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90화 (90/225)

# 90

28. 비어 있는 게이트(1)

“여기도 아니네.”

방콕과 파타야, 푸켓에 이어 후아인의 게이트에 온 세은이 말했다.

“여기도 아닙니까?”

이지호가 약간은 지친 기색을 띤 채 세은에게 물었다.

“네. 아쉽지만 여기도 아니네요.”

“그럼 이제 저희는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치앙마이는 북부 지방에 있습니다.”

“태국에서는 거기가 마지막인가요?”

“일단 여태까지 파악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이지호의 말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느낀 세은이 그를 바라보았다.

“태국에 입국하신 이후에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점이지만, 현재 동남아의 치안이 그리 좋지가 않아 요원들의 활발한 활동이 힘듭니다. 그리고 동남아 정부들이 자꾸 방해를 하더군요.”

이지호가 짜증내던 얼굴로 말을 이었다.

“유럽에서는 저희가 게이트를 건드리지 않고 이동만 하니까, 동남아 정부에 일을 위임한 채 그저 지켜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긴 게이트를 지키는 사람들 중에는 분명 유럽인들이 꽤 있었지만, 게이트를 근처에서 살펴만 보고 지나치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두고 보겠다는 입장일 겁니다. 저들도 세은 씨에 대한 정보는 차고 넘칠 테니까요.”

“귀찮게 안 하니 좋기는 한데, 정보를 수집 못하게 하는 건 불편하네요.”

“그렇습니다. 일단 유럽과 완벽하게 조약을 맺지 않은 국가부터 조사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해야겠네요.”

세은이 이동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순서대로 이동할 필요는 없으니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 나타나면 바로 알려주시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지호가 이동을 위해 자리를 벗어났다.

“야.”

이번에도 옆에서 가만히 기계를 만지고 있던 그레모리가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왜?”

“언제까지 짐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거야? 그냥 뛰어다니면 되잖아.”

“언제 이 많은 곳을 다 뛰어다녀? 비행기 타고 다니면 편한데.”

“그럼 계속 짐을 달고 다닐 거야?”

그레모리가 답답하단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쟤들, 별로 도움이 안 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은은 일행이 당장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게이트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이상, 게이트를 막아낼 수 있는 각성자를 키워내는 게 중요했다.

단순히 수련만 시키는 것보다, 이렇게 데리고 다니다가 시킬 일이 있으면 임무에 투입하는 게 훨씬 순도 높고 질 좋은 경험을 쌓게 해주기에도 용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점을 위해 일행을 데리고 다닌다고 해도, 세은의 발목을 크게 잡을 만한 일은 없었다.

“딱히 발목을 잡는 건 아니니까.”

“아오. 딱히 발목을 안 잡기는 무슨? 지금 속도를 다 잡아먹고 있는데. 빨리 하고 편안하게 기계 좀 만지고 싶다고.”

세은은 그레모리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결국 그게 목표네. 하여튼 그럴 생각 없으니까 얌전히 따라와.”

“내가 미쳤냐?”

그레모리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세은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잘하시지. 어차피 알려줄 건 다 알려줬으니까.”

말을 마친 그레모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글쎄다?”

주섬주섬 그동안 모은 기계를 챙기던 그레모리에게 세은이 말했다.

“정말로 네가 알려줄 걸 다 알려줬다고?”

세은의 말에 순간 그레모리의 신형이 멈칫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네가 아직 숨기고 있는 게 몇 가지 있는데 말이야. 내가 정확하게 물어보기 전이라 말을 하지 않아도 맹약에 걸리지 않는 것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실까? 에일린의 개라서 월월 잘도 짖는 건가?”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강하게 나왔다.

그러나 세은은 도발에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글쎄. 내 말이 개소리일지 아닐지는 한 번 질문을 해보면 되겠지.”

그레모리가 다시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세은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자, 그래서. 그레모리. 단 하나도 나에게 이번 일에 대해 숨기는 게 없는지, 맹약의 이름을 걸고 대답해.”

“…….”

잠시 매서운 표정으로 세은을 노려보던 그레모리가 이내 체념한 듯 입을 열어 대답했다.

“있다. 왜.”

“역시.”

세은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기쁨에 입꼬리를 올렸다.

맹약을 맺었지만, 그레모리가 물어보지 않을 것까지 다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레모리를 끌고 태국까지 온 것이기도 했다.

일단 현장을 봐야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생각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

그리고 오히려 마왕들을 천천히 잡으면 좋 해야 할 그레모리가,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는 것을 보며 무엇인가 있단 추측에 확신이 더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숨기고 있는 게 뭐지?”

그레모리의 작은 얼굴이 더욱 진하게 찡그려졌다.

그러나 맹약의 효력 때문에 대답을 너무 끌 수는 없는 일.

최대한 정보를 적게 주는 식으로 돌려서 말해야 했다.

“여기는…… 아니야.”

“그건 나도 알아. 흐음. 질문이 너무 광범위 했나?”

잠시 고민하던 세은이 그레모리에게 다시 물었다.

“이 근처에 가장 가까운 마왕이 어디에 있지?”

“그건 모른다고.”

확실히 정확한 위치를 모른단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왜 여기서 빨리 수색을 하자고 했지? 너는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좋을 텐데 말이야.”

“……없으니까.”

“뭐가?”

“이쪽에는 게이트만 있고 마왕이 없다고.”

그레모리의 대답에 세은이 다시 물었다.

“게이트가 있는데 마왕이 없다고?”

“그래.”

“그럼 태국에는 마왕이 없다는 말인가?”

“태국이 어디야.”

세은은 질문을 정정해서 다시 물었다.

“질문을 정정하지. 여기에 왜 마왕이 없다고 말을 했지?”

“…….”

그레모리가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왜 여기에 없다고 말을 했냐고. 마왕이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여기에 없는 건 알고 있지?”

“……떠났으니까.”

“떠났다고? 게이트를?”

“그래.”

“정확한 위치는?”

“몰라! 미친놈아! 우리가 뭐 이동할 때 일일이 보고하면서 돌아다니는 줄 알아?”

그레모리가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그러나 세은은 그런 그레모리의 짜증을 무시하고, 곧바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어디 있는지 못 느낀다면서, 다른 놈들이 대충 어디에 떨어졌는지는 어떻게 알지?”

처음에는 맹약을 믿고 별다른 의심 없이 그레모리의 말을 넘겼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지도에 대략적으로나마나 마왕들이 넘어온 위치를 알려준 그레모리가, 현재 마왕들의 위치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를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표시를 해주려면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어야했다.

그리고 느낄 수 없다면 누군가가 위치를 공유했다는 말인데, 이건 더욱 현실성이 떨어졌다.

“빨리 해명하는 게 좋을 거야. 맹약에는 대답하지 않는 시간을 기다려 줘야 한다는 제한이 없으니까.”

“끄응…….”

결국 묵직한 신음을 흘리며 그레모리가 입을 열었다.

“예지를 약간 비튼 거야.”

너무 짧은 그레모리의 설명에 세은이 더 말하라는 표정으로 턱을 까닥거렸다.

“거 참.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으면 되잖아.”

탁―!

그레모리가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 소환된 뒤, 좀 구경을 하겠다는 생각이 든 다음이야. 수월한 유지를 위해 이 몸을 구현한 뒤, 몇이나 여기에 넘어왔는지 파악하기 위해 예지를 사용했지.”

“그래서?”

“아, 뭘 그래서야? 너도 알겠지만 예지는 완벽한 장소까지 알려주지 않아.”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이곳에 없다고 확신을 했냐고. 자꾸 여러 번 질문하게 할래?”

“이 지방에서 아무도 못 찾는 미래가 보였으니까.”

그레모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괜히 가까이 다가갔다가 마계로 추방될 놈들에게 더 이상 꼬투리를 잡히는 건 나도 사양이라고. 베파르 한 놈 정도야 어떻게 한다 쳐도 말이야. 솔직히 남은 놈들 전부한테 내 기척을 들키면 내가 얼마나 곤란하겠어?”

“그래서 예지를 했다?”

“그래, 어차피 마력을 사용할 일도 없고 한 번 가볍게 봤다. 왜? 불만 있어?”

그러나 세은은 더 이상 그레모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빠졌다.

그레모리가 지금 거짓을 말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태국에서는 마왕을 발견하지 못한단 소리였다.

“뭐, 치앙마이 가서 쉬다가 다른 국가로 움직여야지 그럼.”

“예지를 했는데도 확인하러 간다고?”

그레모리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휴양지니까 가서 쉬다가 움직이는 게 낫겠지.”

말을 마친 세은은 준비를 끝낸 뒤 기다리고 있던 이지호에게로 갔다.

* * *

“흐음…….”

세은은 치앙마이에 있는 게이트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레모리가 예지로 아무것도 없다 했지만, 예지에서 말하는 곳이 치앙마이가 아닐 확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치앙마이의 게이트에서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세은이 여태까지와 다르게 약간 고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지호가 물었다.

“조금 이상하네요.”

“어떤 점이……?”

“기운이 살짝 느껴지는 것 같긴 한데, 정확한 건 안에서 확인해 봐야겠네요.”

“안에서요?”

이지호가 되물었다.

“예.”

“여기도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파견 나온 각성자들과 현지 각성자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호의 말에 세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확인해 보려면 들어가야죠.”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됐습니다.”

세은이 잠시 앞에 산책이나 가는 듯한 신색으로 말을 이었다.

“천천히 다녀오죠.”

타앗―

이지호의 대답을 듣지 않고 세은이 먼저 신형을 날렸다.

이내 얼마 가지 않아 게이트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탁―

“어?”

별다른 기척도 없이 세은이 갑자기 앞에 나타나자, 대부분이 사람들이 놀랐다.

그러나 이내 무기를 뽑아 들고는 세은을 경계했다.

“여기는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니 가라.”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남성이 경고했다.

저벅― 저벅―

그러나 세은은 별다른 대꾸 없이 게이트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처음 경고를 날렸던 중년의 남자가 지체 없이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막아! 동양인 한 명인 걸 보니 상부에서 말한 그자다!”

“썰!”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세은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유럽 연합에서는 능력이 되면 세은을 없애도 좋다는 지침을 내린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공격들이 급소를 노리고 들어왔다.

“첫 만남부터 이미지가 안 좋네.”

세은은 다짜고짜 살수를 펼치는 각성자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신성력을 운용했다.

우웅―

타다당!

순식간에 생겨난 신성력의 막에 모든 공격이 한 번에 막혔다.

“뭐, 뭐야?”

세은은 다시 가볍게 몸을 박차서 지시를 내리던 중년의 남자에게 돌진했다.

“헉?”

당황하고 있던 각성자들을 여유 있게 제친 세은이 순식간에 남자 앞에 섰다.

“아무래도 다 제압하기는 귀찮으니까 말이야. 잠시 같이 가지.”

남자가 알아들을 리는 없었지만, 세은은 가볍게 그의 뒷목을 멱살처럼 잡아챘다.

“조, 조장!”

남자의 뒷목이 잡히자 누군가가 애타게 외쳤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제압하지 못할 건 없지만, 이 중에서도 실력차가 천차만별로 나는지라 한 번의 공격으로 모두를 제압하기에는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실력에 맞춰서 따로 제압하기보단 그냥 지금처럼 지휘관을 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

어차피 간단하게 내부만 확인할 것이니 크게 상관이 없었다.

조장이 세은의 손에 잡히자 각성자들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거렸다.

지시를 내려야 할 조장은 꽉 잡힌 옷에 목이 막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세은은 더 이상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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