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26. 마왕 그레모리(1)
“제까짓 놈이 용서하지 않아 봤자 어떻게 하겠다고?”
베파르의 절규를 들은 그레모리가 가소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자, 소멸시키지 않겠단 맹약은 지켰으니 빨리 꺼져.”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대답했다.
“거 참. 성격도 급하네.”
“우리 사이에 더 볼일이 남아 있나?”
“글쎄? 그건 앞으로 우리하기에 달린 거 아닌가?”
“나는 딱히 더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에이. 그러지 마. 서로 궁금한 게 있을 거 아냐. 나는 지금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다고.”
“필요 없어.”
“정말로?”
그레모리가 커다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세은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열 살짜리 어린 소녀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바라보는 모습을 봤다면. 귀엽다는 말이 자동으로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본질을 알고 있고 있는 세은은 구토가 치밀어 오를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얼굴 치워. 안 어울리게 순수한 표정 짓지 말고.”
“에이. 나만큼 순수한 마왕이 어디에 있다고?”
“진짜 죽는다.”
“어휴. 그러게? 이러다 진짜 죽게 생겼는데 맹약을 해버려서 죽지도 못하네. 그치? 아쉽다아.”
쉬지 않고 깐죽거리는 그레모리의 모습에 세은이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맹약을 어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레모리는 더욱 가열하게 세은을 놀리기 시작했다.
“우웅…… 연약한 소녀한테 그런 야만스러운 표정을 짓다니, 엄마한테 가서 이를 거야.”
부들부들.
세은의 주먹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것도, 순전히 피의 맹약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레모리가 그나마 마왕 중에서는 온건파여서 가능한 일.
다른 마왕이었다면 맹약이고 뭐고, 목부터 쳤을 게 분명했다.
겨우겨우 몇 가지 얇은 끈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이런 식으로 나오지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입 다물어.”
결국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은이 경고했다.
만면에 가득 웃음을 띤 채 장난을 치던 그레모리는, 세은의 인내심이 한계에 온 것 같자 까불거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으음. 여기까지 할까?”
그레모리라고 세은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이렇게 맹약을 맺었을 때 말고는 이런 식으로 대놓고 조롱을 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더 했다간 정말로 대화를 아예 못할 것 같은 상황.
그레모리가 목적을 위해 쾌감을 주는 행동을 멈췄다.
“아, 그러니까 서로 궁금한 것 좀 물어보고 공유하자고. 정보가 필요하잖아?”
“…….”
세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긋이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딱 보니까 여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말이야.”
그러나 세은의 입은 묵묵부답.
그 어떤 말도 세은의 입에선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 뭐라고 말 좀 해봐. 인마! 나 혼자 말하잖아 자꾸. 숙녀를 혼자 말하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하! 숙녀?”
그제야 세은의 입이 열렸다.
“그래, 숙녀.”
그레모리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며 말을 이었다.
“여행 좀 하고 싶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정보 공유 좀 하자.”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처음으로 세은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그러나 이어진 세은의 말에 잠시나마 환해졌던 그레모리의 표정을 다시 어두워졌다.
“그런데 너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여행할 거면 이제 그냥 하면 되잖아? 왜 굳이 정보 공유가 필요하지?”
“아, 그 이유를 말해줄 테니까 정보 공유를 하자니까.”
“먼저 말해.”
“아오. 이 이유 자체가 중요한 정보라고.”
“내가 먼저 말하란 말이네.”
“그치. 지금은 네가 강자잖아.”
“원래 내가 더 세.”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이 미친 새끼야.”
애초에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뭉쳐 있는 사이인지라 대화를 진전시키는 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아쉬운 쪽은, 바로 그레모리였다.
“아! 알았어. 그럼 내가 말해주는 이유가 네게 도움이 되는 정보면, 내 질문에도 대답해 준다고 너네 신한테 맹세해.”
“흐음.”
그레모리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세은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좋아. 네가 전해주는 정보가 유용하다고 판단되면 네 질문에도 대답해 주지. 에일린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그래, 그럼 이제부터 이유를 말해줄게.”
흠흠.
목을 가다듬은 그레모리가 말을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는 여러 개의 게이트가 연결되어 있어. 그리고 마왕들과 연결된 게이트도 꽤 되지.”
“알아.”
“몇 개는 없어지기는 했지만…… 그건 이번에 너를 만나서 어떻게 된지 알았고. 하여튼 마왕들은 마법이 없는 이곳을 먼저 식민지화해서 마기를 공급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를 바라.”
그레모리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처음에 만들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알잖아?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인간도 많고 땅도 넓으니 아주 딱 알맞은 장소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문제?”
“그래 문제, 우리만 이곳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야. 마계가 갑자기 이곳과 연결된 것처럼, 오피뉴가 갑자기 마계와 연결되기 시작했어.”
“오피뉴가?”
“그래, 그리고 마계와 연결됐으니 교단이 어떻게 나올지는 당연히 알겠지?”
“마계의 문을 닫겠다고 난리를 치겠군.”
“맞아. 교단의 인원 중에 네가 안보여서 죽었나 싶었는데 여기 있다니, 조금 실망이야. 아니, 하여튼 그래서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어도 막 열 수가 없는 상태야.”
“그래서?”
“그래서 마계가 지금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뉜 거야. 이곳을 먼저 점령해서 테라포밍을 하고 오피뉴를 칠 것인가. 아니면 뒤가 안전하게 오피뉴를 먼저 치고 이곳을 점령할 것인가.”
“그래서, 너는 오피뉴를 먼저 치자는 쪽이다 이거야?”
“그래, 굳이 더 위험 부담이 큰 쪽을 등 뒤에 둘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이 세계는 참 신기해. 마법과 오러가 없는 대신 신기한 게 많아.”
“그래서, 나한테 유용한 정보는?”
“아, 기다려 봐. 지금 얘기할 테니까.”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여튼 그래서 이곳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마왕들도 의견 통합이 안 되서 아직 게이트를 안 열고 있어. 한 번 열면 마계와 연결이 희미해지는데다가, 다시 돌아가려면 다른 마왕들이 도와줘야 하거든.”
“그래서?”
“어차피 베파르 그 새끼는 한동안 쥐 죽은 듯이 회복하면서 지내야 할 테니까, 소식을 전하지 못할 거고. 네가 나를 도와주면 나도 널 도와줄게.”
“뭘 도와?”
“마왕들 추방하는 거.”
“그걸 돕는다고?”
세은의 두 눈에 의심이 가득 깃들었다.
그런데 그레모리가 믿어달라는 듯한 눈으로 세은에게 말했다.
“응. 어차피 네가 다 죽일 거 아냐? 그럴 바엔 죽이게 두는 것보다 추방시키는 게 더 낫지.”
“그러게. 죽이는 게 더 나은데, 내가 왜 추방을 시켜야 하지?”
“안 도와주면 인간들이 많이 죽을 테니까?”
협박이 섞인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레모리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얘들이 왜 이제 활동을 시작하겠어? 이미 성격 급한 애들은 초반에 다 넘어와 있다고. 내가 어디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테니까. 너도 나한테 정보 좀 줘.”
“조건은 소멸이 아니라 추방이겠군.”
“당연하지.”
그레모리의 제안을 들은 세은이 검지를 들어 자신의 미간을 쓱쓱 문질렀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것인가?
그러나 섣불리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레모리는 세은이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덧붙였다.
“뭘 그렇게 고민해? 지금도 봐. 내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쉽게 베파르를 추방할 수 있었겠어?”
“좀 가만히 있어.”
“아,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 피의 맹약까지 맺었잖아. 여기 인간들한테 위해 안 끼친다고. 이 답답한 새끼야!”
결국 성질이 폭발한 그레모리가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그제야 세은은 맹약의 내용을 다 시 떠올렸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마왕들에 대한 인식이 고정되어서 맹약을 걸어놓고도 의심부터 들었다.
“흐음. 그렇기는 한데. 나중에 마계 돌아가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내가 미쳤냐? 베파르 때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선 거고. 다음부터는 안 그럴 거야.”
결국 세은은 그레모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맹약까지 걸린 이상 허튼짓을 할 수가 없으니까.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지. 대신 허튼짓하기 만해봐.”
“너야말로 약속 지켜 에일린의 애완견아.”
세은은 그레모리의 욕설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자, 그래서 그렇게도 궁금해하는 게 뭔지나 들어볼까?”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좋아! 너는 어떻게 여기에 있지?”
세은은 어깨를 작게 으쓱거렸다.
“여기가 내 고향이니까.”
“여기가 고향이라고?”
“그래.”
“아니, 그런…… 아냐. 에일린 그년이라면 가능하지. 으음…… 그래서 한동안 마신의 힘이…….”
세은의 대답을 들은 그레모리가 한동안 혼자서 중얼중얼거렸다.
“질문 끝이야? 그럼 비켜. 사람들 불러서 도시 정리하게.”
“아! 기다려.”
그레모리가 잠시 추리하는 것을 멈춘 채 다시 세은에게 질문을 던졌다.
“좋아. 그럼 다음 질문. 여기는 대체 어떤 세상이지?”
“질문이 왜 이렇게 추상적이야?”
“아, 음. 그러니까 어떻게 마법이 없이도 신기한 일들이 많지?”
“과학이라는 거지.”
“과학?”
“그래, 과학.”
“그거 나도 배울 수가 있나?”
“그걸 배운다고? 왜?”
마법이라는 편리한 이적이 있는데 과학을 배워?
세은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물론 엄청나게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레모리가 다루는 마법은 그것과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하지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레모리의 눈은 호기심과 지적 탐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 배우려면 안 될 건 없지만.”
“가르쳐 줘!”
“나는 못 가르쳐 줘.”
신이 나서 소리치던 그레모리에게 세은이 말했다.
“이것도 분야가 굉장히 광범위하단 말이야. 배우고 싶으면 알아서 공부를 하든가.”
“아, 매정하네. 좀 도와줘.”
“배워서 어디다 써먹게?”
“아니? 꼭 써먹으려고 배워?”
정론적인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더 많은 정보 줄 테니까 좀 도와줘.”
“정보를 더 준다고?”
“뭐, 기밀은 주지 못해도. 게이트라는 공간에 대해 궁금하지 않아?”
그레모리는 용케 세은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기는 하지.”
“그럼 그것도 서로 교환하자.”
“……잘못 데리고 가면 골치 아픈데.”
게이트에 대한 정보에 상당히 혹한 세은이었지만, 갑자기 전염병이 돌던 도시에 들어가서 열 살짜리 소녀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리고 심지어 소녀가 한국어를 아주 능통하게 한다는 사실까지.
물론 세은이 데려간다고 하면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상당히 의문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 그리고 한국에 가면 우리 신도 있단 말이야. 너 걔 때문에 내 근처에 살지도 못해. 나야 마기에 저항력이 있으니까 괜찮지만. 걔는 아주 예민하다고.”
“지금 마기가 얼마나 된다고 그래?”
“우리한테나 별로 안 되지. 걔는 이제 막 신도가 된 애야.”
“거 참. 여기서도 전도해? 아주 신실한 개새끼네.”
“휴우…….”
가리지 않고 말을 던지던 그레모리의 언행에 세은이 깊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게이트에 대해 알아내야 대응하기 편해졌다.
적어도 마왕이 없는 게이트는 연결이 되지 않게 할 방법을 그레모리에게서 알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지금까지 들은 말대로라면 마왕이 없는 게이트가 연결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세은은 평안한 삶을 위해 기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한 번 그레모리에게 말했다.
“하여튼 마기 때문에 안 돼. 방법 생각해 내면 거래에 응하지.”
“좋아. 그 까짓것 뭐. 조금만 기다려 봐.”
“그래. 그럼 어디 구석에 가서 하고 있어. 나는 여기 일 다 끝났다고 전해주러 갈 테니까.”
“그래, 다녀와.”
타닥―
세은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날려 이고르가 기다리고 있는 강 건너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