 치안을 유지해도 불안한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간단한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차는 목적한 숙소에 멈추었다.
게이트로 인해 죽어버린 관광산업으로 인해, 몇 남지 않은 치클라요의 고급 호텔이 숙소였다.
방마다 있는 작은 발코니가 잘 꾸며져 아기자기했다.
호텔의 네 동이 서로 마주 보는 정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사각형의 중앙에는 작은 분수와 함께 수영장이 있었다.
다른 호텔들도 몇 개 더 남아 있었지만 굳이 이곳을 고른 곳은 방어의 용이함 때문이었다.
발코니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수월했다.
“그리고 정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하는 말입니다.”
일행이 좌우의 옆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사노가 일행을 대표해서 세은에게 말했다.
“이곳의 치안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최악입니다. 저희도 몇 번이나 강도로 일하는 각성자들에게 습격이 당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예요?”
채연은 이곳까지 오면서 아무리 사노가 신신당부를 했지만, 그다지 와 닿지 않았던 치안이 여실히 느껴졌다.
미국 각성자들을 습격할 정도로 간이 크다면, 강도가 아니라 테러범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기 바랍니다.”
세은에게 하는 말이지만, 실상은 채연과 에린, 그리고 이지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습격 상황에서 일행들이 당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세은을 제외한 일행들의 얼굴에 긴장이 깃들자, 사노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뭐, 그래도 하루인데 큰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숙소 밖으로만 함부로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호텔의 1층의 레스토랑에 상시 준비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내려가서 드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사노는 세은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다.
일행도 그제야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헐! 에린, 이거 봐봐. 여기 방 완전 좋아.”
“진짜! 너무 좋아요.”
기대를 하지 않아서일까.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방의 상태에 채연과 에린이 금세 방실 웃음을 지으며 세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오빠! 잠시 후에 1층에서 만나요.”
“이따가 봐요.”
세은도 마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타다당― 탕―!
갑작스럽게 총소리가 들린 것은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난 다음이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려오던 총소리는, 점점 호텔로 가까워졌다.
“세은 씨!”
총소리를 들은 이지호가 세은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무래도 일행 중에서는 가장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지호였다.
세은은 당황한 표정의 이지호를 보며 말했다.
“일단 채연이랑 에린 방으로 가죠.”
세은은 이지호를 데리고 바로 옆의 여자방으로 향했다.
벌컥―
상황이 상황인지라 노크 없이 바로 안으로 들어갔더니, 채연과 에린이 젖은 머리를 말리지 못한 채로 다급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꺄악!”
“크, 크흠!”
이지호는 눈앞에 펼쳐지는 민망한 광경에 민망한 헛기침을 뱉으며 다급히 눈을 옆으로 돌렸다.
다행히 둘 다 속옷만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 성장 중인 에린과 달리, 20대의 채연의 몸매는 오히려 속옷 차림이 그 매력을 더욱 배가시켰다.
세은도 내심 침착한 척 고개를 돌렸지만 민망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세은이어도 속옷 차림의 늘씬한 여체를 보는 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애써 달아오르던 얼굴을 숨기며 세은이 말했다.
“빨리 옷 입어.”
채연과 에린도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없이 재빨리 옷을 입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직 달아오른 볼을 하고 채연이 세은에게 물었다.
말을 하면서도 채연은 세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세은도 마찬가지였다.
이계에서 교황으로 지내는 동안, 교단의 부하들 때문에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몰래 연애는 해왔던 세은이었다.
그리고 에일린도 원래 이계의 주민이 아닌 세은에게 그 정도의 자유는 허락해 주었다.
비록 결혼까진 못했지만, 별별 성격의 여자와 연애를 해봤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에는 설렘을 느끼지 못하던 세은이었다.
그건 다시 젊어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쁜 여자를 보면 예쁘단 생각까진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아마도 이미 해볼 만큼 했던 연애라 별다른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차피 모두 비슷하단 사실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지구로 돌아와서는 갑자기 생겨난 게이트로 인해 이런저런 일에 휘말려 제대로 된 20대의 생활을 지내지 못했다.
충분히 20대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으나, 마음 어딘가에 돌아오지 못한 메마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달아오른 얼굴에 세은이 오랜만에 신선한 기분을 느끼며 채연의 말에 대답했다.
“아무래도 사노가 말한 습격인 것 같아.”
“지금이요?”
“일단 기다리면 사노가 오겠지.”
짧은 대화가 끝나고, 어딘가 어색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도!”
그리고 다행히 그 어색한 공기는 빠르게 일행을 찾아온 사노에 의해 깨졌다.
“습격입니다!”
“강도인가?”
“일단 교전이 끝나야 알 것 같습니다.”
“이것 참 공교롭군요.”
이지호가 사노에게 물었다.
“하필 우리가 도착한 날에 습격이라니. 무언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정리된 후에 알아봐야 할 문제지요.”
타탕―
“꺅!”
또다시 총소리가 들리며 여자방의 창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일단 도가 일행과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이 방에 계시면 상황이 종료된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사노는 말을 마치고 습격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우리도 가죠.”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자국의 각성자들을 돕기 위해 달려 나가던 사노를 보며 세은이 말했다.
“저희도 말입니까?”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몸을 푼다고 생각하죠.”
세은이 채연과 에린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해 물었다.
“하기 싫으면 여기 남아 있어도 돼.”
“아니에요!”
“맞아요. 저희도 돕고 싶어요.”
채연과 에린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세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몸을 보호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두고 움직여.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빠지고.”
“네!”
“걱정 마세요.”
“좋아. 그럼 가보자.”
세은은 일행을 데리고 미국을 도와 습격자들을 잡기 위해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