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80화 (80/225)

# 80

24. 의외의 조력자(3)

페름은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거의 1,4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자동차로 가기에는 상당한 거리 차이.

하지만 페름에는 공항이 없었기 때문에 비행기는 최대한 가까운 곳에 착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부터는 자동차로 이동해야 합니다.”

“와, 진짜 산이 하나도 안 보이네요.”

넓은 침엽수림 지대가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이고르는 일행들을 재촉해서 차에 태웠다.

“바로 탑승하겠습니다.”

긴급 상황이 아니라면 비행기에서 있던 시간이 있는 만큼 잠시 공기도 쐬면서 쉬는 시간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일행이 불편해 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재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불만이 생기더라도 당장은 도시를 구하는 게 더 급박했다.

“앞으로 1시간 정도 후 페름에 도착합니다.”

이고르가 차로 환승을 하면서 보급 받은 방독면을 일행들에게 지급했다.

“방독면입니다. 방역 물품이 소용없을 수도 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고마워요.”

일행이 선선히 건네주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세은은 방독면을 거절했다.

“아아. 나는 필요 없어.”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파르가 확실하다면 이런 방역기구는 있으나 마나였다.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의 마나나 오러로 몸을 보호하는 방법뿐이었다.

차선은 고위 성직자가 신성 마법으로 보호해 주는 방법도 있었다.

세은의 힘이라면 충분히 일행들을 보호해서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너무 과보호할 필요는 없지.’

현장에 도착해서 충분히 일행들이 견딜 수 있는 정도면 버틸 수 있게 지켜볼 생각이었다.

실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능력을 사용해야 더 빠르게 성장할 수가 있으니까.

차는 약간 무리를 해서 과속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속도로 달렸다.

원래 교통량이 이렇게 없는 것인지, 미리 러시아 정부 측에서 정리를 해놓은 것인지 도로에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탁-

“흐아암!”

“으으! 아무리 넓어도 실내에서만 이동하면 힘들다니까.”

일행들은 차밖에 발을 내딛자마자 각자 길게 기지개를 쭉 폈다.

세은은 말없이 강 건너로 보이는 도시를 지긋이 주시했다.

‘베파르가 확실한데…….’

세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개의 기운이 도시에서 풍겨왔다.

하나의 힘이 자신을 숨기지 않고 광폭하게 도시를 감싸 폭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힘이 그 힘에 가려진 상태로 자신을 열심히 숨기고 있었다.

마기에 민감한 세은이 아니라면 구분해낼 수 없을 정도로 아직 작은 힘이었다.

“어디서 느껴본 힘인데……”

미약한 힘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 순도만큼은 베파르의 마기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적어도 마왕급의 마기.

지금은 베파르만 잡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잘하면 마왕 둘이 연합을 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왕들은 개인주의적인 성격인 강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마왕이 그런 것이 아니다.

마왕들 중에도 파벌이 존재하고, 그 무리 수장들이 있었다.

마왕 여럿이 연합하면 아무리 세은이라도 고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세은 씨?”

세은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도시를 바라보자 이고르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이고르의 부름에 세은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아. 바로 들어갈게.”

뜻밖의 상황이었지만, 마왕 둘 정도는 상대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미약한 힘이라면 차라리 이 기회를 빌어 한 번에 두 명을 잡는 것이 이득일 수도 있겠다.

“혼자 다녀올 테니 여기서 다들 기다려.”

“예?”

“여기까지 와서?”

다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일행들은 여기서 대기를 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을 이동해서 온지라 일행들이 같이 가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세은이 이번에는 냉정하게 지시했다.

“안의 상황이 좀 애매해서 그러니까. 다들 여기서 대기해.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어떻게 부…….”

소진이 채 다 묻기도 전에, 세은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갔네요.”

“그러네.”

일행들은 멍하니 세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 * *

“왔다!”

소녀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항. 이래서 이게 이렇게 나온 거였구나.”

한껏 들뜬 목소리의 소녀가 중얼거렸다.

“이게 인과관계가, 그러니까, 우음…….”

잠시 조막만한 손을 펴서 이것저것 계산하던 소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직접 가서 물어볼까? 아무리 계산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소녀가 잠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괜히 호기심에 갔다가 일에 휘말려서 자신까지 당하지는 않을까?

기껏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회복을 포기하고 구경하러 나왔는데, 그 호기심 때문에 객사할 수도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우웅. 그래도 너무너무너무 궁금하기는 한데 말이야.”

호기심 때문에 이 모습을 하고 있는 만큼, 호기심 때문에 소녀는 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다른 것만큼이나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될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예지의 능력은 미래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모든 인과 관계를 전부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사이의 궁금증을 채우던 일은 오롯이 소녀의 몫이었다.

“끄응…….”

결국 한참 동안이나 고민하던 소녀는 궁금증을 풀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얘기도 안 들어보고 바로 죽이겠어? 얘기는 들어보겠지.”

상대방의 성격에 기반을 둔 긍정적인 판단을 가지고 소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 *

세은이 순식간에 다리를 건너 도시로 진입했다.

도시 전체에는 이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주민들이 대부분 집 안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제대로 대피할 시간도 갖지 못한 것이다.

페름 근처의 게이트를 담당하던 각성자들도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쓰러졌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시간이 있어서 대피를 한다고 해도 전염을 우려한 러시아 정부에 의해 이동이 통제되었을 것은 분명했다.

세은이 우선 가볍게 게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아직 안 나왔으니 도시가 멀쩡하겠지.”

분명 도시 전체에 생명은 느껴졌다.

거의 100만에 가까운 사람이 거주하던 도시니 당연했다.

그러나 적막한 거리는 마치 버려진 도시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응?”

세은의 눈동자가 한 곳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적발을 지닌 소녀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1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는 이질적인 보랏빛 눈을 지니고 있었다.

“안녕?”

파앗-

세은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소녀를 향해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자, 잠깐!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아슬아슬하게 세은의 공격을 피한 소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그러나 세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미약하게 느껴지던 기운의 원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세은의 앞에 서 있는 어린 소녀는 56위의 자리의 마왕 그레모리가 분명했다.

너무 미약해서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지만, 가까이서 확인하니 분명하게 느껴졌다.

“진짜야! 지금 내 힘을 보고도 못 믿겠어? 내가 왜 자살하러 나오겠어?”

그레모리가 필사적으로 변론했다.

그 모습에 검을 휘두르려던 세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런데 왜 베파르가 난장을 피우고 있는 이곳에 같이 있는 거지? 연합이라도 한 건가?”

“연합이라니? 아직도 그렇게 마계에 대해서 몰라?”

그레모리의 태도에서 세은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세은이 마음만 먹으면 지금의 상태로는 단 1분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세은을 납득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딱 5분만 시간을 주지 그래?”

“그 5분 동안 무슨 짓을 하려고?”

“아, 우리 사이에 5분 가지고 이럴 거야?”

“우리 사이?”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굳이 사이라고 해봤자 죽고 죽이는 사이겠지.”

“에이. 이 아저씨 야박하네. 마계에서 가장 온건파인 나랑 다른 놈들이랑 같은 취급하는 거야?”

“결국 동조한 건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그래 봤자 같은 놈들이지.”

“와. 성직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 같은 강도라도 칼을 들고 찔러서 뺏는 거랑, 물건만 내놓으라고 하는 거랑 다르지.”

뻔뻔한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레모리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뭐,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같은 강도지만. 그래도 정상참작은 가능하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정말로 싸울 생각이 없다고.”

그레모리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양손을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을 좀 들어보는 게 어때?”

“거절한다.”

세은은 단숨에 그레모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레모리가 마왕 중에서 온건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굳이 살려두면 어딘가에는 다 쓸모가 있을 것들을 죽일 필요가 있냐는 것에 불과했다.

점령과 파괴를 하지 말자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그런 마음이라면 마계에서 마왕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게 분명하지만.

“그럼 내가 베파르 위치를 알려주면 말은 들어줄 거야?”

“아니, 거…… 뭐라고?”

세은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베파르 위치를 알려주면 얘기는 들어볼 거냐고.”

그러나 세은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그레모리의 제안에 세은이 당황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레모리가 말을 이었다.

“베파르는 아공간에 없어. 지금 강 깊숙한 곳에 숨어 있지. 물고기답게 많은 양의 물이 자신의 존재를 숨겨주니까.”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물었다.

“사실인가?”

“그럼. 사실이지.”

“그걸 어떻게 믿지?”

“어차피 강 한번 확인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

“흐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레모리를 바라보던 세은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아! 거참! 엄청 의심 많네! 일단 물고기 잡고 와서 말이나 들어보라고!”

그레모리의 외침에 세은이 미간을 모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하긴, 지금 상태가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얼마간을 마주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 그레모리의 상태가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레모리의 원래 모습은 성숙하고 우아한 여성의 모습이었지, 이렇게 어리고 작은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좋아. 일단 다녀와서 다시 보지. 다만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알지?”

“거 참. 더럽고 치사해서 안 움직인다.”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는 그레모리를 잠시 지켜보던 세은은, 이내 몸을 날려 강으로 향했다.

“대체 뭐가 뭔지를 모르겠네.”

세은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마계에도 파벌이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예전에도 파벌이 있는 것을 이용해 전략을 세운 적도 있으니까 말이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직접 음해하는 행동은 거의 보기 힘든 편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알려준 마왕이 그레모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움직이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레모리는 온건파 중에도 가장 온건한 편에 속했고, 그런 탓에 마계로 직접 넘어가기 전에는 부딪힐 일도 없었다.

“뭐,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붙잡아서 물어보면 되겠지.”

방금 전에 파악한 바로, 현재 그레모리의 마력량이면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일이었지만, 작금의 상황에 대해 거의 아무런 정보가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레모리는 아주 좋은 정보원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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