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30. 꼬리잡기(4)
똑- 또옥-
예지를 위해 준비된 장소에서, 그레모리가 자신의 손끝에 상처를 내서 피를 몇 방울 떨어트리고 있었다.
키잉-
그레모리의 피를 머금은 마정석은 더욱 요사한 보랏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똑-
그레모리가 정확히 열세 방울의 피를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 떨어트렸다.
피를 모두 흡수한 마법진이 짙은 와인에 가까운 빨간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세은은 가만히 뒤에서 그런 그레모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대로 해.”
혹시 마력을 아끼기 위해 그레모리가 덜 신경을 쓸 것을 생각한 세은이 경고했다.
세은의 말을 들은 그레모리는 기도 안찬단 듯이 대답했다.
“미친놈.”
키이잉-!
그레모리가 서 있던 중앙에서부터 빛이 발광하며 빠르게 마법진 전체로 번져 나갔다.
“흐응…….”
그레모리의 마력이 마정석에 내재된 마력을 천천히 인도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레모리는 별다른 마력의 소모 없이 마법진에 마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은 마치 스폰지라도 되는 듯이 폭발적으로 마정석의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레모리는 자신의 마력을 뺏기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계속해서 마정석의 마력을 뽑아내어 공급했다.
키이이잉-!
마법진이 내던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법진이 내뿜는 빛도 점차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이내 그레모리의 작은 몸이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그 모습을 긴장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세은이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말이야.”
파앗-
세은의 말과 동시에 마법진에서 사방으로 빛이 폭사되었다가 그레모리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레모리의 눈이 어느새 온통 검정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예지를 보기 시작했단 것을 확인한 세은은 혹여 방해가 될 까 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레모리의 눈이 먼저 원래대로 돌아왔다.
탁-
그리고 허공에 비상해 있던 몸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세은은 그레모리가 예지를 보는 일을 끝내다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말을 걸었다.
“뭐 봤어?”
“…….”
“뭐 봤냐고?”
“아, 좀 기다려 예지가 그렇게 쉬운 건 줄 알아?”
그레모리가 살짝 가쁜 숨을 몰아쉬며 쏘아붙였다.
“휴우!”
그레모리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정석에 남은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처음과 달리 미약한 빛을 뿜고 있던 마정석이 점차 그 색을 잃으며 시들어 갔다.
파사삭-
이내 모든 마력을 흡수당한 마정석은 모든 힘을 잃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마정석의 잔존 마력을 흡수한 그레모리가 더 선명해진 눈동자를 하고 입맛을 다셨다.
“아! 아쉽다. 더 남아 있었어야 하는데.”
작은 꼬마가 요사스러운 눈을 하고 혀로 입술을 핥는 모습은 상당히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귀여웠지만, 세은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 봤어?”
세은의 거듭되던 질문에 그레모리는 당당하게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글쎄? 내가 뭘 봤게?”
“괜히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탁-
그레모리는 세은의 말에도 당당한 표정을 지우지 않으며 벽에 손을 짚은 채 비스듬하게 섰다.
“후후. 물론 내 예지는 항상 틀리는 법이 없으니까.”
바로 대답을 하지 않는 그레모리의 행동에 세은의 이마에 금이 그어졌다.
그 모습을 본 그레모리가 더 이상 튕기는 것을 멈추고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 사실 네가 원하는 건 제대로 본 건 아닌데.”
퍼억-!
“어? 뭐라고?”
거기까지 말을 들은 세은이 빙긋 웃으며 벽을 강하게 내려쳤다.
중요한 것을 본 것처럼 얘기하면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본 건 아니라고?
세은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레모리는 태연하게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응. 그런데 이 몸이 다른 걸 보셨다는 말씀이지.”
“다른 거 뭐?”
별거 아니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세은이 한 번 더 꾹 인내심을 발휘해서 물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 한 번 크게 싸우던데?”
“그게 어딘데?”
“나도 모르지, 건물도 많고 사람도 많았어.”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데?”
“흐응……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것까지는 선명하게 안 보여서, 하여간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많았어.”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비슷비슷한 건물을 지닌 나라는 많았다.
각국의 전통 가옥이나 오래된 건물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으니까.
사람이 많은 곳이라는 것도 살짝 애매한 조건이었다.
생각에 빠진 세은의 귀에 그레모레의 말이 이어서 들려왔다.
“아, 그리고 에일린의 힘을 쓰는 것들이 많던데? 네가 데리고 있는 꼬마 말고도 요즘 전도 좀 하나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세은은 에린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각성자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럼 지금 그레모리가 본 미래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미래란 말이었다.
적어도 세은이 여기서 교세를 늘리지 않고서는 배기지 않을 만한 일이 하나 생긴 다음.
하지만 예지라는 게 항상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 그리고 네가 요구한 거에 대한 힌트는 찾았는데, 여기 사람들보다 피부가 하얀 놈들이랑 같이 있더라고?”
“흠.”
한국보다 피부가 더 하얀 인종이 사는 나라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기에 세은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쓸모없네 이거.”
“쓸모없다니?”
세은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그레모리가 말했다.
“미친놈이 마왕이 보는 예지가 쓸모없다고 하네. 이거 완전 정신병자라니까.”
“마력 아낀다고 대충 본 거 아니야?”
“지랄를 해라?”
세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맹약에 묶여 있는 이상, 아주 형편없이 하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뭐, 하여튼 큰 전투가 난다는 건 알았으니 준비를 좀 해야겠네. 소득이라고는 이거밖에 없어.”
세은은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재호 씨 좀 잘 가르치고.”
“재능이 없는 걸 어떻게 가르쳐?”
탁-
그레모리가 뭐라고 항변했지만 이미 세은이 문을 닫고 방에서 나간 다음이었다.
* * *
일주일.
그레모리의 예지를 듣고 세은이 백인들이 주요 인종인 곳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때였다.
이지호가 다급한 표정으로 세은을 찾아 왔다.
“세, 세은 씨!”
“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이, 이것 좀 보세요.”
이지호는 황망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을 세은에게 보여주었다.
이지호가 건넨 신문엔 스위스 헤리자우의 처참한 풍경이 담겨 있었다.
“응?”
그리고 기사의 헤드라인은 다름이 아닌, 각성자의 민간인 학살이란 주제였다.
“이거 뭐, 단순히 오보 아니에요?”
세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헤리자우의 마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일 때의 외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 그게 아니라. 이 기사의 제보자가 유럽 연합입니다.”
이지호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 나흘 전부터 유럽 연합에서 갑자기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이제 조금의 기세싸움을 한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지호는 잠깐 숨을 들이쉰 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휴가를 갔다가 돌아온 최고 위원 중 한 명의 의견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세은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심각해졌다.
“마르키시오인가 뭔가 하는 사람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유럽 연합에서 제보했다는 말은 뭡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이지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세은 씨가 힘을 앞세워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고 다른 곳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자신에게 협조하라고 협박했다라는 논지의 기사입니다.”
세은이 보고 있던 보고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더 자세하게 얘기해 보세요.”
“아,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세은 씨를 민간인들을 학살한 학살범으로 세계에 공표한 겁니다.”
“미쳤네요.”
“예. 미쳤습니다.”
아직까지 세은은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민간인을 죽인 게 아닌데다, 자신에게 도움을 받아서 살아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가 일방적인 유럽의 주장을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일본이라면 또 모르지.’
그러나 이지호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여기저기서 이에 대한 해명을 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뭐, 우리와 관계가 애매한 몇몇 국가들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잘 해명해서 보내주세요.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어서 보내주면 되잖아요.”
“그, 그렇습니다만…….”
세은의 말에 이지호가 말끝을 살짝 흐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게 정부에서…… 이번 일의 진위를 파악하겠다고 세은 씨를 소환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요?”
“예. 맞습니다.”
“이미 실장님이 다 보고서 올렸으니 그 자료를 보면 정황이 다 나와 있을 텐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국제사회에서 의혹의 눈길을 보내니 공개적으로 청문회에 나와서 해명하라는 것 같습니다.”
이지호가 세은의 눈치를 보면서 덧붙였다.
“세은 씨의 구술을 거의 그대로 받아 적은 보고서는 객관적인 증거로서 효력이 부족하다고…….”
피식-
어이가 없어진 세은이 대답했다.
“그럼 유럽의 일방적인 주장은 객관적인 증거랍니까?”
“아무래도 사체들이 사람들의 모습인지라……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국내 언론들도 지금 대서특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요?”
그러나 아직 상황의 심각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세은이 가볍게 대답했다.
“뭐, 오해는 풀리겠죠. 제가 어디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할 일도 많은데 여기서 보고서나 보면 됩니다.”
“그게…….”
이지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건의 진위가 완전히 파악될 때까지 세은 씨에 대한 일체의 지원을 중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 말에는 세은의 얼굴이 조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그래요?”
“……예.”
“그럼 청문회에 나가야 합니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세은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유럽 거기는 갑자기 왜 이런답니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추측컨대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고는 합니다만…….”
말을 하는 이지호도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람 하나를 완전히 국제적으로 매장을 시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겠단 게 아니라 그냥 완전히 없애버리겠다는 행동과 다를 것이 없었다.
“후우. 그런 이유는 아닐 것 같기는 한데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이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죠.”
갑작스런 당황스러운 소식에 의욕이 뚝 떨어진 세은이 보고서를 전부 정리하며 이지호에게 말했다.
“청문회 날짜 나오면 바로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지호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무거운 침묵만이 실내에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