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91화 (91/225)

# 91

28. 비어 있는 게이트(2)

털썩―

중년 남자를 이용해 인의 장막을 수월하게 뚫고 들어온 세은은,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남자의 뒷목을 풀어주었다.

뒷목이 풀리자 그제야 숨이 좀 트인 남자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켁켁.”

딱히 타격을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그를 내버려 두고 게이트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 미약하지만 마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오자 더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파바박―

세은은 빠른 속도로 게이트를 가로질렀다.

정신을 차린 남자가 미처 세은을 붙잡을 엄두도 못 낼 속도였다.

“이상한데?”

게이트에 있는 몬스터들을 대충 처리하면서 심부로 들어갈수록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기가 전혀 강해지지 않잖아.”

보통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면 갈수록, 근원에 가까워져서 느껴지는 마기도 진해져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 게이트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일정한 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흔적만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없잖아?”

그나마 마기가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곳에 도착하니,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분명 마왕의 마기.

세은은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분명히 여기에 있던 것 같기는 한데…….”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최소한 마왕이 이 자리에 있었거나, 이 자리를 지나갔다는 사실을.

그러나 마왕이 게이트를 지나갈 일이 없었으니, 원래는 이곳에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마왕이 여기에 있었는데, 주변에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통상적인 웨이브로 입은 피해를 제외하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세은은 다시 몸을 돌려 게이트 입구로 향했다.

“응?”

입구에는 이제 막 온전히 정신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가려던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턱―

“……?”

세은이 다시 중년 남자의 뒷목을 부여잡았다.

목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잠깐 같이 좀 가자.”

남자가 세은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세은은 그를 잡고 게이트를 나섰다.

“조장!”

들어갈 때와 똑같은 자세로 세은과 남성이 나오자 다시 누군가가 남자를 불렀다.

“이 새끼!”

처음 게이트로 진입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조장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달려들던 인원이 있었다.

파악―

그러나 세은이 가볍게 휘두른 손짓에 사내의 공격이 막히고 말았다.

“마, 마법은 쏘지 마! 조장이 있다!”

마법을 캐스팅하던 마법사들은, 다른 지휘관의 명령에 마법을 취소했다.

“뭐 좀 물어보고 돌려보낼 테니까 비켜.”

그러나 세은의 말에도 각성자들은 오히려 인의 장막을 두텁게 만드는 데 주력했다.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인원이 없기도 했지만, 만약에 알아들었다고 해도 쉽게 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휴우.”

상상도 못한 게이트 내의 상황에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한숨이 짙게 흘러나왔다.

자신의 예상대로 마왕이 밖으로 나와서 활보하고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쾅!

세은은 한 손으로 중년 남성을 더욱 강하게 쥐어 잡고는, 오른발에 신성력을 담아 땅을 강하게 찍었다.

“커헉!”

순식간에 땅과 부딪힌 발에서 신성력의 줄기가 생성되어 앞의 사람들을 타격했다.

순식간에 인의 장막 중 제일 전방이 줄줄이 바닥과 진한 포옹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기도 전, 세은은 지체하지 하지 않고 걸음을 앞으로 옮기며 다시 손을 휘둘렀다.

파앙―

손짓 한 번에 두 번째 줄의 사람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쓸려 나갔다.

처음 진입할 때와 달리, 제압을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지금 데리고 가는 사람에게 정보를 캐내는 동안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

이렇게 알아서 앞을 막겠다고 꾸역꾸역 몰려주니 일이 더욱 수월했다.

콰앙!

이런 식으로 스무 명 정도를 쓰러트리니, 남은 건 동남아 현지의 각성자들뿐이었다.

몸을 사리기 위해 뒤쪽에 몰려 있던 이들이 대부분.

그들은 살짝 겁에 질린 눈으로 세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일린. 홀리 파이어.”

화르륵―

세은의 손에 신성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갑자기 손에서 화려하게 치솟아 오르는 화염 때문에 각성자들의 눈에 서린 두려움이 더욱 확장되었다.

화악―

세은은 가볍게 동남아 각성자들 사이에 불을 집어 던졌다.

“으악!”

“피해!”

천천히 여유를 두고 던졌기에,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모든 각성자들이 불꽃을 피할 수가 있었다.

펑―!

그리고 화염은 방금 전까지 각성자들이 있던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을 내며 화려하게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본 각성자들의 목울대에서 침이 크게 넘어가는 소리만 사방을 가득 채웠다.

확실한 실력 차이를 보여준 세은은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고 중년 남성을 끌고 일행들에게로 돌아왔다.

뒷목을 잡힌 채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중년 남성도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그런데 어깨에 둘러멘 사람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지호가 가장 먼저 세은을 맞이했다.

그가 세은이 붙잡아 온 중년 남성에 궁금증을 보였다.

“아, 이 사람이요?”

털썩―

세은은 말을 하면서 남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리가 풀린 남자는, 자리에서 쉽사리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물어볼 일이 있어서 데려왔습니다.”

“아…….”

이해한 표정을 짓던 이지호가 말했다.

“그런데 지금 저희는 영어 가능자만 있어서…… 숙소로 데려가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이 통할 사람이 있어요.”

말을 마친 세은은 말을 이었다.

“나와.”

세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차 안에 있는 일행 중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의 크기였다.

이지호는 설마 세은이 또 누군가를 섭외했나 싶어서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덜컥―

“아, 귀찮게 왜?”

그러나 세은의 부름에 답한 사람은 차 안에 있던 그레모리였다.

“이…… 분이 통역이 됩니까?”

아직도 그레모리에 대한 마땅한 호칭을 정하지 못한 이지호가, 대충 얼버무리며 세은에게 물었다.

세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모르는 중년 남자는, 차 안에서 어린 소녀가 나오자 조금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다만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통역해.”

“아오…….”

그러나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던 중년 남자의 기대가 귀로 들려오는 어린 목소리에 산산이 부셔지고 말았다.

“야.”

“…….”

중년 남자는 소녀에게서 들려온 모국어에,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방금 전과 똑같은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남자의 귀를 파고들었다.

“너 말이야 새꺄.”

“우, 우리나라 사람인가?”

자신에게 지금 말을 걸고 있는 소녀의 외형은 눈처럼 하얀 피부에 빨간 머리, 즉, 아무리 봐도 서양인이었다.

“귀찮으니까 빨리 대답하고 끝내자.”

거친 소녀의 말이 남자의 귀를 또렷하게 울렸다.

지금 이 상황이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러나 남자의 혼란한 마음과는 달리 그레모리의 질문이 바로 쏟아졌다.

“게이트에 몬스터 말고 다른 게 나온 적 없냐고 물어봐.”

그레모리는 세은의 질문을 그대로 옮겨 남자에게 질문했다.

“내, 내가 말할 것 같으냐.”

“그렇다는데?”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 사내의 태도에 그레모리의 인상이 가득 찌푸려졌다.

물론 사내가 보기에는 아주 귀엽게 생긴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게 뭔데? 내가 잠깐 구석에 데려가서 물어보고 올게.”

그레모리가 작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세은에게 말했다.

물론 그레모리에게 전적으로 맡기면 결과가 빠르게 나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떤 수를 쓸지 모르는 상황.

적어도 그랬다가는 이 남자가 멀쩡하게 돌아올 확률이 얼마 되지 않는단 걸 알 수 있었다.

세은은 가로로 고개를 저으며 그레모리에게 말했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해.”

“거 참. 나한테 맡기라니까.”

잔뜩 투덜거리면서도, 그레모리가 다시 한 번 세은의 말을 전했다.

“흥.”

그러나 오히려 말을 전해 받은 남자의 표정이 더욱 굳건하게 변했다.

“어디 할 테면 해봐라. 조국을 배신 할 수는 없는 법.”

“휴우.”

세은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하여튼 좋게 말해서 듣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맡기라니까.”

안 그래도 세은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일 때로 쌓인 그레모리가 다시 제안했다.

매일매일, 색다른 신기한 기계를 만지는 재미로 버티고 있지만, 세은과 함께하는 것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후아인 지역에 있었던 심문 때문에 더욱 짜증이 났다.

아무래도 맹약을 맺은 게 실수인 것 같았다.

차라리 깔끔하게 역소환되거나, 아니면 피곤하더라도 예지를 적절히 사용해 가며 피해 다니는 게 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비록 원하는 게 있어서 세은과 맹약을 맺었지만, 그래도 근본은 마왕이었다.

그나마 다른 마왕에 비해 적대감이 덜 한 것이지, 호감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

쾅― 쾅―

“힉! 히익!”

순식간에 두 덩이의 불덩이가 남자의 양옆에 꽂혔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 창백하게 질린 남자는 기겁하며 불덩이를 던진 세은을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빗나갈 일이 없을 거라고 얘기해.”

“혼자 재밌는 건 다하고 지랄…….”

자신의 제안이 다시 거절당한 그레모리는, 훌륭한 스트레스 해소제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더욱 찡그려진 얼굴로 다시 남자에게 말했다.

“다음은 없어. 뒤지기 싫으면 빨리 말해.”

“이, 이건 포로에 대한 국제법 위…….”

콰앙―!

남자의 말을 듣던 그레모리가 손을 들어 바닥을 내려찍었다.

후드득―

“…….”

“…….”

“뭐하냐?”

가뜩이나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는 상황에서, 남자가 다시 대답을 거부하자 결국 폭발한 그레모리가 손으로 땅을 찍었다.

덕분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지하로, 가장자리의 흙이 후두둑 떨어지던 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열 살짜리 소녀가 만들어 낸 이 말도 안되 는 상황에 남자와 이지호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오직 세은의 말만 들렸다.

“아, 대답을 또 거부하잖아. 네가 한 거 똑같이 했어. 뭐가 불만이야?”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야 뭐.

세은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자, 그레모리가 남자를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 물어보게 하면 진짜 죽는다. 저 안에서 뭐 나온 거 있어, 없어?”

“……없다.”

“야, 없데.”

“진짜냐고 물어봐.”

“아, 씨발 진짜.”

그레모리가 작은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물었다.

“진짜야? 나중에 알아봐서 거짓말이면 진짜 뒤져.”

“지, 진짜요!”

그레모리의 손이 남자의 눈앞으로 다가가자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기겁을 하며 대답했다.

“봤지? 이 정도면 진짜야.”

“흐음…….”

그럼 대체 안에 있던 마왕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설마 그레모리처럼 여행을 즐길 리도 없었다.

그레모리야말로 괴짜 중에 괴짜라는 말이 어울리는 마왕이니까.

“야, 생각은 나중에 하고 돌아가자.”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려 바지에 소변을 지린 남자의 모습을 보고, 아주 약간 스트레스가 풀린 그레모리가 세은에게 말했다.

역시 약한 것들이 공포에 떠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은은 그런 그레모리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아주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마왕들이 게이트를 버리고 움직이면 잡기가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대체 게이트를 벗어나서 숨어든 마왕을 어떻게 잡아내야 할지 번뜩이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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