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81화 (81/225)

# 81

25. 마왕 베파르(1)

“강에 있다고 했지?”

카마 강변에 도착한 세은이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세은은 신성력을 끌어올려 강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도시보다 더 짙은 마기가 강을 채우고 있었다.

“배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던 것도 이해가 가네.”

마기가 이 정도로 진하니 물이 제대로 흘렀을 리가 없다.

베파르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배들이 제대로 항해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팡―!

갑자기 강물이 격하게 솟구쳐 올라 세은을 덮쳤다.

파앗―

쏟아지는 강물을 피해 재빨리 몸을 피한 세은이 강을 향해 신성력을 쏘아 보냈다.

그런데 강물이 워낙 깊다 보니 어지간한 신성력으로는 강바닥까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히 제일 바닥 쪽에 있을 건데 말이야.”

방금 전의 강물에서도 마기가 물씬 풍겼다.

신성력이 강을 헤집자 심기가 불편해진 베파르가 쏘아 보낸 게 틀림없었다.

다만 거리가 있어 그 위력이 반감된 것이 눈에 보였다.

베파르로서는 힘을 온전히 되찾지 못한 지금 굳이 세은과 정면 대결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음…… 강을 다 엎어야 하나?”

그러나 카마강은 항해가 가능할 정도로 그 수량도 매우 거대했다.

잘못하다가는 강을 뒤엎느라 힘을 전부 소비할 판.

그렇지 않더라도 들어낸 강물을 옮길 만한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다.

“아, 이거 난감하네.”

세은은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다 비슷비슷한 방안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러시아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을 때였다.

“야!”

뒤에서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세은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내가 도와주면 내 얘기 들어줄 거야?”

다짜고짜 따라와서 거래를 거는 그레모리의 모습에 세은이 대답했다.

“분명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이. 지금 난감한 상황인데 그런 사소한 거 가지고 그럴 거야? 역시 신의 검 시렌. 아주아주아주 날카로워? 응?”

그러나 날카로운 세은의 말에도 그레모리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투는 외향과 퍽 어울리지 않아 묘한 어색함을 만들어 냈다.

너무나도 능청스러운 그레모리의 태도에 세은이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라고? 이래 봬도 도와주러 온 거야.”

“도와준다고?”

대체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 말인가.

설마 베파르가 있는 곳을 알려준 것도 모자라서 잡는 걸 도와준다고?

그러나 그레모리가 이번에도 세은의 상식을 파괴하는 제안을 건넸다.

“베파르 잡는 걸 도와줄 테니까. 너도 날 도와줘. 어때? 서로 하나씩 주고받는 거지.”

그레모리가 친근한 척 웃음을 지으며 세은을 바라보았다.

세은은 그레모리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도 당당히 마왕의 위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표정만으로는 진심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숨겨진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계에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레모리가 베파르를 잡는 걸 도와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러시아 마법사들이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마냥 이렇게 시간을 버리기보단, 세은이 그레모리의 얘기를 듣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좋아. 어디 한 번 말해봐. 터무니없는 얘기라면 이번에 끝인 줄 알아.”

“아냐아냐. 잘 들어봐!”

그레모리가 커다란 보랏빛 눈을 반짝거리며 제안을 시작했다.

“내가 이 세계 여행하는 걸 도와주면 나도 너를 도와줄게. 어때?”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상식을 벗어나던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은 도저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여행? 여행이라고?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세은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레모리가 양 볼에 바람을 가득 집어넣으며 말했다.

“하. 참!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나도 어이없는 거 아니까. 그래도 이 세계가 상당히 신기한걸? 거기다 마계에서도 지금 의견이 나뉜다고?”

“의견이 어떻게 나뉘는데?”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물었다.

“우선 오피뉴를 먼저 점령하자는 쪽과, 연결이 되었으니 여기를 점령하자는 쪽? 이쪽이 더 쉬워 보이는 것도 있기는 하고.”

“그래서, 너는 반대하는 쪽이라는 말인가?”

“그렇지! 똑똑하네?”

세은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레모리를 훑었다.

그러나 그레모리는 세은의 눈빛에도 의뭉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일이 정말로 수월해질 테지만, 그레모리를 믿을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행동에 당위성이 부족한데.”

겨우 의견을 반대한다고 같은 마왕을 잡는 걸 도와준다?

이유치고는 상당히 빈약했다.

세은이 여전히 의심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자, 그레모리가 먼저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좋아! 뭐, 믿을 수 없는 건 이해하니까. 그럼 피의 맹약을 맺자. 어때?”

“피의 맹약?”

세은이 그레모리의 제안에 살짝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세은이 눈을 뜨자 그레모리가 기대감에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의 맹약이라면 그 계약에 관해서 만큼은 믿을 만했다.

그야말로 존재와 존재의 근본을 묶어주는 강력한 맹약.

하지만 계약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 대해서 구속력이 없단 게 단점이었다.

만약 베파르조차도 어떤 계획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끄응……”

그레모리는 양날의 검을 세은에게 건네주려 하고 있었다.

다만 그 검이 매우 탐스러워서 자꾸 잡고 싶은 욕망의 검이란 게 문제.

‘맹약의 내용을 확실하면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할 텐데.’

그레모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정말 좋은 일이지만, 그녀가 마왕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됐다.

결국 세은은 당장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그레모리의 도움을 받아 베파르를 잡는 길을 선택했다.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을 신중하게 해야겠지.’

세은이 그레모리에게 당할 확률은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보았을 때 매우 희박했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방심은 가장 멀리 있을 것 같을 때 바로 옆에 있는 손님이니까.

세은이 그레모리에게 먼저 맹약 조건을 말하도록 했다.

“먼저 말해.”

“와! 받아들이는 거야?”

“마음 바뀌기 전에 말부터 하시지.”

“에이. 까칠하기는. 그러니까 맹약 내용은 이렇게 하자.”

흠흠. 그레모리가 잠시 목을 가다듬고 맹약 내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렌 에일린과 마왕 72위 중 하나인 나 그레모리는 서로 간의 생명을 불시에 빼앗지 않는다. 두 번째, 나 그레모리는 시렌 에일린이 마왕 72위 중 하나인 베파르를 처리하는 것을 도와준다. 세 번째, 시렌 에일린은 나 그레모리가 이 세계를 구경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레모리의 맹약 제안을 들은 세은이 몇 가지를 수정했다.

“첫 번째 조건 중 생명을 불시에 빼앗지 않는다. 이건 불시라는 점이 불명확하고 잘못하면 평생 죽일 수가 없으니까 바꾸지. 기간을 정해. 그리고 두 번째. 처리가 아니라 죽이는 것을 돕는다. 세 번째, 이 세계를 구경하는 일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필요할 것 같군.”

“거 참. 깐깐하게 구네…….”

“뭐라고?”

“아? 들렸어? 들리라고 한 말이기는 한데.”

투덜거리던 그레모리가 세은의 요구대로 맹약 내용을 수정했다.

우웅―

그레모리가 계약을 할 때 사용하는 피의 맹약진을 만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피를 한 방울 뽑아낸 그레모리는 그 피를 마법진에 흡수시켰다.

“심연보다 어두운 심연에, 영혼에 각인 된 존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마왕 72위 중 하나인 나 그레모리는 시렌 에일린과 6개월 동안 서로에게 그 어떠한 형태의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두 번째, 나 그레모리는 시렌 에일린이 마왕 72중 하나인 베파르를 이 세계에서 추방하는 것을 돕는다. 세 번째, 나 그레모리가 이 세계의 생명에 그 어떠한 위해를 끼치지 않고 여행을 하는 동안 시렌 에일린은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나쁘지 않군. 다만 두 번째의 추방이 거슬리고, 네 번째, 마왕 그레모리는 나 시렌 에일린에게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내용을 추가해야겠는데?”

“하 참. 아주 끝까지 탈탈 털어먹으려고 하는데?”

세은의 추가 제안에 그레모리가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소녀의 모습으로 험악해도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잠시 매서운 눈으로 세은을 바라보던 그레모리는 결국 세은의 마지막 조건을 추가했다.

“좋아. 네 번째, 나 마왕 그레모리는 시렌 에일린에게 오직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알려 준다. 단! 두 번째 내용은 수정 못해. 같은 마왕끼리 추방을 돕는 것도 상당한 위험 부담이라고?”

아쉽게도 현재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세은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은 그레모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네 번째 조건이 정말로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세은은 잠깐 고민하다가 손을 맹약진 위로 가져갔다.

세은은 그레모리가 네 번째 조건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맹약을 맺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은은 맹약진 위에 자리한 자신의 손가락에 가벼운 상처를 만들었다.

똑. 똑.

손끝에 맺힌 세은의 피가 몇 방울 맹약진 위로 떨어졌다.

그레모리의 피에 이어서 세은의 피를 머금은 맹약진이 갑자기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화악―!

기묘한 빨간빛이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빛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 피의 맹약진이 간소화되어 그레모리와 세은의 손등에 그려졌다.

“좋아. 피의 맹약은 성립되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뭐, 됐어. 얘기를 들으면 되니까.”

세은은 아직까지 그레모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이 없었다.

피의 맹약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우선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얘기를 들으면 된다.

세은은 바로 그레모리에게 물었다.

“자, 그럼 이제 베파르를 어떻게 추방하게 도울 거지?”

그레모리는 추적이나 탐색에 관련된 재능을 지니고 있는 마왕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예지 능력과, 여성의 마음을 얻게 해주는 권능이 주를 이뤘다.

세은도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그레모리와 맹약을 맺었지만, 그녀가 가진 권능이 베파르를 찾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일석이조의 방법이지.”

그레모리는 오만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닥거렸다.

“베파르는 지금 인간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마기를 회복하고 있다고? 그럼 회복 못하게 방해를 하면 알아서 움직이지 않겠어?”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거기에 방법을 찾겠다고 사람들을 방치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사람들이 속출할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죽을 때 내뿜는 부정적인 감정과 사기는 베파르의 좋은 양식이 된다.

“물론, 내가 중간에서 가로채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세 번째 맹약 조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니까 말이야.”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건 베파르지만, 거기서 나오던 파생물을 그레모리가 습득하는 것은 맹약에 걸릴 소지가 있었다.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 건 맞는데, 이미 내 기운을 느낀 베파르가 사람들이 다 낫는다고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매우 한심한 표정으로 그레모리가 말했다.

“어차피 인간들이 다 낫고 나면 대피시킨 다음에 엎어버리면 되잖아. 강을 엎어버리면 도시에 있는 인간들이 죽을까 봐 고민하던 거 아니야?”

“도시도 유지해야지.”

“우웅…… 하긴, 이 도시는 참 신기한 게 많아. 그래도 베파르는 모르니까, 아마 인간들이 없어지면 위기감을 느끼고 이동하지 않을까? 여기 있어 봤자 회복도 힘들 테니까. 적어도 게이트로 다시 들어가려고 할 것 같은데.”

그레모리의 추리에 세은이 다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세은이 그레모리에게 말했다.

“자꾸 이렇게 추상적으로 추리하지 말고 예지해 봐.”

“아. 싫어. 그거 쓰면 가뜩이나 없는 힘 사라진단 말이야. 힘 보충할 곳도 없다고.”

“맹약에는 추방하는 걸 돕는다고 되어 있는데?”

“응. 지금 같이 방법 생각하는 것도 돕는 거거든. 이 방법이 안 되면 모를까, 지금은 맹약에 구속당할 리가 없지. 이 멍청한 놈아.”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의 표정이 구겨졌다.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결국 짙은 한숨을 내쉰 세은이 도시 안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럼, 사람들 고치는 거나 도와.”

“예이예이. 어느 분 분부라고 안 도와드릴까요.”

그레모리는 과장되게 대답하며 세은의 뒤를 종종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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