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70화 (70/225)

# 70

21. 충분한 양보 (1)

류난의 시선이 사노에게로 향했다.

“우선 미국의 입장부터 들어보지요.”

“미국은 세계의 질서를 위해 삼국이 공동으로 협력해 나가는 것을 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세부적인 것을 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총리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노가 위에서 전달 받은 사항을 하나씩 꺼냈다.

“우선 삼국에 생겨나는 재난 사항에 대해 서로 지원을 하는 조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또한 게이트의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테스크 포스를 운영했으면 합니다.”

“그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위해 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기구 창설 또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 의견에도 동의합니다.”

“이상입니다.”

“딱히 문제 될 것이 없는 제안이군요. 아니, 오히려 꼭 필요한 일들입니다.”

“물론입니다. 삼국은 전통적인 우방이 아닙니까.”

“하하. 일본 역시 미국을 언제나 등을 맡길 수 있는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세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요구한 조건은?”

“아…… 미스터 도. 그 부분은 이제 얘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제가 드린 제안에 대한 생각은 어떠십니까.”

사노의 말에 세은이 답했다.

“내가 아니라 청와대랑 얘기해야 할 것 같은 사안인데.”

“하하. 정말 겸손하십니다. 미스터 도가 없는 한국은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정부에서 뭐라고 할 텐데?”

“한국 정부와는 이미 모든 얘기가 끝났습니다.”

사노의 말에 세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알아서 처리를 다해놓았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저희가 드린 제안은 어떠십니까?”

“나쁘지는 않은데 말이야.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겠다는 건 국가로서 당연한 거고.”

긍정적인 세은의 말에 사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니 내가 듣고 싶은 건 이게 아니라, 내가 말했던 일이라고. 일본은 준비가 된 건가?”

세은의 말을 들은 류난이 괴상한 기침소리를 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무엇인가 할 말이 목 끝까지 치민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류난은 몇 번 더 헛기침을 내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은 상과, 세은 상의 가족이 일본의 범죄 조직에 의해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신 건 이 자리를 빌어서 사죄합니다.”

우선 세은에게 사죄를 한 류난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유감은…… 곧 발표하겠습니다.”

그 말에 세은은 씩 웃었다.

“유감 표명 말고, 사죄를 하라고. 보상도 하고.”

“크흠. 별다를 게 없는 표현입니다.”

이번에는 류난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언어의 특성상 같은 말이라도 번역이 될 때 사람이나 문맥에 따라서 뜻이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은 그동안의 입장 표명에서 단 한 번도 사죄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국어에서 유감으로 번역되는 건 인정했지만, 사죄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사죄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

세은이 사노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노가 류난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정하시기로 한 것. 시원하게 인정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백악관의 의견도 저와 같습니다.”

“큼. 충분히 자세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피해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희 입장도 있지 않습니까?”

류난이 계속 버티자 사노가 말했다.

“미합중국은 일본이 항상 저희의 든든한 우방으로 남기를 원합니다.”

갑자기 사노가 당연한 말을 하자 류난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사노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 중 고르라면…… 저희는 한국을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수상께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대부분의 정보를 공개했습니다.”

사노는 계속 말했다.

“수상께서 일본 국내의 정치적 지형과 지지기반 때문에 이러한 태도를 보이시는 부분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이익은 저희가 도와드릴 수가 없다고 확실하게 전달 드리는 바입니다.”

사노의 말이 끝나자 류난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건 대놓고 협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을 하는 사람이 미국의 전권을 받은 사신이 아니면 당장이라도 쫓아냈을 터였다.

“아무리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지만, 말이 심하신 거 같습니다.”

“저는 미합중국의 전권을 받은 사람으로서 충실하게 입장을 전달 드릴 뿐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평소에 우리 일본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라는 말이군요.”

“평소가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류난은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하여튼, 우리 일본국은 더 이상 양보할 수 없습니다.”

연임을 위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류난이 답했다.

류난의 대답에 세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노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미국이나 일본이나 태반이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더 냉각되기 전 류난이 새로운 제안을 내밀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무슨 방법 말입니까?”

“세은 상이 정말로 우리의 신념을 꺾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증명하면 됩니다.”

“증명은 이미 삼대 야쿠자 조직 중 한 곳을 단신으로 와해시키고, 오션 시티의 사태를 정리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래 봤자 전부 소문 아닙니까? 한국의 영웅 만들기일 수도 있고요.”

류난의 말에 사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말씀은, 지금 미국이 한국의 영웅 만들기에 동조하고 있다…… 생각하신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저희가 직접 눈으로 실력을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편하게 갈 수 있는 일을 왜 복잡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국인인 사노로서는 한국과 일본의 알력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때까지도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은이 말했다.

“내가 왜 하자는 대로 움직여야 하지?”

세은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류난에게 말했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희인데 말이야.”

류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세은의 말을 들은 사노가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예상과 다르지 않은 반응을 세은이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세은이었어도 똑같이 반응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굳이 일본의 도움이 필요도 없거니와, 너희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지.”

“참으로 오만하시군요.”

류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나가와카이가 패배한 이후, 경험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은을 평가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세은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물론, 미국에서 연합을 위해 전달해 준 자료의 분석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다.

자료에 의하면 상당히 오만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생명에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이었다.

목숨을 거는 생사투가 아니라면 야쿠자 조직이 연합한다면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시면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미국의 연락을 받은 후 최강의 전력을 소집해 둔 상태였다.

“총리! 이건 미리 사전에 협의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원래 협상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 구두로 합의했던 것과 다른 류난의 제안에 사노가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세은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아무래도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 같은데 그렇지?”

세은의 질문에 사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저희의 제안을 받으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류난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미국이 우방이지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이걸로 일본이 호락호락하지 않단 사실을 미국에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목표였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류난과 일본의 관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파앗―

“컥?”

세은이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팔을 뻗어 류난의 멱살을 잡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실내의 모든 인원이 당황했다.

“미, 미스터 도!”

그나마 사노가 정신을 차리고 세은을 불렀다.

그러나 세은은 사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다른 곳은 몰라도 말이야. 일본에는 별로 인내심이 깊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세은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멱살을 잡지 않은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허공에 뻗어진 손을 따라 신성력이 하얀빛을 만들어 냈다.

힘을 쓰면서 세은은 말을 이어갔다.

“그런 말이 있어.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꿀꺽.

세은의 웃는 모습에 사노와 류난뿐 아니라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식은땀과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는 이미 많이 참아줬어.”

세은의 말에 다른 이들보다 유독 사노가 더욱 긴장을 했다.

분명 일본한테만 하는 얘기가 아닐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보다 새하얀 빛이 실내를 가득 채우더니 허공에 화염을 수놓았다.

또다시 실내의 모든 사람의 입에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위협이라고 생각하던 사노는 더욱 당황을 금치 못했다.

“실력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데려와. 아니다, 와서 한 번 총리를 되찾아보라고 해. 이왕 실력을 검증할 거면 상품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세은의 당당한 말에 사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미스터 도! 제발 진정하세요!”

“이미 충분히 양보했다고 생각하는데?”

고개를 돌린 세은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사노는 그 웃음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세은은 다시 시선을 류난에게로 돌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신성 마법을 소멸시켰다.

“자, 어디 한 번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확인해 보자고.”

세은은 류난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를 제압하고는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일본 통역에게 말했다.

통역은 아직도 경악에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총리를 구하고 싶으면 준비해 놓은 걸 다 보이는 게 좋을 거야.”

“그, 그런! 이건 국제법 위반…….”

“국제법 같은 헛소리 하지 말고.”

세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장난치는 것 같으면 무시하든가. 아, 국제 사회에 성토라도 할 생각인가? 그럼 미국은 어느 편에 들 거지, 사노?”

세은은 정말로 대답을 구하는 것처럼 사노에게 물었다.

사노는 차마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미국은 일본의 편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 수가 있을까?

사노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답은 정해졌군.”

세은은 다시 통역을 보며 말했다.

“자, 그럼 어디 준비해 놓은 걸 다 보여줘 봐.”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웃음이 세은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통역은 어쩔 줄 몰라 붙잡힌 류난을 바라보았다.

통역과 시선이 마주친 류난이 격렬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통역이 천천히 문 쪽으로 뒷걸음을 치다가, 세은과 어느 정도 거리가 확보되었다고 생각되자 재빠르게 밖으로 튀어 나갔다.

총리가 잡혔단 사실을 국무대신에게 알려서 미리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미스터 도,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통역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정신을 차린 사노가 물었다.

사노의 물음에 세은은 빙긋 웃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고 해야 하나.”

“예?”

“혼자 사는 게 아니라서 사회를 생각하다 보니까 신경 써야 할 게 많단 말이야.”

“당연한 말 아닙니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사회 없이 혼자서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런데 그 신경 쓴다는 것이 상당히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말이지. 그런데 애초에 합의 된 상황을 뒤엎고, 대놓고 협박을 하는 놈들까지 봐줘야 하나?”

“그래도 한 국가의 총리를 겁박하는 것은…….”

“미국에서 소문 낼 거야?”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류난과 세은이 단둘이 대화하다가 일어난 일이라면 모를까, 미국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노가 같이 있을 때 일어난 일.

국제 사회에 알려봤자 미국에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나는 떠들 거 없고, 미국도 소문 안 낸다 하고, 그렇다고…… 흐음, 설마 쪽팔리게 이놈들이 스스로 떠벌리겠어?”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도 떠벌릴 사람이 없었다.

세은의 말에 사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뭐가 문제야?”

사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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