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82화 (82/225)

# 82

25. 마왕 베파르(2)

도심 한가운데로 이동한 세은이 그레모리에게 명령했다.

“여기다가 증폭 마법진 좀 설치해.”

“어느 정도나?”

“도시 한 번에 정화 가능할 정도.”

“제정신이야? 지금 내 힘으로는 버거운데다가 아무리 너라도 이 도시를 한 번에 정화하면 힘이 다 빠져서 베파르가 나와도 잡지도 못해.”

“그렇다고 집집마다 돌면서 치료 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한 번에는 무리지.”

“됐어. 베파르도 정상이 아니니까 이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 안 도망가고 덤벼들지.”

“예나 지금이나 미친놈이네 이거.”

세은의 담담한 말에 그레모리가 한숨을 쉬었다.

“뭐, 네가 죽으면 나야 좋긴 한데. 그럼 이 세계를 구경할 시간이 대폭 줄잖아.”

“그만 주절거리고 빨리 설치해.”

“예이예이.”

그레모리는 세은을 설득하는 걸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러곤 도시 가운데에 있는 광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휘몰아쳤다.

세은이 사용하려면 마기를 배제한 순수한 마력을 이용해서 마법진을 구성해야 했다.

“흐읍.”

가벼운 기합소리와 함께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레모리에게서 나온 마력은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어서 공간을 재배치했다.

지니고 있는 육체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조절을 하다 보니 마법진의 연성은 평소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새하얗게 질린 것을 목격한 세은은 차분히 연성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아, 이 몸으로 하려니까 힘드네.”

그레모리가 투덜거렸다.

“그런데 왜 그 몸이야?”

“왜? 아쉬워?”

세은의 물음에 그레모리가 능글맞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하긴, 원래 몸이 더 늘씬하고 매력이 넘치는데 말이야.”

피식.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자신도 모르고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비웃었지?”

“응.”

“됐다. 하긴 에일린의 개가 아름다움을 알겠어?”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말인데 그거.”

“닥쳐.”

날카롭게 일갈한 그레모리가 매우 기분 나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야. 다 했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해.”

“하여튼 아름다움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끼.”

그레모리가 다 들리도록 투덜거리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세은이 그레모리의 마력을 품어 웅웅거리고 있는 마법진 위로 성큼 올라섰다.

마법진 위로 올라간 세은이 신성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천벌을 사용할 때와 같은 거대한 신성력이 세은의 몸에서 천천히 뿜어져 나왔다.

세은의 몸에서 솟아 나온 신성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옆에서 보고 있던 그레모리가 인상을 더욱 찌푸리며 마법진에서 한참을 떨어져 있었다.

현재 그녀의 상태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었다.

치이이잉―

세은이 쏟아내는 신성력을 한계까지 받아들인 마법진이 울음을 토해내었다.

마법진은 더 이상 신성력을 흡수하지 못하고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과하게 공급이 되어 밀려나는 신성력들이 세은의 주변을 하얀 안개로 뒤덮인 것처럼 만들었다.

그렇게 마법진이 쏟아내는 신성력이 점차 주변을 밀도 있게 채우고 있을 때, 세은이 드디어 시동어를 읊었다.

“에일린. 리커버리.”

파아악!

시동어가 끝나기가 무섭게 마법진에서 신성력들이 튀어나왔다.

꾹꾹 눌러서 압축되어 있던 신성력들은 마치 용수철에 튀기기라도 한 듯 빠른 속도로 사방팔방 도시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퍼엉―

마치 떨어지는 유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사방으로 퍼진 신성력들은 어느 순간이 되자, 가벼운 폭발음을 내며 엷게 흩어져서 도시를 뒤덮었다.

순식간에 도시의 하늘 전체가 신성력으로 물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하얀 안개가 뒤덮은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이었다.

후두둑―

그리고 이내 넓게 퍼졌던 신성력은 가벼운 여우비처럼 투둑거리며 도시를 적셨다.

베파르의 권능으로 오염됐던 도시가 서서히 정화되는 게 느껴졌다.

“아, 진짜, 기분 더럽다. 야 이씨.”

그레모리가 한구석에서 힘겹게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마법진으로 인해 증폭된 신성력은 그레모리에게 상당한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했다.

“아, 이거 좀 어떻게 해봐!”

계속 되는 그레모리의 신경질에 세은이 몸을 틀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이는 그레모리의 얼굴을 마주한 세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쩔 수 없지.”

“막을 수 있잖아. 좀 막아봐!”

“내가 왜?”

“아, 시발 진짜!”

아주 어린 소녀의 입에서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오던 모습은 매우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세은은 다시 한 번 어깨를 들썩이며, 신성력으로 작은 원반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 위로 집어 던졌다.

그레모리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은 원반이 쏟아지던 신성력의 비를 흡수해서 막아주었다.

“후. 이것도 기분이 더럽기는 한데 훨씬 낫네.”

그레모리가 그제야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에 신성력의 비가 천천히 그쳐가고 있었다.

“베파르는 아직 움직임이 없나?”

“너 같으면 지금 나오겠냐? 이 빌어먹을 비가 그쳐야 나오겠지.”

“하긴…… 그래도 혹시나 이걸 막으러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 보네.”

“괜히 모험하느니 기다리는 게 낫지.”

세은은 신성력의 비를 맞으며 강변으로 이동했다.

“야! 어디 가?”

“강에.”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그레모리를 두고 세은이 혼자서 이동했다.

사실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탁―

세은의 발걸음이 멈췄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대기 중에 신성력이 충만한 상태이다 보니 강에서 마기가 너무 선명하게 전달되어 왔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파아앗―!

세은이 혼잣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물에서 공격이 튀어나왔다.

탕―!

세은은 급하게 방어막을 생성해 공격을 막아내었다.

쩌적―

공격을 한 번 막아내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방어막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충돌하면서 허공에 빗방울처럼 비산하는 신성력과 마기가 보였다.

촤아악―

동시에 강물이 위로 솟구치며 익숙한 실루엣의 존재가 튀어나왔다.

“시렌 이 개놈!”

인어의 몸을 가진 마왕, 베파르였다.

한 손에 삼지창을 들고 있던 베파르는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성력의 비가 강물에 흘러 들어가 힘을 회복하고 있던 베파르에게도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우리를 방해하다니!”

“너희들이 내 휴식을 방해하는 거지. 말을 똑바로 해 물고기 새끼야.”

“개소리 마라!”

어느새 신성력의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베파르가 먼저 강물을 방어막으로 두르고 그대로 세은에게 돌진했다.

세은은 신성력을 방패로 만들어 베파르의 공격을 비껴내었다.

콰쾅!

“흐음, 힘이 좀 부족하기는 하네.”

“그럴 줄 알았다.”

비껴내는 것으로 겨우 베파르의 공격을 막아낸 세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느새 뒤따라왔는지 뒤에서 그레모리가 얄밉게 세은을 놀렸다.

“그레모리!”

한발 늦게 그레모리를 발견한 베파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에일린의 개와 함께 있다니! 마계를 배반한 것인가!”

“무슨 소리야?”

그레모리가 새끼손가락을 귀를 가볍게 파냈다.

“나는 너를 살리려고 하는 거라고? 단순히 추방으로 합의 봤으니까, 얌전히 마계 가서 머리나 식히고 있어.”

“개소리!”

베파르를 분노에 차서 역정을 퍼부었다.

“아무리 우리의 뜻이 달랐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에일린의 개에게 붙을 수 있느냐, 그레모리!”

“귀 아프니까 작게 말해 미친놈아. 너 솔직히 이 새끼 이길 수 있어? 없잖아?”

담담한 그레모리와 달리, 베파르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크으으으! 마계의 수치다! 이 일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좌시 안 하면? 뭐? 죽이기라도 할 거야?”

마계의 율법은 엄격하다.

같은 마왕끼리는 서로 공격을 할 수 없는 것이 마계의 오래되고 권위 있는 율법이었다.

피의 맹약에 의해 그레모리가 베파르를 단순히 ‘추방’에 그치게 하려는 사실만 확인되면, 그레모리를 건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싸우다가 한눈파네.”

세은은 베파르가 그레모리에게 시선을 빼앗긴 틈을 타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들이치는 세은의 공격에 베파르가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베파르가 수세에 몰린 상황을 놓치지 않고 세은이 연이어 공격을 퍼부었다.

방금 전에 도시를 정화하면서 신성력을 많이 소모한 만큼 최대한 간결한 공격으로 베파르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멀쩡한 상태가 아닌 베파르로서는, 지금의 공격도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파앗―!

강까지 밀려난 베파르가 권능을 사용해 강물을 끌어올렸다.

“아직도 그 버릇 못 버렸네.”

세은은 강물이 끌어올려지는 틈을 타 베파르의 울대를 찔러 들어갔다.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세은의 공격을 본 베파르가 검게 변한 얼굴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때문에 무기의 형태를 갖추던 강물이 부셔져 다시 강으로 돌아갔다.

“너 예전에도 내가 그랬지? 나랑 싸울 때는 그 기술 소용없다고.”

“헛소리 마라!”

베파르의 권능은 다수를 상대하기에는 아주 좋은 능력이었으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과 일기토를 할 때 상당히 불리한 점이 많았다.

실제로 마왕과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면 마기를 부여해 물의 성질을 바꿔야 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세은 정도의 실력자가 베파르의 집중을 흐트러트리면 무효화가 되는 단점이 있었다.

단 몇 초간이지만, 그 빈틈을 노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야! 살살 좀 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레모리가 소리쳤다.

같은 추방이어도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입고 마계로 역소환되는지도 중요했다.

“내가 왜?”

그러나 세은은 그런 사정을 봐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가볍게 그레모리의 말을 무시한 세은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휘익―

세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베파르가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세은은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겠단 기세로 바로 그를 따라 달려들었다.

세은의 첫 번째 공격을 어떻게든 피한 베파르가 난처한 표정으로 강물을 끌어들여 방패로 만들었다.

퍼억―!

세은의 공격이 물로 이루어진 방패를 완전히 뚫어내지 못하고 중간에 막혔다.

계속해서 강과 가까운 곳에서 싸우면 성가실 것이라 판단한 세은이 베파르를 강에서 떨어트리기 위해 이동했다.

“크흣!”

그러나 배수진을 치고 있는 지금, 세은에게 등 뒤를 빼앗겨서 강과 반대로 밀려나면 정말로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베파르의 반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후우……”

되도록 신성력을 많이 소모하는 마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대한 강을 낀 베파르의 응전이 상당히 거셌다.

퍽―!

깊게 한숨을 내쉰 세은은 신성의 검을 바닥에 내리꽂고 신성 마법을 발동했다.

“에일린, 홀리 노바.”

파아앙―

검을 중심으로 신성력이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꺄악!”

그레모리가 비명을 지르며 노바를 피해냈다.

그러나 열 살 정도의 어린아이의 몸을 가진 그레모리와 달리, 2미터가 넘는 거체를 지닌 베파르는 홀리 노바를 완전히 피해낼 수가 없었다.

“크아아악!”

거체에 커다란 타격을 입은 베파르가 힘겹게 몸을 복구했다.

더 이상은 마기를 보충할 시간도, 장소도 없었다.

베파르가 고함을 지르며 세은에게 달려가 삼지창을 휘둘렀다.

검을 바닥에 꽂은 세은이 우선 베파르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나 세은을 잡는 게 목표가 아니었는지, 베파르는 세은이 옆으로 피한 틈을 타 속도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야! 조심 좀 해! 너 피의 맹약이 뭔지 몰라?”

“아, 가만히 있어 키 작은 거 생각하고 한 거니까.”

방금 전의 상황에 악에 받친 그레모리가 세은에게 외쳤다.

그러나 세은은 가볍게 그녀의 말에 대답해 준 뒤, 도망치는 베파르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에일린. 홀리 애로우.”

거리를 유지하던 세은이 활을 만들어 화살을 발사했다.

파아아앙―

강렬한 파공성을 내며 빛의 화살이 베파르의 뒤를 노렸다.

“크앗!”

베파르는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신성력의 파동에, 고함을 지르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후. 잡았다.”

그리고 베파르가 옆으로 구르는 사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세은이 베파르의 위를 점했다.

“자, 마계 가서 기다려.”

푸욱―

세은은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베파르의 명치를 관통했다.

“크아아악! 그레모리 이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수용량 이상의 충격을 받자, 베파르가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중심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잘한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자신의 몸을 보며 베파르가 증오에 찬 눈빛으로 세은을 바라보았다.

세은은 대수롭지 않게 그런 베파르의 눈빛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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