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26. 마왕 그레모리(3)
“오빠 같이 가요!”
모스크바에 도착한 일행은 잔뜩 들뜬 표정으로 관광을 위해 움직였다.
세은이 같이 가자던 일행의 권유를 거절했다.
“아니야, 여기서 쉬려고.”
“여기까지 와서요? 그러지 말고 붉은 광장이라도 같이 가요. 아니면 성 바실리 성당이 궁금하지도 않아요?”
“괜찮아. 할 일이 있어서.”
“그럼 좀 기다릴까요?”
“아니야. 잘들 놀다 와.”
“그래도 같이 가면 더 재밌을 텐데…….”
“됐어. 정말로 괜찮으니까 다녀와.”
“……네.”
단호한 세은의 거절에 채연이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탁―
일행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세은은 소파에 늘어지게 누웠다.
딱히 크게 피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몸을 뉘이니까 편안하고 좋았다.
그레모리에게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지만, 당장 움직인다고 게이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이트는 아직 많이 남았고, 자신이 전부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를 얻어서 알려주는 게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레모리를 상대하려면 일단 푹 쉬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다 그레모리가 세은에게서 받은 총을 분해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지금 대화를 시도해도 좋은 정보가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달칵― 달칵―
배정된 숙소 중 하나의 방에서 계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모리가 열심히 총을 분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본다고 아려나.”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현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상당한 과학적 지식의 요체가 들어가 있는 것들이다.
총만 하더라도 그 용도와 제조국에 따라 들어간 원천 기술이 달랐다.
“알아서 하겠지.”
물론 세은이 그레모리와 얘기를 해서 가장 궁금한 게 무엇인지 알아내서 도와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일단 지금 가지고 있는 총에 대한 분해와 분석이 끝나야 다른 것에 눈을 돌릴 테니까.
그레모리가 그대로 총에 빠지면 그냥 총에 대해 알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굳이 세은 자신이 그레모리를 위해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레모리가 뭘 하든, 그건 알아서 할 일.
지구를 정복한답시고 세계에 피해만 안 주면 되는 일이었다.
“언제쯤 끝나려나.”
탕! 탕!
계속해서 그레모리가 총을 분해하는 소리가 숙소를 채웠다.
그러는 사이 소파에 누워 있던 세은은 천천히 잠이 들었다.
* * *
늦은 밤, 일행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숙소는 어둑했다.
실컷 총기를 분해해 보고, 이리저리 만져보던 그레모리는 달이 뜨고 나서야 방에서 나왔다.
“자나?”
그레모리가 소파에 누워 색색거리며 고른 숨을 쉬고 있던 세은을 보며 중얼거렸다.
할짝.
무방비한 상태의 세은을 보며 그레모리는 자신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렇게 좋은 기회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비록 잠이 들었다고는 해도,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가면 반응할 게 분명했다.
정상적인 상태의 그레모리라면, 자고 있는 세은이 눈치채기 전에 목숨을 거둘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상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맹약까지 걸려 있는 상태.
그레모리는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천천히 소파로 다가갔다.
“다 끝났냐.”
팔로 눈을 가리고 자고 있던 세은이 물었다.
누군가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잠이 깬 탓이었다.
“안 어울리게 웬 잠?”
“여기는 전장이 아니니까.”
세은은 졸음이 담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참. 세상 말세다.”
“뭐가?”
갑자기 튀어나온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물었다.
“내가 같은 방에 마왕 새끼를 두고 잠을 자는 날이 생기다니.”
“내가 할 말이야, 이 미친놈아. 왜 또 갑자기 시비야?”
“그냥. 가서 불이나 켜.”
“불?”
화륵―
동시에 그레모리의 손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 말고 미…… 됐다. 내가 키고 말지.”
세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형광들을 켰다.
“와! 이건 뭐야? 라이트 마법은 아닌 거 같은데?”
“과학.”
“신기해, 신기해. 따라오기를 잘했어. 정말 신기해.”
그레모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마법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되지?”
“전기를 이용하는 거지.”
“전기?”
세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현대 사회에 대한 기반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설명하려니 막막했다.
“나중에 책 가져다줄 테니까 알아서 읽어.”
“지금은?”
“나중에. 여기 우리나라 아니야.”
세은은 당장이라도 배우고 싶어 하는 그레모리를 진정시켜 말했다.
‘초등 교과서부터 고등 교과서까지 쭉 가져다주면 되겠지.’
생각하다 보니 불쑥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게이트를 생각하며 세은이 다시 짜증을 꾹 눌러 내렸다.
“하여튼 약속은 지킬 테니까. 이제 게이트에 대해서 말해봐.”
“어디부터?”
“게이트가 왜 생기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데?”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찌릿한 눈빛을 보냈다.
“마왕들이 없는 게이트가 왜 생기는 지 알려준다며. 장난해?”
“내가 언제 그랬어?”
“하아…….”
세은은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게이트에 대해 알려준다고 했지. 왜 생기는지 알려준다고 한 적은 없다.”
치익―
당당한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은 우선 냉장고에서 음료 한 캔을 꺼내 마셨다.
시원한 음료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정신이 조금 더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그럼 다른 질문. 마왕이 없는 게이트는 왜 생기는 거야?”
“흐음. 이건 추정인데 괜찮겠어?”
“뭐라도 좋으니까 말해봐.”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게이트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오피뉴와 마계가 연결된다는 말은 했지?”
“어.”
“그런데 이게 잘못되면 오피뉴랑 여기랑 연결이 되는 거 같아.”
“그게 가능해?”
“안 될 게 뭐 있어?”
“그렇기는 한데…….”
“하여튼 이것도 나름 마력을 지닌 몬스터들이 있는 곳에 연결이 되는 것 같아. 마력에 반응하는 것 같기는 해.”
“하긴, 평범한 몬스터만 있는 곳이 없었지.”
여태까지 게이트는 다 네임드로 취급받는 보스 몬스터들이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해 낸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어.”
“뭔데?”
세은이 불현듯 떠오른 의문점을 그레모리에게 물었다.
“네 말대로 게이트가 차원을 연결하는 곳이라면, 왜 게이트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가 없는 거지?”
연결되어서 몬스터들이 넘어왔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일방통행만 할 수 있다면 게이트가 아니라 소환진이라고 불려야 마땅했다.
그러나 의외로 이 문제는 그레모리가 시원하게 답변했다.
“이건 확실해. 나도 처음에 넘어왔을 때 통로가 좀 유지되다가 어느 순간이 되니까 사라지더라.”
“그러니까 대체 왜?”
“야. 차원이랑 차원을 잇는 게 쉬운 줄 알아? 너도 알 거 아냐, 통로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건 아는데 왜 그럼 지구랑 게이트는 계속해서 유지돼?”
“내 생각에 이건 통로가 아니라, 이동 수단 같아.”
세은의 질문에 그레모리가 그동안 알아낸 것을 풀었다.
집중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그레모리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마치 이 세계 있는 무엇인가가 이쪽으로 부르는 것 같단 말이지. 오피뉴에서 여기로 말이야. 마계는 우연히 그 사이에 낀 것 같고.”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여기는 마법이라고는 없는 곳이야.”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이곳에서는 마법이란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야.”
“뭐 짐작 가는 건 없어?”
“없는데. 내가 처음 여기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평소랑 똑같았어.”
“잠깐. 뭐라고?”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그의 말을 막았다.
“처음에 왔을 때만 해도 다른 점이 없었다는 거지?”
“어.”
“그때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거 아냐?”
“그렇지.”
“그럼 너 때문에 아니야?”
“왜 말이 그렇게 돼? 내가 마법이라도 쓸 수 있어야지.”
“아, 하긴. 마법도 못 쓰지.”
“못 쓰는 게 아니라 굳이 안 쓰는 건데.”
“그래, 못 쓰지.”
깐죽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날릴 뻔했던 세은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굳이 휘말려 봤자 시간 낭비였다.
세은은 감정을 진정시키고 다시 물었다.
“하여튼, 시간이 지나면 돌아가는 길이 막힌다 이거지?”
“응. 맞아. 그러니까 몬스터들의 숫자에도 한계가 있는 거야. 아니면 계속 넘어왔겠지.”
“하긴, 게이트에 있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무한한 건 아니니까.”
치익―
말을 하던 그레모리가 세은이 냉장고에서 꺼내 마신 음료에 호기심이 가는지 자신도 하나를 꺼내 캔을 열었다.
탄산이 치솟는 소리에 그녀의 두 눈이 다시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뭐, 뭐야? 물이 톡톡 쏘는데?”
“원래 그렇게 만든 거야.”
탄산음료를 마신 그레모리가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순간 질겁했다.
“원래 그렇다고? 신기하네.”
“그것도 과학의 산물이지.”
“호오. 좋아. 아주 흥미로워. 그리고 이게 들어 있던 이것! 마치 얼음 마법이라도 걸린 것 같군.”
“그것도 과학.”
“흥미로워. 정말로 너무나 진짜로 흥미로워. 이런 세계를 무작정 파괴하려하다니. 무식한 마왕 놈들.”
“자기는 마왕 아닌 것처럼 얘기하네.”
“에헤이. 중요하지 않은 사실은 넘어가자고.”
그레모리가 다시 눈을 빛내며 냉장고를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이거, 내가 분해해 봐도 되나?”
“아, 일단 하던 대화는 끝내고 해.”
“그럼 빨리 물어봐.”
그레모리는 벌써 냉장고에 한껏 정신을 빼앗긴 눈치였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 세은은 또다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체 내가 왜 이 새끼랑 맹약을 맺었을까.
도움이 되는 부분이 꽤 있었지만, 그 전에 속이 터져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여튼 그러면, 마왕은 몇 명이나 여기로 넘어온 거야?”
“글쎄? 내가 그걸 일일이 다 세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꽤나 먼저 넘어온 편에 속하기도 하고.”
“……분명히 마왕들 위치를 알려준다고 그러지 않았나? 처음에 그렇게 말한 걸로 기억하는데.”
세은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낀 것처럼 흐려졌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세은의 기색에,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그레모리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하하하. 그래도 나보다 먼저 간 애들은 알고 있지. 한 세 명 정도? 어디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좋아. 빨리 말해. 그리고 나면 냉장고 분해해도 되는지 물어봐 줄 테니까.”
“좋아. 좋아!”
그레모리가 매우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한 명은 여기서 저쪽 방향으로……”
“잠깐!”
그레모리의 설명을 듣던 세은이 퍼뜩 그녀의 말을 막았다.
“설마 전부 다 그런 식으로 설명할 건 아니지?”
“내가 여기 지리를 잘 몰라.”
“아오……”
세은의 입에서 깊은 짙은 탄식이 새나왔다.
“잠깐만 기다려.”
세은은 휴대전화를 들어 이고르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다름이 아니라. 지금 당장 세계 지도랑 나침반 좀 부탁해. 그래 지금 당장. 그리고 혹시 숙소에 있는 냉장고 좀 분해해 봐도 되나? 아, 그래. 고마워.”
달칵―
간단하게 전화를 끊은 세은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10분 뒤에 필요한 물건 가지고 온 다니까 기다려.”
“이, 이건?”
세은의 통화를 들은 그레모리가 설레는 눈빛으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그건 위치 다 확인하고 나면.”
“히잉……”
그 짧은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레모리의 작은 어깨가 아래로 축 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