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69화 (69/225)

# 69

20. 혼자서도 잘합니다 (3)

약속했던 열흘이 지나고 세은은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흐음.”

생각보다 딱딱 맞춰서 보내주는 미국의 태도에 세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에린을 설득하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더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마치 포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뭐…… 포기한 거면 편하지만 말이야.”

세은은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나름대로 미소를 지었다.

굳이 귀찮은 일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그로서는 환영이었다.

“어느 정도는 주는 만큼 돌려줘야 하지만, 좋은 관계가 유지되면 좋은 거지.”

세은이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교류를 통해 각자 방어가 가능한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에린 같은 사례가 다시 나올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러나 에일린의 힘이 자신을 제외하고도 지구에 통한다는 걸 확인한 이상 문제없을 것 같았다.

치유 능력자들이 각국에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할 터였다.

그럼 세은은 혹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왕들의 동향에만 신경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출국 심사를 받으려는 세은에게 사노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상부면 어디?”

“백악관입니다.”

“백악관에서 갑자기 왜?”

“저…… 그게…….”

사노가 말끝을 흐렸다.

“말해.”

“한국 정부에서 에린의 입국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세은이 되물었다.

한국 정부가 에린의 입국을 왜 거절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사실을 미리 미국에 통보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입국 거절을 할 거라면 현장에서 하는 것이 타당했다.

“한국에 연고도 없고, 미성년자인데다가, 재산도 없어서…… 입국 거절 사유가 된답니다.”

“헛소리야.”

세은이 사노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봐도 미국 정부에서 손을 쓴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저, 저도 더 이상은 전달받은 것이 없습니다.”

매우 심기가 불편한 세은의 태도에 사노가 식은땀을 흘렸다.

직위가 낮은 게 죄라고 생각하면서 사노는 위에서 지시한 말을 세은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일단 에린이 성인이 된다면 상관없다고 하니, 미국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지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목적이야 분명하기는 한데, 정말로 이 방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세은이 불편한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며 물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일단 상부에서는 이렇게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아니면 일본에 잠깐 들러서 가는 것도 어떨까 합니다.”

“일본?”

“마침 일본에서 저번의 일에 대해 마무리할 것도 있고 말입니다.”

“휴우.”

짧게 한숨을 쉰 세은이 팔을 뻗어 사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와락―

순식간에 멱살이 잡힌 사노가 깜짝 놀라 말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미스터 도.”

“왜 이러십니까?”

세은은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말로 몰라서 물어?”

세은의 물음에 사노는 속으로만 소리를 질렀다.

‘미친!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어?’

잠시 사노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세은은 어차피 소용없단 사실을 깨닫고 풀어주었다.

“커억.”

졸렸던 목이 풀리자 사노는 기침을 내뱉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다 해. 숨기지 말고.”

“그, 그게…….”

세은의 말에 사노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위에다가 지랄하는 거 보기 싫으면 말 돌리지 말고 원하는 거 말해.”

세은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사노에게 말했다.

수틀린다고 전부 뒤집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면 대화 시도를 해봐야 했다.

“위, 위에서는 에린이 미국을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인이 원한다면 남긴다고 했을 텐데.”

“그, 그게 불가능하다면 각성자 육성법을 저희에게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연구에 충분히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그게 진척이…….”

당연했다.

자신들이 다룰 수 없는 신성력에 대해 연구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처음에 세은이 케인에게 마나나 오러를 연구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을 했지만, 치유 능력에 대한 메리트에 눈이 먼 미국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부분까지 세은이 설득해 줄 의무는 없었다.

“그게 내 탓인가?”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꿀꺽.

침을 한 번 크게 삼킨 사노가 마지막 제안을 전달했다.

“……위의 두 개가 안 되면 다른 나라에 각성자 육성법에 대해 도움을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은은 사노를 보며 물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연구를 하고 있나?”

“우리 측 동향을 파악한 몇몇 나라들은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세은을 초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부분이 미국의 불안감을 자극한 것이었다.

아직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한 연구 분야.

혹시나 다른 나라에서 먼저 앞서 나간다면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의 주도권을 소실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세은을 초청할 정도의 힘을 가진 나라들이라면 더욱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세은이 딱딱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헛수작 부리지 말라고.”

세은이 제안 중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자 사노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 그럼 마지막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사노는 세은의 기분이 더 바닥을 치기 전에 새로운 제안을 꺼내들었다.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일본에 들러서 가시기를 바랍니다.”

“일본?”

세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처음에도 사노가 일본을 경유하라고 제안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일본 정부랑 무슨 거래를 했나본데.”

“…….”

사노는 이번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뭐 좋아. 단순히 일본에 들렀다가 돌아가면 되나?”

이 부탁까지 들어주지 않으면 정말로 크게 한바탕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세은이 한발 물러섰다.

케인 때문에 미국과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했다.

6서클 마법사는 정말로 중요한 자원 중에 하나니까.

“일본 정부와 협력을 했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같은 동북아시아에서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일본이랑은 얘기가 다 끝났나 보군.”

“그, 그렇습니다.”

“조건은?”

미국이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첨병으로 생각하고 있단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논할 때 일본을 제하고는 얘기가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다행히 이 제안에 세은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사노가 진정을 하며 대답했다.

“한미일 삼국이 긴밀히 협조하여 게이트에 대처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전부야?”

“아, 물론 일본 정부에서 미스터 도에게 사과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겨우 사과로 끝내겠다, 이 말인가?”

“무, 물론 보상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필요 없어. 돈이야 이번에 미국에서 많이 받았으니까.”

“그럼 무엇을 원하십니까?”

“일본한테 자꾸 역사나 영토 문제로 개소리하지 말라고 해. 헛소리 들을 때마다 성질이 나니까.”

‘결국 역사 문제인가.’

사노는 예상했던 대답 중에 하나가 나오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아주 허무맹랑한 일은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춰 전략을 짠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

“물론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많이 양보했으니,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세은은 사노에게 경고를 날렸다.

딱히 세은의 애국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투철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 만행은 도가 지나친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거기에 잘못을 반성하지 않았던 언행은 애국심이 크지 않은 세은이 보기에도 매우 불쾌하고 불편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봤을 땐 한국인이 아니라도 가슴이 불편했다.

돈은 미국에서 충분히 받았다.

일본에게 따로 원하는 게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할 수가 있었다.

여전히 반성을 하지 않으며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여론을 호도하고 있었다.

세은의 뜻을 전달받은 사노가 항공기 안에서 다시 얘기를 나누기로 하고 위에 연락을 취했다.

“그럼 일단 출국 심사부터 받고 나중에 뵙겠습니다.”

“잠시 후에 보지.”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미합중국은 약속을 지킵니다.”

“안 지켜도 돼. 손해 보는 건 내가 아니니까.”

“하하.”

아직 날이 서 있는 세은의 말을 들으며 사노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 *

세은과 일행은 결국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노와 세은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상부에서 어지간한 것은 다 들어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일본이 과거에 잘못을 한 건 사실이었고, 미국 내에서도 위안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 여론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만한 거래가 없었다.

미국에서 다른 루트를 통해서 일본에 현재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어떻게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한 상태였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일본 관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거리 비행을 했는데 쉬는 시간은?”

장거리 비행은 피로보다 실내에 오랫동안 있어야 하는 게 가장 불편했다.

땅을 밟았는데 바로 일을 하기 위해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다른 일행들은 장거리 비행에 매우 지친 상태였다.

“호텔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잠시 들렀다가 이동하기를 원하면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나는 상관없는데 일행들은 쉬면 좋지.”

“아! 당연합니다. 미스터 도만 가셔도 충분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채연이 물었다.

“저희만 쉬어요?”

“장거리 비행해서 피곤할 텐데 쉬고 있어.”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에린이 물었다.

세은은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에린의 얼굴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호텔에서 언니랑 아저씨랑 쉬고 있어.”

“아, 아저씨는 아닙니다.”

아저씨란 호칭에 재호가 반박했다.

“띠동갑보다 차이 많이 나면 아저씨 맞잖아요.”

채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크윽!”

재호가 짐짓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일행은 그렇게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호텔로 이동했다.

일행을 호텔에 내려두고 세은은 그대로 총리 관저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지는군.”

세은이 사노와 둘이 남은 차 안에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별 생각 없이 움직였던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도착했습니다.”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차가 멈췄다.

차밖엔 통역이 가능한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은 상이십니까?”

세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접대용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총리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옆에 분은…… 사노 상 맞으신가요?”

“맞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안내원이 사노의 신분까지 확인하고 몸을 돌려 안내를 시작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세은과 사노가 바로 수상이 기다리는 접객실로 안내 되어 들어갔다.

“오! 반갑습니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총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둘을 맞이했다.

“일본의 수상인 오오토노 류난입니다.”

세은은 손을 뻗어 수상의 악수를 받았다.

“소문이 자자한 분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신기합니다.”

류난은 예의상 몇 마디 더했지만 세은은 대충 대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길게 끌 필요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사노는 세은의 말에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현재 전 미합중국의 의견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았습니다. 제 의견이 미합중국의 의견입니다.”

“인정합니다.”

“그럼 미일한 삼국의 동맹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노의 말과 함께 협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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