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22. 본격적인 활동(1)
“굉장히 오랜만에 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네요.”
비행기에서 내린 채연이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그러게. 공기부터 뭔가 친숙한데?”
재호도 마찬가지로 편안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한국으로 돌아오니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편안한 얼굴이 된 둘과는 달리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한 에린은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미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한국은 에린에게는 생소함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세은 씨!”
미리 미국 측의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이지호가 반갑게 세은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가신 일은 잘 됐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호는 채연과 재호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옆의 숙녀 분은?”
처음 보는 외국인 소녀의 모습에 이지호가 채연에게 물었다.
채연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에린이 나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에린 클로에라고 합니다.”
금발에 청안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인의 소녀의 능숙한 한국어에 이지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에린의 한국어는 발음상의 문제를 제외하면 회화에 문제가 없을 수준이었다.
이지호는 깜짝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인사를 받았다.
“어…… 반갑습니다. 이지호라고 합니다.”
아주 어린 소녀였지만, 초면인데다가 세은의 일행이었기 때문에 이지호는 쉽게 말을 놓지 못했다.
“일단 이동하시죠.”
간단하게 인사를 끝낸 이지호가 일행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차는 일행을 태우고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미국 측에서 준 자료는 전부 받았습니다. 아주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보안이 유지되는 차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지호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미일 삼국이 공조하는 국제기구라니, 아주 훌륭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중국과 러시아가 공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지호는 잔뜩 고무 되어 열변을 토해내었다.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인도나 기타 국가들을 잘 끌어들이면 훌륭한 외교적 성과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세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차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어차피 이 정도까지 판을 벌여주었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마땅한 집은 구했나요?”
세은은 흥분한 이지호의 말을 끊고 물었다.
사노에게 부탁해 미리 한국에 에린이 지낼 만한 집을 구해달라고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겸사겸사 자신도 지금 지내는 자취방을 정리하고 전에 매입한 건물 근처로 집을 옮길 생각이었다.
돈을 물 쓰듯 쓸 필요는 없지만, 굳이 있는 돈을 쓰지 않고 신주단지 모시듯 모실 필요는 없었다.
“집이요? 오빠 이사하게요?”
그러나 이 말을 처음 듣는 일행들은 갑작스런 말에 반응을 보였다.
“이사도 하고, 에린이 살 곳도 구해야 하고 겸사겸사.”
“아…… 하긴 오빠 지금 사는 곳은 많이 작죠.”
세은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던 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에린은 저희 집에서 지내도 돼요.”
“그래? 불편하지 않겠어?”
“불편하긴요. 귀여운 동생 한 명 생긴 건데요!”
“하긴, 혼자 살기는 아직 어린 나이기도 하고.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린이 물었다.
“세은이랑 채연 집은 가까워요?”
“글쎄? 일단 지금은 가깝지는 않지.”
“으음…….”
채연의 대답에 에린이 머뭇거렸다.
채연도 좋지만, 세은과 가까운 것이 사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 참에 다 같이 근처로 이사할까요?”
에린이 머뭇거리는 것을 확인한 채연이 먼저 제안했다.
에린이 세은은 굉장히 좋아하고 따른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가까이 모여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럼 집을 다시 알아볼까요?”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이지호가 끼어들었다.
"그럼 수련장 있는 건물 근처로 적당히 알아봐 주세요.“
스스로 집을 구해본 적이 없던 세은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런 부분은 정부 관계자가 구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고 신속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가격대는 전에 말씀드린 것보다 조금 높아지는데 괜찮을까요?”
“처음에 말씀드린 것만 넘지 않으면 괜찮아요. 뭐 혼자 사는데 으리으리한 곳에서 지낼 것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바로 알아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지호는 바로 전화를 연결해 부하들에게 부동산을 알아볼 것을 명령했다.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끄덕.
이지호의 말에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소한 한국의 풍경에 신난 에린과, 그런 에린과 정겹게 담소를 나누는 채연의 목소리만이 차를 가득 채웠다.
* * *
며칠 간 일행은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귀국하니 한국에서 만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에린의 비자 문제나 거주 문제는 한국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어서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에 미국과 일본과 협의하는 국제기구 창설에 대한 것이 큰 것 같았다.
그러나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행과는 달리 세은은 다른 국가의 사신들을 만나고 있었다.
“소문이 자자한 영웅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위건입니다.”
세은은 상대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과 일본보다 저희 중국이 더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국도 일부 게이트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저히 토벌할 수 없는 게이트 하나에 막힌 상황이었다.
“특히 일본은 신뢰할 수 없는 국가 아니겠습니까? 같은 피해국끼리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은은 한국인.
장위건은 정보부에서 종합한 정보에 따르면 세은에게는 이 방법이 가장 잘 먹힐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세은은 이미 일본에서 제대로 일을 벌이고 왔기 때문에 그의 말에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일단 지켜봐야지요.”
세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별로 흥미가 없는 표정으로 허공을 보았다.
오히려 애가 타는 쪽은 장위건 쪽이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은 세은씨의 가족을 건드린 파렴치한 놈들 아닙니까? 어찌나 과거에 비해 발전하나 없는지. 저희 중화민국에서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세은 씨의 가족을 경호하고 있었습니다.“
장위건이 그리 말하며 당당한 눈빛으로 세은을 바라보았다.
이성우가 길드원들을 동원해 경비를 서기로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경쟁적으로 자신들을 도우려 해서 오히려 곤란했다는 얘기를 이미 전해 들었다.
그러나 나쁜 의도로 곤란하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웃으면서 전달이 되었다.
세은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국가 차원에서 경호를 했었다고 하니 더 안심이 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중국을 도와줘야할 무조건적인 이유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장은 여유롭게 쉬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장위건의 말은 세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습니다만, 사실 저희 중화민국 스스로 처리하기 힘든 게이트가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어떤 말을 해도 세은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차라리 정공법으로 돌파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장위건은 세은이 집중해서 듣는 것 같지 않아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희 중화민국은 스스로 게이트를 토벌했습니다. 초기를 제외하고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게이트가 있더군요.”
“특이한 게이트?”
“그렇습니다. 마치 스스로 주변을 잠식하는 듯한 게이트가 있는데 근처로 가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장위건의 설명에 세은이 기댄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마왕이 있는 게이트인 것 같다는 예감이 물씬 들었다.
세은이 자신의 말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자 장위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와중에 세은 씨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미국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저희는 한국이 저희와 더 긴말하게 협력했으면 합니다. 사실 지리학적으로 미국보다 중국이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장위건의 말을 듣고 세은은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장위건이 말한 특이한 게이트가 마왕이 있는 게이트라면 꼭 가보기는 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세은은 조건을 달았다.
“그 특이한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전부 가지고 오면 일단 보고 생각하겠습니다.”
“아!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첫날은 적당히 대화를 마쳤다.
그러나 중국 다음으로 러시아가 방문하고, 비슷한 얘기를 하자 세은은 여유를 즐기겠다는 생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중국과 러시아가 같은 문제를 호소하고 있었다.
사실 미국에서 무르무르가 나타났을 때부터 예상은 되는 문제였다.
마왕들이 있는 게이트는 한국에만 있는 것 아니고 전 세계에 퍼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마왕성이 연결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연결 되었지만 무르무르처럼 꿍꿍이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전 세계의 모든 게이트를 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 짜증나네.”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오러 마스터와 6서클 마법사 내에서 정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마왕은 달랐다.
그렇다고 방치하자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야기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아니, 인명 피해 전에 인류의 존속 자체가 불투명했다.
일단은 각성자들이 능력을 키우고 국가들이 조직적으로 게이트에 대항할 힘을 키우는 것이 필요했다.
미국에서 국제기구를 만들려고 하는 걸 용인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어느 이유에서이던 각자의 나라를 지키겠다고 개별 행동을 하는 것보다, 일단 뭉치면 같이 움직이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좀 천천히 나와 주면 좋은데 말이야.’
하지만 세은의 바람과는 달리 마왕들이 사정을 봐가면서 ‘다 준비했어?’하고 나와 줄 리는 없지 않은가.
당장 한라산만 봐도 그렇고, 오션 시티만 봐도 그랬다.
‘일단 중국과 러시아에서 보내주는 자료부터 확인해보고.’
세은이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했다.
* * *
“어떻습니까?”
이지호가 세은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은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심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앞에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가져다 준 자료가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이지호로서는 세은이 중국과 러시아를 도와줘서 한국이 조금 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최선의 상황이었다.
‘어쩔 때보면 감정이 있는 것 같다고 이럴 때는 모르겠단 말이지.’
도저히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세은을 보며 이지호는 답답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가장 최근의 정보로는 미국에서 데려온 여자 아이에게 약한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여자에 약한 건 아니었다.
‘아이에게 약한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아이나 뜬금없이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마 세은이 상식적인 사람이란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이지호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세은도 생각을 거의 정리하고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두 군데 전부 마왕이 있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특히 러시아보다 중국이 그 가능성이 더 높았다.
‘더 늦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결국 중국의 의뢰를 거절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지호 씨.”
“예?”
갑작스런 세은의 부름에 이지호가 대답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조용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이지호는 갑작스런 세은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무런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마음대로 한다는 말은……?”
이미 네 마음대로 하고 있잖아.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이지호가 물었다.
“뭐, 굳이 말하자니 조금 애매하기는 한데. 일단 보시면 알 겁니다.”
세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이지호가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 말은…….”
세은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이왕 움직이는 거 더욱 제대로 움직여 주겠다. 이 말입니다.”
그런 세은을 보는 이지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세은을 아예 제재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뇌리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