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21. 충분한 양보(3)
“미스터 도.”
세은이 쉬고 있던 방으로 사노가 들어오며 그를 불렀다.
“끝났나?”
“다시 협상하러 가시죠.”
세은은 접객실의 정리가 끝났단 전언을 받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쿠자들이 제압이 끝난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협상을 진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총리의 정신을 고려한 사노의 제안으로 접객실을 정리할 때까지 휴식을 갖게 되었다.
부서진 집기들과, 널브러진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일들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한 국가의 중심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세은이지만, 일본은 더 이상 아무런 항의도 할 수가 없었다.
사노도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는 태도로 상부에 방금 전의 해프닝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를 올렸을 뿐이었다.
세은이 사노와 함께 접객실로 들어가자 먼저 앉아 있던 류난이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 이상 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사노가 자신의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은의 성격에 대해서 더 자세히 류난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작할까요?”
자리에 착석한 사노가 다시 운을 띄었다.
류난이 처음보다 더 가라앉은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은의 실력을 보고 나서 기가 죽은 게 두 눈으로도 확실하게 보일 정도였다.
“험험. 잠시 일이 있었지만 잘 마무리되어 다행입니다.”
사노가 방금 전의 일을 작은 일로 축소시키는 말을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세은도 그런 사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류난도 결국 일을 축소하는 데 동조하는 발언을 꺼냈다.
아주 작은 일로 만들어 이 일로 더 이상 문제가 야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노의 의도였다.
의도대로 적당히 일을 축소시킨 사노가 방금 전의 협상을 이어 나갔다.
“그럼 일본 정부에서는 정확히 사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휴우…….”
깊게 한숨을 내신 류난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이견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까?”
“무방합니다.”
“사과문 미리 보고.”
세은이 조건을 달았지만, 이 일은 거의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부분만 제대로 되면 되니까 나머지는 알아서들 해.”
필요 없는 부분까지 같이 앉아서 협상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세은이 딱 잘라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 대신 내가 안 본다고 이상한 것 넣으면…… 알지?”
세은의 눈이 날카롭게 찢어지며 사노와 류난을 한 번씩 노려봤다.
“크흠!”
“하하. 물론입니다.”
노골적인 위협에 류난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사노는 넉살 좋게 세은의 위협을 받아 넘기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미스터 도가 꼭 들어야 하는 사안만 먼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세은은 사노의 말에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답했다.
“뭔데?”
그러나 많이 능글맞아진 사노는 유연하게 웃음으로 넘기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삼국이 창립국으로 참여하게 될 국제기구에…… 미스터 도가 꼭 참여했으면 하는 게 저희의 입장입니다.”
“거절한다.”
“이건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노의 말에 세은이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고 창립국으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려면 그에 맞는 무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저희는 한국을 대우하고 싶지만 현재 한국의 전력은 주변의 다른 국가들인 중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일본에 비해 떨어지는 게 현실입니다.”
“흐음.”
맞는 말에 세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은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하자 자신감을 얻은 사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은 이미 한국에서의 게이트 소멸과, 우리 미합중국의 오션 시티의 사태로 미스터 도의 실력에 대해 충분히 파악을 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야 과거에 얽힌 일이 많아서…….”
일본에 대한 이어가지 전에 사노는 살짝 류난의 눈치를 보았다.
“크흠.”
사노의 시선을 받은 류난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하여튼,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미스터 도를 시험해 봤지만 다른 국가에선 모셔가지 못해서 안달이 났습니다. 현재 우리 미합중국의 의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한국으로 들어가는 순간 수많은 접촉이 예상됩니다.”
사노의 말을 들은 세은은 그에게 질문했다.
“그 말은 지금 다른 국가들의 차단을 미국에서 제한하고 있다는 말이네?”
“그,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행동이 세은의 신경을 건드렸을까 봐 사노가 순간 긴장했다.
“흐으음.”
혼잡한 국제 정세에도 아직까지 미국은 큰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 대한 접근을 막은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사노는 세은이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자 오히려 불안했는지 지레 먼저 사과를 건넸다.
“의견을 묻지 않고 행동한 점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의뢰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아아. 됐어. 그 부분에 대해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세은은 턱을 까닥여서 계속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여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미스터 도가 한국 소속으로 국제기구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다른 국가들은 개인적인 자격으로 미스터 도에게 접근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럼 국제기구를 만드는 의미도 없거니와 기구로서의 힘을 발휘하기도 힘듭니다.”
“일리는 있어.”
자꾸 일을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 같아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사노의 말은 충분히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무턱대고 거절하면 오히려 더 복잡하고 귀찮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세은은 결국 고개를 끄덕여 승낙 의사를 비쳤다.
“좋아. 대신 허튼 짓 하면 알지?”
“하하. 물론입니다.”
“그럼 내가 들어야 할 말은 끝났나?”
“예. 나머지는 정리를 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먼저 돌아가지. 별로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라서.”
관저의 주인인 류난 역시 세은이 있는 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세은이 먼저 가고 싶다하니 두 팔 벌려 마중을 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류난은 정치인답게 최대한 속내를 들키지 않게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이거, 손님에게 실례를 했던 점은 부디 사과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류난의 영혼 없는 사과를 들은 세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속이 쓰릴 텐데 사과는 하는군. 그 사과 받아주지.”
끝까지 속이 쓰린 세은의 태도의 류난은 이를 꽉 물며 말했다.
“하하. 세은 상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그럼 호텔까지 안내는 누가 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처음 사노와 세은이 총리 관저에 도착했을 때 안내했던 사람이 다시 세은을 안내했다.
세은은 사노와 류난에게 인사를 하고 접객실을 빠져나와 호텔로 가기 위해 차로 이동했다.
달칵―
세은이 방에서 나가고 침묵이 류난과 사노를 감쌌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세은이 관저에서 충분히 멀어졌을 시간이 되자 류난이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허…… 내 평생 이런 치욕은 처음입니다.”
“저희가 미리 정보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
살짝 질책 어린 사노의 말에 류난이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도 게이트를 토벌했습니다.”
“게이트를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류난의 말에 사노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사라진 게이트는 없습니다만?”
“말 그대로 소멸이 아니라 토벌입니다.”
“그 말은?”
“게이트 안을 완전히 정리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사실입니까?”
사노의 반문을 들은 류난의 입가 끝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제가 뭣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물론 정부 주도는 아닙니다만……”
류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자국의 각성자 전력은 거의 야쿠자 삼대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얼마 전에 야쿠자들끼리 전쟁이 나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힘이 있으면 사용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니까요.”
“그렇습니다.”
“하여튼 그들은 현실의 기반, 즉 자신들의 사업장을 건드리지 않고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았습니다. 이미 초인의 반열에 오른 그들이 거리에서 싸우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피해가 생길 테니까요.”
“그럼 그곳이?”
“맞습니다. 그곳이 게이트입니다. 야쿠자들은 경쟁적으로 게이트에 들어갔고, 결국 도쿄 근교의 게이트 하나를 완전히 토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놀란 사노를 앞에 두고 류난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한 곳의 토벌이 성공하니 다른 곳도 자극을 받아 토벌에 성공하더군요. 그래서 사실 자신이 있었습니다.”
“왜 그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지 않았습니까?”
“알릴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환란의 시대입니다. 굳이 우리의 전력을 유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크흠. 그건 그렇습니다만.”
“미국이야 국가에서 각성자들을 잘 통제하니 게이트에 막무가내로 들어갈 일이 없었을 테지요.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게이트를 토벌하는 데 성공한 국가들이 꽤 있을 겁니다.”
류난의 말을 들은 사노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희가 이번에 미국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저희 전력의 노출을 최소화 하고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넓힐 목적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보니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일본의 숨겨진 진의를 알게 된 사노는 이를 빨리 상부에 보고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제게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류난이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이제 일본의 자존심은 추락하다 못해 땅에 처박혔습니다. 저자가 있는 한 한국과는 제대로 된 관계에서 손을 잡지 못할 터이니 솔직하게 터놓고 미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자 합니다.”
“총리님의 의중은 잘 알겠습니다. 상부에 잘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이 안에 있던 일에 대해서는 함구 부탁합니다. 국가의 체면과 자존심이 있는 문제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노와 류난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럼 남은 부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어볼까요?”
“최대한 두 국가의 이익을 위해 토의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류난과 사노가 머리를 맞대고, 최대한 자국에 이익을 챙기려는 회의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 * *
“어이!”
안내를 받아 차로 이동하던 세은을 누군가 불러 세웠다.
“정말 대단하더군. 엔도 그자가 한 말이 엄살이 아니었어.”
세은을 기다리고 있던 타마로가 성큼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타마로의 눈에는 적의보다 감탄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실력을 가질 수가 있지?”
갑자기 친한 척을 하는 타마로를 보며 세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대충 어떤 성향의 인간인지 손쉽게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애들 중에도 마법을 사용하는 놈들은 꽤 있지만, 상당히 제약이 많은 힘이던데 말이야. 너는 마치 마검사 같더군.”
‘그러고 보니 마검사는 없으려나?’
타마로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세은은 또다시 한 가지를 떠올렸다.
간혹 드물지만 마나와 오러를 동시에 사용하는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도 힘들어 거의 존재하지는 않고, 재능이 있다 해도 더 재능이 있는 곳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인 경우를 벗어난 천재들이 간혹 나타나기는 했지만 아주 드문 경우였다.
‘그나마 잘했던 놈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세은이 인정할 만한 마검사는 단 한 명이었다.
능력만큼이나 오만했는데, 그의 재능과 노력을 보면 충분히 오만해도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여튼 그래서 꼭 초대하고 싶은데 어떤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타마로가 했던 말의 태반을 듣지 못했지만, 마지막 말만을 들을 수가 있었다.
피식.
순수한 호의에 세은이 웃으면서 답했다.
“나쁘지는 않지. 그런데 내가 일본어를 못해서 통역이 있어야 할 거야.”
세은의 말에 타마로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지금 통역을 해주는 사람 정도의 수준으로 준비하지.”
“호텔에 가서 일행들과 얘기를 할 테니 알아서 찾아와.”
타마로 정도면 세은이 머무는 곳은 알아서 알아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짧은 대화를 마친 세은은 차를 타고 일행이 묵고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