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86화 (86/225)

# 86

27. 유럽 연합(1)

세은이 중국과 러시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유럽으로도 퍼져 나갔다.

가뜩이나 한미일이 공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상황에서 중국과 러시아까지 그 행렬에 동참할 것 같자 유럽에선 촉각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미국으로 넘어갔던 세계의 중심이 이제 다시 유럽으로 넘어오려던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한미일에 더해서 중국과 러시아가 협력한다면,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될 일은 다시 요원해 보였다.

그로 인해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 외곽.

그중에서도 가장 심부에 위치한 곳에서 격렬한 토론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자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과장이 섞여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영웅 만들기는 어디나 하…….”

쾅!

한 남자가 책상을 격하게 내려치며 말을 끊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됩니까? 단순히 영웅 만들기로는 설명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커험.”

“방법은 하나입니다. 제3세계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수적 우위라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제3세계가 지금 그럴 정신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도와야지요. 파견해서 치안을 안정시키고, 우리 그늘에 넣어야 합니다.”

“흐음. 그것 말고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그 토론의 현장에 점점 달아올랐다.

격렬한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표정의 남자가 중앙에 앉아 있었다.

선이 굵은 완숙한 청년의 분위기를 뿜어내던 남자는 가만히 턱을 괴고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포마드로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이 몸에 딱 맞춘 정장과 어울려 신사적인 분위기를 여과 없이 자랑하고 있었다.

턱을 괴고 몸을 살짝 기울인 남자의 태도는 일견 성의 없어 보일 수 있었으나, 실내의 누구도 남자의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순간 좌중의 토론을 듣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순식간에 소란이 멎었다.

실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마치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공손한 태도였다.

남자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우선 우리도 그 사람과 접촉해 보는 것이 가장 먼저 아니겠습니까?”

“으음…….”

여기저기서 고민이 담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방안은 제일 처음에 가장 먼저 나왔던 의견이었다.

그러나 세은을 유럽으로 초대해 온다는 것 자체가 시작부터 지고 들어간다는 느낌을 주어 반려된 것이었다.

특히 정보부의 의견으로는 공손한 태도가 아니면 오지 않는다고 하니, 더욱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의견은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자가 이 의견을 제시한 이상 다른 그 어떤 의견보다 무게감 있고 비중 있게 다뤄져야 했다.

짙은 침묵을 뚫고 한 중년의 사내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마르키시오 경은 그자를 초대해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파악을 해봐야죠.”

남자,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제3세계를 원조하고 영향력을 넓히는 방법도 매우 좋을 것 같네요.”

마르키시오가 길고 하얀 손을 들어 자신과 대각에 앉아 있던 여인에게 지시했다.

“피어스, 네가 지원 나가.”

“왜 내가 가? 놀고 있는 웻지도 있는데.”

“마법사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에 화려하게 보이는 것에 더 열광하지.”

“싫어. 나도 그 동양인에 대해 호기심이 좀 있거든.”

“동남아 쪽으로 가서 가는 김에 휴양도 즐기고 하면 좋잖아?”

마르키시오가 회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애슐린 피어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마르키시오의 지시를 거부했다.

“됐어. 이 판국에 휴양은 무슨 휴양? 동남아가 지금 그럴 치안이나 돼?”

“뭐, 어디나 상류층을 위한 자리는 남아 있는 법이니까.”

“필요 없어. 휴양보다 그 남자한테 더 관심이 있거든.”

“개인적인 관심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지 선진 시민이지.”

“선진 시민 같은 소리 하네. 그거 다른 놈 시켜, 막스 같은 놈.”

“막스는 이미 나가 있으니까.”

“그럼 막스가 돌아오면 가라고 하든가. 하여튼 나는 싫어.”

피어스가 딱 잘라 말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선 영향력을 넓히고 초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상태로 만나기에는 저희가 조금 실적이 부족하다고 보입니다.”

남자의 말에 마르키시오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눈을 마주친 남자가 순간 흠칫 놀랐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 남자에게 웃음을 지어주며 마르키시오가 물었다.

“그럼 어디를 먼저 원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까?”

“험험.”

남자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거리로 따지면 아프리카나 중동이 훨씬 가깝습니다만, 아무래도 방금 전에 경이 말한 대로 동남아 쪽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저들이 가장 먼저 포섭에 나설 곳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가 아니겠습니까? 동남아를 우리 영향권 안에 들면, 그 사이에 끼인 중동과 아프리카는 자연스럽게 우리 영향에 들어오게 되겠지요.”

“다만 우리의 전력이 그만큼 보충이 되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시는 바와 같이 각 종교들과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만…….”

“뭐, 종교 단체들이 쉽게 협력을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 부분은 장기적으로 의논하죠.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로 먼저 가야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어느 국가를 먼저 원조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 부분은 의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실 동남아가 총체적으로 난국인 상황이라…….”

남자가 그 부분까지 생각 못했다는 듯 송구한 표정으로 마르키시오에게 말했다.

마르키시오는 그런 남자에게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아. 그럼 결론이 나면 알려주세요. 모두의 의견이 통합되면 따르겠습니다. 항상 민주주의를 따라야지요.”

말을 마친 마르키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결정이 나면 나중에 연락 주세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그리고 그런 마르키시오의 뒤를 웻지와 피어스가 따라 나갔다.

셋이 나가고 난 회의실에는, 주어진 의제에 대한 토론이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

중국과 러시아의 일을 모두 처리한 세은이 한국으로 귀국했다.

러시아로 직접 오겠다던 시페이가 갑작스런 일로 러시아에 방문하지 못했기도 했거니와, 딱히 러시아에 더 머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삼 일 정도 여유 있게 모스크바 관광을 즐긴 일행들은 별 말 없이 세은을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세은이 귀국하자 역시나 이지호가 귀신같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세은은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대답했다.

“비행기를 자주 타셔서 피곤하실 것 같습니다.”

“딱히 편안하지는 않네요.”

“하하. 비행기가 아무리 편해도 갇혀있다는 한계를 벗어나긴 힘들죠. 넓어도 실내는 실내고요.”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항상 노력해 주신 세은 씨의 노고에 국민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합니다.”

“됐습니다.”

“하하. 일단 그동안 미일과 협의도니 사항에 대해 알려드릴까요?”

세은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그런 부분까지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아…… 그래도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무원도 아니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세요.”

“아, 알겠습니다.”

단호한 세은의 말에 이지호가 결국 그에게 진행사항을 전달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의 생각으론 세은이 꼭 알아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채연한테 따로 전달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 나는 먼저 갈게.”

간단하게 이지호와 인사를 끝낸 소진이 세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길드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채연아 나도 갈게. 연락해.”

영한도 소진의 옆에서 채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한이 너도 가게?”

“나도 길드에 가봐야지.”

“아하. 그래그래. 나중에 연락해!”

“그, 그래.”

얼빠진 모습을 보이던 영한을 뒤로하고 세은의 뒤에 서 있던 그레모리가 물었다.

“언제까지 서 있을 거야?”

“응?”

그제야 그레모리를 발견한 이지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같이 있는 아이는……?”

“아, 내 친구.”

“……친구요?”

“아, 언제 움직일 거냐고.”

“가만히 있어. 재촉하지 말고 짜증나니까.”

“거 참. 무슨 시간 낭비인지 모르겠네. 이게.”

이지호는 태연하게 세은과 반말을 주고받는 소녀의 모습에 첫 번째로 놀랐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전형적인 외국인 소녀의 모습임에도 한국어가 어색하지 않은데다 유창하단 사실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 그러니까 친구분……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채연과 소진, 그리고 영한은 익숙한 듯이 둘의 모습에 아무런 동요도 없어 보였다.

“이, 일단 이동하시죠.”

세은에게 더 물어봤자 다른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느낀 이지호는, 우선 일행을 데리고 이동을 시작했다.

소진과 영한이 빠진 후 모두가 한 차에 탑승을 했다.

“호오. 여기는 또 이렇게 풍경이 다르군.”

“당연하지. 가만히 있어. 애야?”

“하하. 이 몸의 몸은 애니까 말이다.”

“미친 놈…….”

“하하하…… 친구분이 한국은 처음이신가 봅니다?”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세은을 대신해 그레모리가 대답했다.

“그렇다.”

당당한 하대에 이지호의 표정에 다시 짙은 당황이 그려졌다.

“하하…… 그런데 한국어를 정말로 잘하십니다. 혹시 조상 중에 한국인이라도 있으십니까?”

“한국어라…… 읍!”

그레모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된 세은이 빠르게 손을 들어 그레모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냥 천재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세은이 천재라고 하면 정말로 천재일 게 분명했다.

원래 천재들은 다 어딘가 나사 하나씩이 빠져 있는 것 같단 사실을 상기해 낸 이지호가 그레모리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퉤! 이게 무슨 짓이야? 그 더러운 손……. 읍!”

세은의 손에 입이 막혔던 그레모리가 매우 불쾌해하며 세은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지호 앞에서 자꾸 이런저런 소리를 떠들어 봤자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세은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그레모리의 입을 막았다.

“우엑…….”

그레모리는 당장이라도 토를 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했다.

세은이 그런 그레모리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제발 내릴 때까지 만이라도 가만히 좀 있어.”

“우우욱…….”

그러나 이미 헛구역질을 하던 그레모리는 더 이상 말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

이내 그레모리의 헛구역질을 그쳤지만, 방금 전의 불쾌한 경험 때문인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차는 어색한 침묵을 가득 싣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끼익―

“자, 다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세은은 인사를 마치고 먼저 위로 올라갔다.

그레모리가 재빨리 그런 세은을 뒤따라 이동했다.

이지호는 여느 때처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채연을 붙잡아 궁금한 것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채연아. 대체 저 꼬마는 뭐야?”

“저도 잘 몰라요.”

“왜 잘 몰라?”

“러시아에서 일을 처리하러 간 오빠를 갑자기 찾아왔거든요. 오빠 말에 따르면 아주 대단한 마법사에 친구라는데, 저렇게 어린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가 있나 싶고…….”

“내 말이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열 살 정도로 보이는데 어떻게 친구라는 거야?”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으으으. 저 인간만 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니까. 이건 나이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태어난 시간상의 문제잖아.”

“아하하. 그렇죠.”

“그렇다고 세은 씨랑 관련된 일을 그냥 무시할 수도 없으니…….”

이지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깊은 한숨을 쉬며 채연에게 부탁했다.

“혹시 다른 정보 알게 되면 꼭 좀 알려줘.”

“아, 네. 가능한 거면 전달할게요.”

“그래그래. 고마워! 꼭 좀 부탁할게.”

“네. 들어가세요.”

“그래, 다음에 봐.”

채연과 짧은 대화를 마친 이지호가 차를 타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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