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27. 유럽 연합(4)
“아까 그놈들 여기까지 따라왔네?”
그레모리의 말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세은을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그럼 공항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이 유럽 연합에서 온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런가 보네요. 딱히 공격적인 의사가 없어 보여서 무시했는데.”
“그런데 왜 굳이 공항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왔는지…….”
이지호의 의문에 세은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살의가 없단 걸 파악하는 것과, 공항에서부터 따라오던 행동의 진의를 파악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세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뭐, 이렇게까지 찾아왔는데 얘기나 들어보죠.”
“알겠습니다.”
세은의 말이 떨어지자 이지호가 수하들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달칵―
문이 열리자 옷 위로도 확연하게 드러난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가진 남성이 보였다.
그가 유창한 영어로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유럽 연합의 특사 자격으로 온 헤더 막스…….”
막스는 말을 잠깐 멈추고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되어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만, 서로의 이익을 위해 급하게 조율해야 할 사안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헤더 막스는 천천히, 그러나 절도 있게 말을 마쳤다.
“유렵 연합의 특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미스터 이.”
막스의 태연한 대답에 이지호가 살짝 놀랐다.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물론입니다. 현재 이 지역에 관한 정보를 저희는 거의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거의 다…… 말입니까?”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라고 하고 싶지만, 저희가 놓치는 부분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로에서 동남아 지역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저희야말로 한국에서 동남아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습니다. 중국이라면 모를까요.”
“동북아시아 지역이라고 유럽처럼 협력하지 말란 법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는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담담하지만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막스의 말에 이지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아.”
이지호가 다시 입을 떼려던 찰나.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은이 이지호의 말을 막았다.
“괜히 입으로 헛심 빼지 말고, 날 찾아온 거잖아?”
세은이 나서자 이지호가 가만히 뒤로 물러서서 통역에 주력했다.
하고 싶은 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저들의 높은 콧대는 언제든지 눌러 줄 수 있었다.
세은의 말에 막스가 몸을 돌려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공항에서부터는 왜 따라온 거야?”
“동남아의 치안이 불안하여, 혹시나 하는 상황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피식.
통역을 하던 이지호가 자신도 모르게 비웃음을 흘렸다.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준다고?
유럽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최근의 사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매우 자신감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지호의 명백함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막스의 시선은 세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희도 당신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른 일행들은 모르겠군요.”
막스의 눈이 천천히 다른 일행들을 한 번씩 훑었다.
“과연 당신이 없이도 동남아에 올 수 있는 전력인지 말입니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일행의 전력이 아주 낮진 않았지만, 세은이 아니라면 한국이 동남아로 올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지호는 막스의 말이 매우 심기에 거슬리던 모양이었다.
세은 때문인지, 딱히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딱 봐도 감정을 크게 숨기지 않은 채 얼굴에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왜 찾아온 거야?”
“간단합니다. 동남아에서 철수를 해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건 힘들겠군.”
세은이 단번에 막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당신이 여러 나라의 제어할 수 없던 게이트들을 처리했단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막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저희의 정보에 의하면 동남아에는 그러한 규모의 게이트가 아직 생성되지 않았습니다. 즉, 당신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현재 동남아는 유럽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안정이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세력의 지원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 동남아에서는 다른 세력이 들어와서 도와주면 더 좋아할 텐데 말이야.”
통역을 하던 이지호가 어이가 없단 듯이 말했다.
그러나 막스는 그런 이지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세은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저희 유럽 연합은, 세은 도를 정식으로 초청하는 바입니다.”
막스가 갑작스럽게 세은에게 초청을 제의했다.
단순히 세은이 동남아에 온 것을 경계하려 했다 생각하던 일행은 순간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세은이 태연하게 막스의 제의를 거절했다.
“동남아에 그냥 놀러 온 게 아니라서 말이야. 여기 일을 전부 처리하면 유럽으로 가지.”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동남아는 현재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막스가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세은에게 보였다.
“현재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수반들이 게이트에 대한 치안 유지를 유럽 연합에 위탁한다는 조약서입니다. 즉, 저희가 거부하면 당신들이 끼어들 명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막스가 시종일관 당당했던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현재는 5개 국가가 전부지만, 다른 국가들과도 상당 부분 의견이 진척된 상황입니다. 그러니 동남아에서 물러나 주셨으면 좋겠군요.”
말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조약서를 다시 품을 넣는 막스를 보며 세은은 생각했다.
‘하여튼 높은 직위가 있어야 말을 안 해도 알아서 조심해서 움직인다니까.’
별 시답지도 않은 조약서로 자신을 구속하려는 유럽 연합의 행태가 웃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직위를 얻는다고 해도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행정 수반이라고 한들 제약이 있던 탓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보다 더 제약이 생길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냥 지금 밀어버릴까?
세은이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막스가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나 지금 저를 겁박하거나, 이 조약서를 무시하고 동남아를 돌아다닐 생각이라면 접는 게 좋을 겁니다. 동남아에서도 이미 저희와 협조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야, 고민할 게 뭐 있어?”
그때까지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전자 제품을 만지고 있던 그레모리가 세은에게 말했다.
“벌레 몇 마리 달라붙는다고 뭐가 달라져? 빨리 끝내자. 나 편하게 구경 좀 하게. 언제 돌아가야 될지 모른단 말이야.”
노골적인 그레모리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변했다.
“…….”
그레모리의 말을 전해들은 막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벌레라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오만하고 모욕적인 말이었다.
“아, 가만히 있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으니까. 내가 입 열지 말랬지.”
거기에 세은의 이어진 말이 완전히 쐐기를 박았다.
막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안색이었다.
“아, 내가 뭐? 자꾸 같잖은 걸로 시간을 끄니까 그렇지.”
세은의 타박에 발끈한 그레모리가 다시 쏘아붙였다.
그레모리와 세은이 말로 다투는 동안, 이지호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막스에게 통보했다.
“뭐, 방금 들었다시피 저희 쪽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죠.”
“……소문은 들었지만 매우 오만하군요. 아주 잘 알겠습니다.”
이지호의 시원한 표정과 막스의 굳은 얼굴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처음과 달리 막스와 이지호의 표정이 서로 반대로 바뀐 상황.
막스는 결국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금 이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글쎄요…… 아마도 세은 씨는 그 쪽에 관심도 없을 것 같군요.”
이지호가 아직도 그레모리와 다투고 있던 세은을 흘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쾅―
잠시 통쾌한 표정의 이지호.
그레모리와 다투던 세은을 바라보며 막스는 격하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방해할지 걱정이 되기는 하네.”
막스가 나가자 이지호가 그제야 살짝 가라앉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은이 일행까지 항상 지킬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동남아의 치안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이것은 유럽에서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사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뜻했다.
“뭐…… 이번에도 세은 씨를 믿는 수밖에.”
* * *
“우선 태국에는 여기 방콕에 하나, 그리고 가까운 파타야에 하나가 있습니다.”
이지호의 손을 따라 지도에 두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다른 곳은요?”
“푸켓과 치앙마이에도 있긴 합니다."
“전부 제가 말한 조건에 부합이 됩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주변의 환경이 변화하던 걸 제외하고는 기준을 잡기가 힘듭니다.”
“흐음…….”
난감해하던 이지호를 보며 세은이 그레모리에게 물었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
“뭘?”
“같은 마왕끼리 통하는 게 있을 거 아냐?”
“이건 무슨 헛소리야. 우리가 무슨 한 몸인 줄 알아?”
그레모리가 매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단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왕이라는 이유로 도매금으로 묶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거 참. 깐깐하네.”
마왕이 있는 게이트 근처에서 그레모리의 도움을 받는 것 외에, 지금 당장은 그녀의 도움을 받을 일이 없어 보였다.
세은은 이지호가 지도에 동그랗게 표시한 부분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일단 방콕과 파타야 먼저 봐야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세은 씨…….”
“네.”
“아무래도 유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나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끽해야 게이트 앞을 막거나 이동을 막거나 할 텐데. 치우고 움직이면 그만입니다.”
만약 세은이 그렇게 했을 때 일어날 수많은 외교적 마찰에 대해 할 말이 수십여 가지가 떠오르던 이지호였지만, 이내 말을 멈췄다.
어차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이 하지 말라고 해도 세은은 움직일 것이고, 유럽 또한 마찬가지로 움직일 게 자명했다.
이제 와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들을 세은이 아니었다.
“그럼 방콕부터 가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거리상 그래야겠죠.”
“언제 출발하시겠습니까?”
“굳이 시간 끌 필요 없이 바로 내일 출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차량을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미국과 일본에서 세은 씨가 왜 동남아로 왔는지 알려달라는 요청이 왔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알려주세요.”
“그냥 전부 전달해도 되겠습니까?”
“뭐 숨길 것도 없고. 제가 얼마 전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세은의 입가가 살짝 위로 치솟았다.
“본격적으로 움직여 주겠다고. 알아서 해도 됩니다. 저는 제 마음대로 움직일 테니 정부는 정부대로 알아서 하세요. 어차피 뭘 해도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하…….”
이지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긴 누가 세은을 막을 수 있을지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정부를 따라서 움직여 주면 좋을 텐데.
본격적으로 정부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움직인단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도 한국에 도움이 되면 될 테니까 말이야.’
세은의 압도적인 전력을 느낀 국가들은 쉽게 한국을 도발하지 못했다.
적어도 본토를 직접 타격해서 섬멸전을 하지 않는 이상 세은이 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바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세은이 한국을 타격한 국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기 때문.
일본 최상의 전력을 홀로 가볍게 제압한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싶을 국가는 없었다.
‘유럽도 한 번 데이고 나면 조용해지겠지.’
이지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차량을 준비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