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84화 (84/225)

# 84

26. 마왕 그레모리(2)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빛의 비가 내리고 있는 페름을 보며 이고르가 초조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적어도 일이 나쁘게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채연과 소진도 마찬가지로 걱정되는 눈빛으로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쾅―!

그리고 일행의 경악과 놀라움은 강 건너편에 거대한 인어가 나타났을 때 절정에 달했다.

“이, 이, 이, 인어?”

특히 이고르의 입이 커다랗게 쩍 벌어져 다물어질 줄 몰랐다.

콰앙― 쾅!

또다시 몇 번의 교전이 일어나고, 세은과 교전을 하던 인어가 갑자기 도주를 시도했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쫓아가는 세은이 보였다.

“쫓아간다!”

누가 봐도 세은이 유리해 보이는 전황의 모습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런데, 방금 저기에 웬 꼬마 하나 있지 않았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영한이 일행에게 물었다.

“응? 영한아, 무슨 말이야?”

“아니. 방금 저기서 꼬마 한 명을 본 거 같아서.”

“꼬마? 꼬마가 저기에 왜 있어?”

소진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다 큰 성인이 있다고 해도 황당할 판에, 웬 꼬마가 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아 확실하지는 않은데 분명히 구석에 애 한 명이 있었어. 아무도 못 봤어?”

그러나 일행 중 누구도 영한이 본 꼬마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히 봤는데? 머리색은 빨간색이었고.”

“그럴 리가? 잘못 봤겠지.”

“그래, 꼬마가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정말인데…….”

영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영한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강 건너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저기 있다!”

잠시 후, 인어를 쫓아 도심으로 사라졌던 세은이 혼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좋아!”

이고르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일이 처리 된 것이다.

타닥―

세은이 강을 건너오자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잘 끝났어요?”

“다 처리된 겁니까?”

세은은 고개를 끄덕여서 한 번에 대답에 답했다.

“그럼 이제 시민들의 병을 고치는 데만 주력하면 되겠군요.”

“아니, 괜찮아. 다 고쳤어.”

“예?”

순간 세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고르는 잠시 말뜻을 파악하고 난 뒤에야 다시 되물었다.

“그러니까 시민들의 병이 다 나았다는 말입니까?”

“응.”

세은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이고르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어떻게?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은이 도시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인어를 잡은 것도 모자라, 도시 전체의 병을 다 고쳤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들어가서 확인해 봐. 빨리 안정 안 시키면 다들 혼란스러워 할걸.”

분명히 사람들의 병은 모두 나았다.

그러나 본인들이 다 나은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나올 때까지는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최대한 러시아 정부에서 빠르게 도시를 안정화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했다.

“아! 알겠습니다.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세은의 말을 들은 이고르가 윗선에 의견을 묻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예요?”

채연이 세은에게 물었다.

“응. 끝이야.”

예상치 못하게 바로 러시아까지 왔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지었다.

상상하지 못한 만남이 있었지만, 적어도 게이트에 대한 소득을 얻었다는 점에서 꽤 만족스러운 일정이었다.

원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넉넉하게 한 달 정도 잡았던 일정이 거의 3주나 빨리 끝났다.

“우리 그럼요…….”

채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주일 정도 관광하다 가도 될까요?”

“관광?”

고개를 돌려 일행을 보니 소진도 채연과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영한도 내색은 안 하지만 무엇인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시간이 많이 남기는 했지.’

바로 돌아가는 게 아쉬울 만도 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거치면서 일행들이 한 것이라고는 세은을 따라 이동한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그레모리와 관련된 일도 매듭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세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세은의 대답에 채연과 소진이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영한의 얼굴에도 살짝 웃음이 그려졌다.

“세은 씨. 상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바로 시내로 들어가서 확인하랍니다. 안에 시장을 비롯해 관리들이 그대로 있으니 전부 다 나았다면 통제는 어렵지 않을 거라 합니다.”

그 사이에 상부와 연락을 마친 이고르가 다가왔다.

“혹시나 있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같이 들어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고르의 부탁에 세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레모리와 다시 합류를 해야 하니 바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고르는 세은의 허락이 떨어지자, 별다른 언급이 없이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병에 감염된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지도 모르니,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전염병이 다 사라졌다는 명령은 받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엔 그늘이 가득했다.

“바로 시장 관저로 이동한다.”

“썰!”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신속하게 이동했다.

시장 관저는 도시의 중심부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탕탕―

“계십니까?”

“누, 누구요?”

현장 지휘관이 시장 관저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불안감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장님 맞습니까?”

“마, 맞소만.”

“크렘린 궁에서 페름의 전염병을 모두 박멸시켰습니다. 시민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시장님이 나설 차례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반백의 시장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현장 지휘관에게 다시 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기현상에 기반 하고 있는 전염병 사태였기 때문에, 운 좋게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도시는 안전합니다.”

“정말이오?”

시장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현장 지휘관의 모습에 결국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태가 진압된 것이 아니라면, 군인들이 이렇게 방역 장비를 갖추지 않고 들어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소. 내 옷을 입고 나오리다.”

“시의 관리들에게도 전파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시오.”

시장이 환복하기 위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몇몇 군인들이 따로 지시를 받아 무작위로 가정집에 찾아가서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집도 문제없습니다.”

“여기도 다 나았습니다.”

“현재 일반 가정집 30군데 확인. 모두 몸에 이상 없습니다.”

“완벽하군.”

짝짝.

이고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그 짧은 시간에 원흉을 제거한 것도 모자라서 이 대도시의 시민들을 모두 치료했다.

과연 꼭 붙잡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붙잡는 것은 무리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친근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정말로 대단합니다.”

이고르가 당장이라도 세은의 두 손을 붙잡아 흔들고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세은으로선 별거 아니란 표정으로 가만히 그런 그의 경탄을 받아주고 있었다.

터벅터벅―

“정…… 응?”

지휘관들 쪽으로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병사가 무기를 들어 경고를 하려다가 손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병사의 앞엔 열 살 정도로 보이는 빨간 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꼬마야. 지금은 집에서 나오면 안 된다. 얼른 집으로 들어가.”

“무슨 일이야?”

“아, 어린아이입니다.”

“뭣?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

“알겠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병사가 지휘관과 얘기를 하는 동안 태연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꼬마야 마음대로 들어가면! 어, 어?”

쿵―

재빨리 다가가 소녀를 붙잡으려던 병사는 소녀를 잡지 못하고 바닥에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그 소란에 주변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꼬마야! 여기는 마음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란다. 얼른 돌아가!”

병사 한 명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했다.

그러나 소녀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로 그런 병사를 바라보았다.

“……아, 천한 것들을 치울 수가 없으니 답답해 죽겠네.”

툭.

“그게 무슨 말……. 으아악!”

소녀의 혼잣말에 눈을 부라리며 다가가던 병사가 갑자기 벽으로 날아갔다.

털썩―

“아야야…….”

“그렉! 괜찮아?”

벽에 부딪힌 병사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천한 얼굴들 치우고 시렌 데려와.”

소녀의 태연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에 모든 병사들이 순식간에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흐음. 안에 있는 것 같으니 그냥 들어가면 되려나.”

“움직이면 쏜다!”

“오. 저 막대기는 뭐지? 신기하네 하나 뺏어도 되겠지?”

소녀, 그레모리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저, 정말로 쏜다!”

그레모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열 살의 소녀의 외향 때문에 병사들은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뭐해, 이 병신들아! 쏴!”

개중 가장 계급이 높은 병사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쏘라고! 외향으로 판단하지 마!”

“에잇!”

탕탕탕―

“히익?”

그러나 그레모리는 태연하게 손을 들어 총을 막아냈다.

“호오. 이거 꽤나 쓸 만한데? 좋은 살상무기야. 여기 인간들은 전쟁을 어지간히 좋아하나 봐.”

그레모리가 더욱 눈을 빛내며 한 정의 총을 빼앗기 위해 움직였다.

“하아……. 그만해.”

어느새 다가온 세은이 한숨을 쉬며 그레모리에게 말했다.

“아, 시렌? 잠시만 나 저거 하나만.”

“나중에 줄 테니까, 사고 치지 말고 따라와.”

“뭐 그렇다면야.”

그레모리가 어깨를 으쓱하고 세은 쪽으로 움직였다.

갑작스런 소란에 뒤늦게 따라 나온 이고르가 물었다.

“아, 아는 사람입니까?”

“응.”

그레모리가 설마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올 줄 몰랐던 세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레모리가 먼저 나서서 세은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나 마법사인데. 시렌 친구야.”

“아, 마법사셨군요. 그런데 시렌……?”

낯선 이름에 이고르가 의문을 품었다.

“내 영어 이름.”

그레모리가 정한 역할을 파악한 세은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아하! 그렇군요. 그런데 이분이 어떻게 이곳에?”

“여기 일이 생겼다고 해서 와봤는데 얘가 오더라고.”

그레모리의 말에 이고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랬군요. 세은 씨의 친구라면 상당한 실력자시겠습니다.”

“그건 그렇지.”

세은이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고르는 세은의 한숨을 듣지 못하고 상당한 실력자라는 말에 반색하며 말했다.

“아, 이거 저희가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세은은 그레모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얌전히 따라와. 그리고 시렌이라고 부르지 마.”

“엥? 그럼 뭐라고 불러?”

“세은이라고 불러. 원래 내 이름이니까.”

“아하! 그래그래, 하여튼 나 아까 그 신기한 막대기 하나 주는 거 잊지 마.”

“알았으니까, 닥치고 따라와.”

그레모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일행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 소동은 뭐예요?”

“어? 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는 일행들과 달리, 그레모리를 발견한 영한은 손가락질을 하며 그녀를 가리켰다.

“아까 세은이 싸울 때 근처에 있던 꼬맹이?”

“아직도 그 얘기야?”

소진이 핀잔하듯 말했다.

그러나 영한이 이번엔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봐봐! 머리색도 빨간색이잖아.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니까?”

“흐음?”

영한의 말에 소진과 채연의 시선이 그레모리에게로 향했다.

“뭘 봐?”

“…….”

그레모리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기분 나쁜 티를 역력히 내며 말했다.

약한 인간들이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자신을 쳐다보니 기분이 심히 좋지가 않았다.

영한의 말을 들은 세은은 방금 전 만들었던 설정을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아, 내 친구인데. 마법사야. 이래 보여도 실력도 좋으니까 잘 지내.”

“친구라고요?”

“친구? 저렇게 어린애랑?”

채연과 소진의 경악에 그레모리가 외쳤다.

“내 나이가 몇…… 읍!”

세은이 손을 내려 그레모리의 입을 막았다.

“하여튼, 그렇게 돼서 한동안 같이 다닐 거야.”

“오빠 외국 한 번도 안 나가본 거 아니었어요? 외국인 친구가, 그것도 이렇게 어린애를 어떻게 알아요?”

누가 봐도 합당한 의심이었지만, 세은은 더 이상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해봤자 허점만 더 드러날 뿐이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하여튼 한동안 같이 다닐 거야. 잘됐네. 재호 씨 마법 수련시키면 되겠다.”

급하게 둘러댄 말이지만 실제로 그레모리가 재호의 마법을 지도해 주면 상당한 발전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시켜먹어야지.’

세은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일행을 두고 이고르에게 말했다.

“혹시 총기 한 정만 줄 수 있으면 부탁합니다.”

“예?”

대체 갑자기 총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황당한 표정의 이고르였지만, 이내 부하를 시켜 총 한 정을 가져다주게 지시했다.

세은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줄 수 있었다.

옆에서 세은의 말을 들은 그레모리가 매우 신나고 기대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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