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88화 (88/225)

# 88

27. 유럽 연합(3)

“그럼 다들 에린을 데려가고 싶다는 말이지?”

“네! 당연하죠. 동남아라고요. 거기에 이번에도 혼자서 집을 지키려면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세은의 질문에 채연이 커다란 눈을 빛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번에 동남아로 갈 때 에린이 동행하는 문제에 대해 세은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에린의 물밑 작업에 완전히 넘어간 채연과 재호는 에린을 데려가는 것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치안이 좋지 않다 해도, 저희가 묵는 곳은 귀빈들이 묵는 곳이니까요. 어느 정도 치안은 담보되지 않겠습니까?”

정재호도 나름 세은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맞아요. 그리고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는 에린도 자기 한 몸 지킬 수 있잖아요?”

“흐음…….”

기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각성자, 그것도 에일린의 사제로 각성한 에린은 세은의 지도 아래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세은의 기준엔 아직 한참 못 미치지만.

세은은 옆에서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에린을 마주 보며, 며칠 전에 그레모리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야, 엄청 안 어울린다?”

“뭐?”

신나서 라디오를 분해하고 있던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반문했다.

“그 너희 신도 있잖아. 왜 그렇게 보호를 하는 거야?”

“뭐가?”

“아니, 그냥. 전쟁터에 안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기에.”

“우리 사이에 남이 뭘 하든 신경 끄시지.”

“아니, 웃겨서 그렇지. 내가 알던 시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여러 군데서 다르니까.”

“헛소리할 거면 방으로 꺼져. 거실에서 티비 보는데 방해하지 말고.”

“아, 기다려. 이거 분해하고 저것도 할 거니까.”

“티비는 건들면 죽어.”

“아, 왜! 저게 제일 신기한 것 중에 하나인데.”

“어차피 건드려 봤자 원리는 모를 테니까 건들지 마.”

그레모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속 좁은 새끼.”

“다 들린다.”

“아? 들렸어? 아, 들리라고 한 건데, 들릴 줄은 몰랐네. 헤헤.”

그레모리가 순진한 표정으로 함박웃음을 지은 채 세은에게 대꾸했다.

그런 그레모리를 보던 세은의 미간에 주름이 가득 생겼다.

“아니, 하여튼. 원래 계속 싸워봐야 실력이 느는 거지.”

“실력이 늘어야 싸우지.”

“실전 경험 없이 실력만 늘어봤자 반푼이지.”

“주제넘게 나서지 마. 짜증나니까.”

“어휴, 말투하고는. 어떻게 마왕인 나보다 입이 더 험하냐?”

그레모리가 과장되게 손사래를 쳤다.

세은은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모리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라디오를 내려놓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좀 약해졌다.”

“자꾸 헛소리 할래?”

“아니, 맞는 말 아냐? 잘 생각해 봐. 그래도 지금은 나름 협력 관계라서 하는 말이니까.”

그레모리는 할 말을 다했는지 다시 라디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세은이 가만히 그런 그레모리를 바라보며 그녀가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대신 가서 위험한 행동 하지 않기로 해.”

“당연하죠!”

에린의 커다란 눈이 환희로 가득 찼다.

기다란 속눈썹이 기쁨으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내일 출발하니까 다들 간단하게 짐 싸. 현재 동남아 치안은 매우 불안하니까 조심하고.”

“네!”

세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행은 각자 짐을 싸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세은 씨! 여기입니다!”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 내리자, 먼저 태국에 입국해 있던 이지호가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현재 동남아의 치안 상황이 생각보다 더욱 안 좋습니다.”

이지호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의를 건넸다.

“그 정도인가요? 대체 얼마나 안 좋은 거예요?”

채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린도 같이 온 만큼 더욱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나마 동남아 중에서 가장 치안이 괜찮다고 할 수 있는 태국의 치안도 엉망이라니.

다른 국가들은 얼마나 바닥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일단 먼저 숙소로 이동하시죠.”

미리 준비한 방탄 차량이 공항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딱 봐도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세단의 모습에 공항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차량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다만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덩치 좋은 사람들이 차를 호위하고 있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탑승하시면 됩니다.”

일행들이 순서대로 차에 탑승하는 동안, 보안들은 쉴 새 없이 주의를 경계했다.

언제 무장 강도들이 고급스러운 차량을 목표로 들이칠지 몰랐다.

타악-

마지막으로 이지호가 차에 탑승하자, 차는 바로 공항을 빠져나가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휴우. 다행히 아무 일이 없군요.”

“실장님, 치안이 이 정도로 엉망이에요? 공항에서 차타는 걸 걱정할 정도로요?”

채연의 질문에 이지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호텔로 들어가면 습격이 아예 불가능하니까. 차량을 타기 전에 개별적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헐…….”

이지호의 말에 세은을 제외한 일행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세은 씨가 있으니까 별 문제 없겠지만, 총이라는 변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하긴, 총은 까닥 방심하면 위험하죠.”

“그렇지.”

이지호가 쓴웃음을 띠며 얼마 전에 있었던 실제 사례를 얘기했다.

“일주일 전에는 유럽에서 온 각성자들이 강도를 당했어.”

“각성자들이요?”

“그래, 갑작스럽게 기관총으로 갈겨대 초반 총에 맞은 각성자가 꽤 생겼나 봐.”

예상치 못한 말에 일행의 눈이 커졌다.

“각성자들한테도 강도짓을 해요?”

“일반 여행객들보다 돈이 더 많으니까 말이야. 혹시나 납치에 성공하면 몸값도 비싸게 받을 수 있고.”

“아…….”

말을 하던 이지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우리 요원들도 항상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야. 사실 당장이라도 여기서 철수하고 싶어.”

“미안합니다.”

“아! 세은 씨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그냥 현재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요”

세은의 사과에 이지호가 급하게 자신의 말을 수습했다.

너무 좋지 않은 상황이라 자신도 모르게 푸념을 한 것이었다.

혹시나 세은이 들으라고 말을 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세은은 아무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야. 뭐가 따라오는데?”

그때, 옆에서 작은 전자기계를 만지는 데 집중하고 있던 그레모리가 세은에게 말했다.

“알아.”

둘의 대화에 이지호가 깜짝 놀랐다.

“누가 따라온다고요?”

“예. 우리 측 사람들하고 기운이 전혀 다르네요. 혹시 용병이라도 고용했습니까?”

“아니요. 용병은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용병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럼 우리 편은 아니네요.”

“허허. 누군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지호가 짧게 웃었다.

그러나 정말로 웃는 게 웃는 것은 아니었다.

태국에 세은이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따라붙다니.

차라리 단순 강도라면 괜찮지, 다른 국가라면 한국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말이었다.

이지호가 급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잡을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굳이 잡을 필요가 있을까요.”

세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공격할 의사가 딱히 없는 것 같은데요. 거리를 정확히 지키면서 따라오네요.”

“그래도……”

이지호는 세은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세은의 말이 맞고 틀리고는 떠나서, 그가 해주지 않는다면 괜한 분란을 만들 필요가 없다.

현재 동남아는 그저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선인 상태였다.

“별것도 아닌데 신경 쓰이면 그냥 잡지?”

그레모리가 말했다.

“쥐새끼처럼 따라오는 거 짜증나는데 말이야.”

이미 이런 그레모리의 말투에 익숙해진 일행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레모리를 두 번째로 만나는 이지호로선 그레모리의 말투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레모리가 주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별로 힘든 일도 아닌데 말이야. 사람이 게으르다니까.”

“가만히 있어. 괜히 일 만들지 말고.”

“아, 왜? 건방지게 뒤에서 따라오는 거 기분 나쁘단 말이야.”

“적인지 아닌지 모르잖아.”

“감히 내 뒤를 몰라 따라오는 것부터 잘못이지.”

그레모리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푸흣!

그 귀여우면서도 안 어울리는 모습에 에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레모리는 그런 에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럼 내려서 잡고 온다?”

“네가 아니라 나를 따라오는 거니까 가만히 있어.”

하지만 세은은 단호했다.

“하여튼 착한 척은…….”

그레모리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보고 있던 전자 제품을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세은이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이지호에게 말했다.

“적은 아닌 것 같으니 그냥 이대로 숙소 가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네요.”

“하하. 알겠습니다.”

세은의 말에 일단 한결 안심이 된 지호는 추격자가 있단 사실을 전파했다.

그래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는 해야 했다.

에린이 말했다.

“그런데 공항이 도시랑 멀리 있네요?”

채연이 그런 에린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보통 그래, 아마도 시끄러우니까 그럴걸? 비행기가 시도 때도 없이 다니면 생각보다 엄청 시끄럽거든”

“으음. 그래도 이건 너무 멀지 않아요?”

“글쎄?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가가 방콕 시내로 들어섰다.

다행히 평일 낮이라 공항 고속도로는 별로 막히지 않았다.

평소에 지옥 같은 교통 체증으로 유명한 방콕의 시내는,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치안이 좋은 고급 호텔이 모여 있던 구역으로 들어서자, 차가 거의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실장님 차가 왜 이렇게 없어요?”

예전에 방콕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던 채연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치안이 안 좋으니까.”

“아…….”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충분했다.

“정말로 치안이 안 좋은가 보네요. 더 조심해야겠다. 에린.”

“네!”

에린이 힘차게 대답했다.

끼익-

이윽고 차는 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호텔은 입구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지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일행들이 안으로 안내했다.

“우선 바로 안으로 들어가시죠.”

일행은 계속 재촉을 하던 이지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하게 장식된 샹들리에가 일행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홀의 중앙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분수대가 맑은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와아…….”

세은과 그레모리를 제외한 모든 일행이 호텔의 내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지호는 그런 일행들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안내를 했다.

“일단 방은 각자 하나씩 잡았지만, 여성분들은 요청에 따라 하나로 잡았습니다.”

“잠깐, 설마 나도?”

그레모리가 오늘 처음으로 이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이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채연 씨의 요청이 있어서.”

“아! 왜? 같이 자면 좋잖아!”

채연은 약간은 이상한, 그러면서도 매우 귀여운 그레모리와 친해지기 위해 많이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그레모리도 딱히 자신에게 열심히 신기한 것들을 가져다주던 채연의 행동에 제약을 걸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에일린의 자녀인 에린과는 굳이 말을 오래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을 같이 써야 한다고?

그레모리가 불쾌한 심정으로 채연을 바라보았다.

채연은 그레모리가 기분이 상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재빨리 준비해 놓은 말을 꺼냈다.

“아, 어쩌지. 우리 그레모리 주려고 내가 신기한 전자 제품도 몇 개 가져왔는데……..”

그 말에 그레모리가 복잡한 표정으로 채연을 바라보았다.

감히 멋대로 행동했다는 불쾌감과, 신기한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충돌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세은에게 질리도록 교육을 받은 영향도 매우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 도착했습니다.”

그레모리가 고민하는 동안 일행은 우선 방에 도착했다.

가장 큰 방은, 세은이 사용할 곳이었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자, 바로 시작하죠.”

세은이 이지호를 보며 말했다.

이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준비한 브리핑을 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똑똑-

그때, 누군가가 일행이 있는 숙소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선명하게 방을 울린 노크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문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은 도. 유럽 연합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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