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79화 (79/225)

# 79

24. 의외의 조력자(2)

어느새 비행기를 타는 것도 익숙해져 있었다.

쾌적한 퍼스트 클래스의 좌석은 오랜 비행에도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비행기에 누워 잠깐 잠을 청하거나,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최근에 각국의 공항이란 공항은 다 가보네요.”

모스크바의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내리면서 채연이 말했다.

최소한 한국과 근접한 국가의 주요 공항은 전부 방문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으음!”

아무리 편하게 누워서 온다지만 비행이라는 한계 상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기지개를 펴느라 정신이 없었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세은을 맞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세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일행은 관료의 안내를 받아 일사천리로 시내의 한 고급 호텔로 이동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중국에서 세은과 함께 러시아로 넘어온 이고르가 말했다.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중국에서 바로 넘어왔더니 조금은 쉬고 싶은 상황이었다.

비행기에서 잠은 잤지만, 아무래도 이동하는 기체에서 질 좋은 숙면을 취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굳이 잠을 꼬박꼬박 잘 필요는 없었지만, 세은도 사람인지라 잠을 자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 쾌적한 건 당연했다.

“그런데 말이야.”

안내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이고르에게 세은이 물었다.

“시 주석은 정말로 러시아로 오나?”

“시페이 주석 말입니까?”

세은이 시페이의 행방에 관심을 갖자 이고르가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주석이라는 위치가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니까요.”

“하긴.”

이고르의 말에 세은이 동의했다.

“호텔 측에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배치하라고 했으니, 편하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럼.”

이고르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안내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세은은 이고르가 나가자 잠을 자기 위해 몸을 씻기 시작했다.

* * *

“어떤가?”

“어지간한 것으로는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내 말은, 그가 미국에게서 돌아서서 우리와 손을 잡을 확률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네.”

세은을 호텔로 안내한 이고르는, 미처 쉴 틈도 없이 크렘린 궁에서 드미트리 옐친 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다.

사안의 중대함으로 인해 잠시라도 지체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고르는 잠깐이지만 세은을 만나 자신이 느꼈던 것을 가감 없이 전달하기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무리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성격입니다. 적정한 보상을 안겨주면 그만큼 돌려주는 성격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중국에서 그를 전면적으로 포섭하려는 것 같습니다. 시페이가 파격적으로 그를 대하더군요. 마친 오랜 친우처럼 격의 없이 대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흐음. 시페이가?”

“그렇습니다. 사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중국 입장에서 그럴 만도 할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골치를 썩던 일을 단 하루 만에 처리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말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 그는 가치를 증명한 것입니다. 또한 보고를 받으셔서 아시겠지만 미국과 일본에서의 일도 있습니다.”

이고르의 평가에 드미트리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듣기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나선 적이 없다.

그렇다면 러시아에서도 장관이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관료들 사이에 팽배했다.

미국보다 저자세로 나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렇게 파격적으로 나선 이상, 러시아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오랜 우방이지만,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말씀 드렸지만, 시 주석이 개인 여행자 자격으로 러시아에 방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시 주석은 이 기회에 완전히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보고는 나도 받았네. 상당히 어이없는 보고였는데 그쪽은 진심인 모양이야.”

드미트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한 번 연락이 왔더군. 개인 비행기 입항을 허가해 달라고 말이야.”

중국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자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의 행보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허가하셨습니까?”

“막기에도 좀 그렇지 않은가? 당장 러중은 미일에 대해서 동맹을 체결한 사이인데. 여기서 거절하면 동맹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니까 말이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시페이의 적극적인 태도를 직접 목격한 이고르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 자네 생각은 우리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말이군?”

생각을 정리한 드미트리가 이고르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이고르가 그의 말에 강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미일은 물론,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말이야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중국은 같은 동양 문화권 아닌가? 같은 문화권인 중국에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다고 당장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관료들이 배우기에는 시간이 촉박해.”

아무래도 평소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정보를 익히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고르는 그런 드미트리의 걱정을 한순간에 불식시킬 수 있는 비책을 꺼내놓았다.

“각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 그게 뭔가?”

잠시 뒤, 이고르의 비책을 들은 드미트리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껄껄껄! 좋아. 좋아! 아주 좋은 생각이야. 지금 말한 방법대로 준비하도록 하게. 그는 내일 점심 이후에 만나면 되겠어.”

“옛! 알겠습니다. 각하!”

* * *

“우웅…… 벌써 시작인가?”

천연의 색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희귀한 적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카마강 영안에 자리 잡고 있는 페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소녀의 어조는 매우 무심했지만, 표정은 살짝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베파르 이 물고기는 쓸데없이 성실하단 말이야. 기껏 신기한 차원에 왔는데 그저 부실 생각만 하다니.”

소녀는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살짝 입술로 물었다.

“그리고 아무리 미래를 들여다봐도 좋은 결과가 안 나와. 우음…… 구경을 좀 하고 싶어서 몸을 바꿨는데 과연 잘한 일일까?”

잠시 고민하던 소녀는 입술에서 손을 떼어냈다.

“뭐, 나는 반대했으니까. 완전하지도 않은 상태로 이곳까지 신경 쓰기에는 무리라고.”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춘 소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단 흔하지 않은 기회를 즐겨야 겠어. 베파르만 움직일 리가 없으니까.”

소녀에게 새로운 세계를 구경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소녀가 속한 파벌에서는 모두의 회복이 완전하지 않은 지금, 굳이 이곳을 정벌하는 것이 우선 순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곳의 인간들은 소녀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비록 소녀에게는 잔기술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흥미를 유발하기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조금 더 돌아다녀 봐야겠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볼까?”

말을 마친 소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동할 방향을 정한 소녀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드미트리의 난감한 시선이 세은에게로 향했다.

“이것 참. 손님을 성대하게 맞이하고 싶었는데, 참 공교롭게 되었군.”

“뭐, 놀러온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만 말이야…….”

드미트리는 세은에게 주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이고르에게로 돌렸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고르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세은의 옆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않아 있던 채연에게 전해주었다.

“아, 아?”

갑작스런 이고르의 행동에 채연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소진이나 영한은 이고르가 서류를 건네준 대상이 자신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살짝 안도하고 있었다.

“지금 이고르가 건네는 그 서류에 여태까지의 모든 기록과, 어제부터 급변한 상황을 모두 기록해 두었네. 원래는 대외비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게 의미 없다고 판단했지.”

여기까지 말한 드미트리는 이고르에게 이어서 말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신호를 받은 이고르가 드미트리의 말을 받아서 이어 나갔다.

“페름은 중요한 공업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을 때만 해도, 카마강의 물결이 제멋대로라서 배들이 제대로 정박을 하거나 진입을 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부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혹시 전염병이라도 돌아?”

“마, 맞습니다!”

세은의 말에 이고르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제부터 갑자기 물에서 악취가 나고 사람들이 단체로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쓰러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베파르가 확실한데.”

“베…… 파르가 무엇입니까?”

이고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세은은 생각에 잠겨 그런 이고르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세은이 각 나라에 도착하기 전에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마왕들이었다.

그러나 세은이 의뢰를 받아 나라에 도착하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활동을 재개했다.

‘그 멀리서 내 기운을 느꼈을 리는 없는데…….’

그리고 만약에 세은의 기운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힘이 회복되지 않은 이상 더 움츠러드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지금 분명히.’

세은이 고민의 빠지자 실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특히 드미트리와 이고르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러는 순간에도 피해가 확산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세은이 이 사태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면 한시바삐 해결의 단초를 전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페름은 시베리아 간선도로와 시베리아 횡단철도 지나가는 도시로, 카마강을 끼고 있어 항행까지 가능해 상업과 공업의 중심지 중 하나인 도시였다.

페름의 피해가 커지면 러시아 전역의 물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카망강은 백해와 발트해, 흑해와 카스피해 거기에 아조프해의 연안항들과 연결되어 러시아의 유럽 지역을 묶는 중요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피해가 커지고, 사람들이 거주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었다.

이런 드미트리와 이고르의 조급한 마음을 알았는지, 세은은 이내 생각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일단 한시가 다급한 것 같으니 이동은 하지. 지금 바로 이동하며 되나?”

“예! 지금 전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세은의 말에 이고르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드미트리는 정말로 미안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세은에게 말했다.

“정말, 정말로 미안하군. 손님을 초대해 놓고 제대로 대접을 하지 못하고 말이야. 내 약속하지. 내 명예를 걸고, 자네가 돌아오면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대하게 환영 파티를 열겠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나서서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 일행들은 드미트리의 말에 벌써부터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파티, 파티래요. 언니!”

“그러게. 옷이 없는데 사야 하나?”

“외국의 파티는 어떤지 궁금하기는 하네.”

당연히 세은이 있기 때문에 실패한단 사실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척.

드미트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럼 나도 먼저 일어나 보겠네. 아무래도 계속 보고를 받아야 해서 말이야.”

세은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 드미트리는 바쁜 걸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드미트리가 사라지자, 이고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30분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필요한 물품이 있으시면 지금 말해주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없어.”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중국에서도 아무런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고르가 다시 물었다.

세은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서 의사를 확실하게 표명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30분 뒤에 모시러 다시 오겠습니다.”

매끄럽게 답한 이고르가 인사를 마치고 방에서 나갔다.

탁-

이고르가 나가자 세은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자, 다들 갈 준비해.”

그러나 딱히 가져갈 짐이 없었기 때문에, 일행은 30분을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데 보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이고르는 정말로 정확히 30분 뒤에 방문을 두드렸다.

일행은 이고르를 따라 호텔의 로비로 향했다.

정문 앞에는 수많은 경찰차가 호위하고 있는 검은 차 한 대가 있었다.

세은이 이고르를 바라보자 그가 재빠르게 해명했다.

“시간이 촉박한지라 공항까지 교통정리를 위해 모였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지요.”

이고르의 해명에 잠시 긴장했던 일행들은 마음을 풀고 차에 올라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일행을 태운 차는, 수많은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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