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27. 유럽 연합(2)
“애처럼 행동하라고는 안 할 테니까. 말 좀 가려서 해.”
“내가 뭐?”
“몰라서 물어?”
“이해가 안가 네.”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말했다.
“뭐가 되었건 우리 힘이면 상대방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나?”
“평범하게 살자. 좀.”
“이미 평범과는 거리가 멀면서 헛소리야?”
“휴우…….”
세은이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레모리는 오히려 당당한 표정으로 세은에게 말했다.
“하찮은 것들과 티도 안 내면서 이렇게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큰 배려 아니겠어?”
세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를 대체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지?
그레모리는 정말로 본인이 티를 안 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은이 오류를 짚어주기 위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에린이 뛰어 들어왔다.
달칵-
“세은!”
세은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
와락-!
순식간에 달려와 세은의 품에 안긴 에린이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다녀왔어요?”
작은 얼굴을 들어 눈을 맞추는 에린을 보며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하여튼 새끼들한테 약한 건 똑같다니까.”
“응?”
오직 세은만 보고 달려오느라 바로 옆의 작은 그레모리를 보지 못했던 에린은, 그제야 그레모리를 발견하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뭐야. 애잖아?”
그러나 상당히 어른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눈에 보인 상대는 열 살이나 됐음직한 작은 꼬마였다.
“감히 애라니? 건방진 에일…… 읍!”
턱-
그레모리가 에일린의 이름을 꺼내려 하자 세은의 손이 다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이번에도 그레모리는 역겨운 표정을 여과 없이 지으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린이 이상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원래 세은이 이런 사람이었나?
그러나 세은은 자신의 품에 딱 붙어 있던 에린을 떨어트린 뒤 헛구역질을 하고 있던 그레모리의 뒷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헉.”
뒷목을 잡힌 그레모리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이미 모든 팔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이상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네? 네.”
“아! 이거 안 내려놔?”
쾅-
세은은 반항하던 그레모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야. 에일린 얘기 꺼내지 마.”
“왜? 쟤도 다 알 거 아냐? 딱 보니까 너희 애들인데.”
“하여튼 말하지 마. 어떻게 아냐고 하면 뭐라고 할 거야?”
“네가 말해줬다고 하면 되지.”
“아, 헛소리하지 마. 반말을 하든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말만 조심해 알았어?”
“거 참, 까다롭네.”
“알았어?”
“……뭐, 그래. 노력은 해보지.”
그레모리의 대답을 들은 세은이 먼저 방을 나섰다.
그레모리가 잔뜩 기분 상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나섰다.
“누구예요?”
세은이 나오는 것을 본 에린이 그레모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친구.”
“치, 친구요?”
에린이 경악한 표정으로 세은과 그레모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잘 쳐줘도, 그레모리와 세은이 친구라 할 수 있는 나이인지 의심이 들었다.
“정말요?”
세은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 어려 보이는데요?”
“…….”
그러나 세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세은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에린은 시선을 돌려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세은과 잠깐 방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 매우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그레모리의 두 눈이 에린과 마주쳤다.
“뭘 봐?”
“……응?”
갑작스런 그레모리의 말에 에린이 당황했다.
“기분 안 좋으니까 눈 빤히 뜨고 쳐다보지 마라. 건방지게.”
“…….”
그레모리의 적나라한 말에, 에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 * *
“다음 목적지는 동남아입니다.”
“동남아요?”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남아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
“어딘지를 정확히 몰라서 문제입니다.”
“아…… 동남아가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렇죠. 아무래도 발품을 좀 팔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은의 말에 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요즘 동남아 쪽 치안이 말이 아닙니다. 물론 세은 씨라면 문제가 없을 테지만…… 저희가 도와드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게 엉망인가요?”
“어휴…….”
세은의 질문에 지호의 입에서 한숨이 먼저 튀어나왔다.
“말도 마십시오. 게이트에서 몬스터는 쏟아져 나오지, 일부 각성자들은 조건 좋은 타국으로 넘어가지. 국민들도 이민 가려고 난리지. 국가가 멀쩡하겠습니까?”
“흐음. 용케도 국가가 유지되고 있네요.”
“어디나 애국자는 있는 법이니까요. 거기에 모든 각성자가 이민을 가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각성자들의 유출을 막기 위해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고 합니다.”
이지호의 말에 세은이 책상을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하여튼 상당히 힘든 상황이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동남아에는 게이트가 몇 개나 있어요?”
“게이트의 숫자는 아무래도 국가 기밀이다 보니 현재로서는 정확한 유추가 어렵습니다.”
“음…….”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세은이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직접 돌아다니는 방법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그때 이지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시간에 좀 여유가 있다면, 각 국가별로 게이트 개수를 알아내서 취합할 수는 있습니다.”
“방금은 국가 기밀이라고?”
“아무래도 동남아니까요. 잘 찾아보면 돈으로 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럼 게이트 숫자 말고 다른 것도 확인 가능한가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다른 게이트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게이트, 아니면 주변의 환경에 변화가 생기는 게이트. 이 두 가지입니다.”
세은의 말을 들은 지호가 물었다.
“더 강한 몬스터의 기준을 알려주시면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세은 씨 기준과 저희 기준이 다른 터라……”
지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세은이 대답했다.
“마땅히 기준을 세우기에는 애매하네요. 그냥 막느라 고전하거나 못 막은 곳이면 될 거 같습니다.”
“끄응……. 알겠습니다.”
매우 애매한 기준이었지만, 이지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준에 걸리는 데가 한두 곳이 아닐 게 분명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은에게 정중한 인사를 받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외국에서는 정상들에게도 말을 높이지 않는단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 만난 인연 덕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어디보다 한국을 생각해 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지호가 기분 좋은 웃음을 만면히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 *
세은의 집은 매우 북적거렸다.
영한과 소진은 최근 수련이 끝난 이유로 오지 않았지만, 둘을 제외하고도 채연과 재호, 그리고 에린과 그레모리까지 총 4명이 와글와글 거리고 있었다.
“오오. 참으로 신기하군.”
“휴대전화 처음 봐?”
“처음 본다.”
“휴대전화를 어떻게 처음 보지? 어디 산속에서 살았어?”
“일단 줘봐.”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고 있던 세은의 이마에 점점 주름이 깊어졌다.
“시끄러워.”
“오빠. 얘 정말 오빠 친구 맞아요?”
“거 참. 그 얘기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아, 가만히 있어봐, 꼬마야.”
“이래서 인간들은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을 한다니까.”
세은의 얼굴의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세은이 나직이 말했다.
“친구 맞고, 얘가 좀 멀리서 살다 와서 잘 모르니까 잘 가르쳐 줘.”
“음. 네.”
“그리고 재호 씨.”
“네?”
“앞으로 수련 시간에 쟤한테 강의 받으세요.”
“예?”
“뭐?”
갑작스런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와 재호의 입에서 경악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세은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저래 보여도 케인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사니까 도움이 될 겁니다.”
세은은 시선을 돌려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도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알아서 밥값해. 그러면 알아서 재호 씨가 네가 원하는 물품 가져다줄 테니까.”
“정말?”
원하는 물건들을 가져다준다는 말에 그레모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세은은 대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재호를 향해 친절하게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주었다.
“저래보여도 과학에 관심이 많으니, 분해하기를 원하는 물건 잘 구해다 주면 마법을 잘 가르쳐 줄 겁니다.”
“저, 정말입니까? 정말 이 꼬…….”
거기까지 말한 재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세은이 이런 일로 자신을 속일 리 없었다.
하지만 마냥 작고 귀엽기만 한 소녀가 자신보다, 거기에 케인보다 뛰어난 마법사란 사실을 믿기에는 상식이 거부했다.
그러나 세은이 단호한 눈으로 재호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다. 다행히 때맞춰 스승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재호 씨가 6써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이 꼬, 아니, 이분의 서클은?”
“원래 개인의 서클에 대한 것은 서로 묻지 않는 게 예의이니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실례했습니다.”
세은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만간 동남아로 가야 합니다. 그전에 실력을 최대한 끌어올렸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오빠, 저는요?”
“채연이 너는 하던 것처럼 사람들 불러서 같이해. 내가 봐줄 테니까.”
“네!”
“저도요!”
대화를 듣고 있던 에린이 열정적으로 끼어들었다.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을 어필하는 에린의 모습에 세은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일단 학교부터 졸업하고 움직이자.”
“……싫어요.”
“나중에 놀러갈 때 같이 가자.”
“차라리 지금 가고, 놀러갈 때 안 갈래요.”
에린이 얼굴 가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두고 가려고 하지 마요. 세은이랑 같이 다니고 싶단 말이에요.”
에린의 말에 세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에린의 손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사실 에린이 있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린은 계속 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세은이 보기에는 제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죠. 당연히 세은은 너무나 강하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에린은 정말로 서운함을 가득 담아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은은 계속 외국으로 나갈 텐데. 그럼 어차피 저는 여기에 혼자 남는 거잖아요.”
“학교에 친구들 있잖아.”
“친구들이지 가족은 아니잖아요.”
에린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세은을 바라보았다.
여린 모습에 세은이 살짝 당황했다.
거기에 세은과 일행을 가족으로 칭하는 것이 더욱 감정선을 건드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표를 내지 않게 노력하면서 세은이 대답했다.
“그럼 당장은 무리고, 일단 얼마나 발전하나 보자.”
에린을 데려갈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다행히 여지를 남긴 대답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 에린이 더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얼마나 발전해야 데려갈 건데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세은은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조금 생각해 보고 알려줄게. 기준을 한 번 정해봐야겠어.”
“좋아요! 약속한 거예요?”
언제 글썽거렸냐는 듯이 맑고 청아해진 에린의 두 눈에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세은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