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20. 혼자서도 잘합니다 (2)
“음?”
뉴 헤이븐의 게이트를 정리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세은은 어딘가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채연과 재호와 인사를 나누는데, 무언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뉴 헤이븐에 다녀오기 전과 미묘하게,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분위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도저히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분위기가 아니었다.
‘재호 씨한테 물어봐야 하나.’
아무래도 성격상 채연보다는 재호가 더 편안하게 말해줄 것 같았다.
세은은 케인이 가르쳐 준 공식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던 재호에게 다가갔다.
“재호 씨.”
“아, 네!”
세은이 온 뒤에도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연구에 몰두하던 재호가 세은이 다가오자 그제야 들고 있던 노트를 내려놓았다.
“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나요?”
세은의 물음에 재호가 당황했다.
설마 자신에게 물어볼 줄 몰랐던 것이다.
일행 중에 가장 어린 에린이 전투에 뛰어든 일을 곧이곧대로 말하기에 곤란한 부분이 있었다.
“무슨 일이라니요?”
그렇다고 아예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재호가 최대한 머리를 돌려 방향을 케인에게로 돌렸다.
“궁금한 일이 있으면 케인에게 물어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말이네요.”
재호의 대답을 들은 세은은 확신했다.
어차피 케인을 방문했어야 하기 때문에 세은이 어깨를 으쓱거리고 재호와의 대화를 끝맺었다.
세은은 빨리 일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곧바로 케인을 만나러 움직였다.
케인이 실험에 몰두하다가 세은이 도착했단 소식에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 세은! 뉴 헤이븐에 대한 간략한 보고는 들었네. 직접 게이트를 없애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말일세. 이럴 때는 몸이 여러 개였으면 하는 바람이네.”
“에린은?”
“허허. 안에서 힘의 성질에 대한 실험을 도와주고 있다네. 아주 굳건한 아가씨야. 나이가 어리지만 그 어떤 각성자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정신을 지녔네.”
케인은 실험을 진행하면서 에린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실험 자체가 에린의 힘을 분석 및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만큼, 어지간한 각성자들의 수련보다 더 많은 힘을 뽑아내야 했다.
거기에 여러 가지 상처에 대한 치유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상처를 지켜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상 한 번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거기에 정의감도 투철하지. 미합중국 시민의 표본 같은 모습이라네.”
케인은 세은이 묻지도 않은 일까지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부상을 치료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직접 전투에 뛰어드는 용기! 에린의 능력으로 버프를 받은 각성자들과 합심해서 빠른 시간 안에 웨이브를 정리했다네. 실전 한 번 겪어보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망설임 없이 뛰어들 수 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뿐일세.”
세은은 분위기가 조금 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흐음……. 그래서였나.”
가장 어린 에린이 전투에 참여하게 놔뒀다는 사실 때문에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뀐 것 같았다.
딱히 큰 잘못이 아니지만 그래도 에린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모두가 생각했던 탓이었다.
생각보다 별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은은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접고 사노에게 물었다.
“게이트까지 다 닫았으니 이제 귀국하려 하는데. 항공편 준비해 주지.”
열심히 통역을 하던 사노는 세은의 말에 대답했다.
“아, 바로 가시려는 겁니까?”
“거래가 끝났으니 돌아가야지.”
세은의 말을 들은 사노가 케인에게 물었다.
“케인, 미스터 도가 귀국하려고 한답니다. 실험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벌써 돌아가나? 실험이야 할 일이 차고 넘치네만…….”
“거래가 끝났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흐음. 그거 아쉽구먼. 그래도 열흘 정도는 더 시간을 줬으면 하는데.”
케인과 얘기를 나눈 사노가 세은에게 말했다.
“미스터 도. 케인이 현재 하고 있는 실험의 마무리에 최소 열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없습니까?”
“열흘이라.”
잠시 고민하던 세은은 사노에게 말했다.
“일행들에게 물어보고 알려주지. 여기 와서 제대로 관광도 못했으니까.”
“부탁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일본 쪽은 어떻게 됐어?”
“일본 말입니까?”
“그래, 그 뒤로 아무런 말이 없는데?”
세은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갑작스런 질문에 사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세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잠시 잊고 있다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전에 펜 국장과 회의를 나눴던 이후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장관은 일본과 연대해서 영향력을 확장시킬 계획 때문에 더 이상 일본을 압박하지 않고 있었다.
“하하…… 얘기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상하네…….”
“뭐가 말입니까?”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은데 말이야.”
“저희를 믿으시죠.”
사노는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날카로워진 세은의 눈이 조금 유하게 풀어졌다.
“뭐, 알아서 하겠지.”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니 세은은 좋게 좋게 넘어갔다.
어차피 보상이 필요하다기보다 자신이 은원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려주는 게 목적이었다.
세은과 사노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에린과 함께 할 수 있는 기간이 열흘로 제한이 걸린 케인은 급하게 실험 계획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것과 이거, 그리고 저것은 제외하도록 하지. 시간이 촉박해! 열흘이면 최대한 중요한 실험만 진행해야 한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실험은 어떻게 합니까?”
“취소해.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한다.”
“썰!”
케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연구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진행하던 실험이 취소되자 에린은 휴식 시간을 부여 받았다.
“오빠!”
실험실 밖으로 나온 에린이 사노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세은을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달려왔다.
와락―
며칠 만에 보는 세은의 모습에 에린은 강아지처럼 세은의 품에 안겼다.
“잘 지냈어?”
자신의 가슴 높이까지 겨우 닿는 에린이 품에 안기자 세은은 자상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네, 잘 지냈어요. 다들 잘 대해줘요.”
“그럼 다행이네.”
“헤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세은의 말에 에린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전투에 참가했어?”
“네네?”
“아직 실전에 참가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참가한 것 같아서.”
“……어, 어떻게 알았어요?”
에린은 방금 전에 케인이 얘기한 것을 몰랐다.
덕분에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세은을 바라보았다.
“그냥 느낌으로.”
방금 전에 케인과 세은의 대화를 번역하던 사노만 피식 웃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나이에 어울리게 영락없이 애였다.
물론 실험에 들어가 집중하는 모습이 전혀 아니지만.
세은은 굳이 에린의 의견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신성력은 몬스터들과 상극인 만큼, 몬스터들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어느 정도 신성 마법을 터득하기 전에 전투의 전방에 나서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거기다 에린이 아직 어린 나이가 사실 역시 한몫하고 있었다.
“뒤에서 치료만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했는데 왜 나섰어. 누가 시켰어?”
세은의 질문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노가 놀랐다.
설마 자신들이 시킨 것으로 오해를 할까 봐서였다.
그러나 에린은 곧장 고개를 저어 세은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요. 제가 그러고 싶어서요.”
“왜?”
세은의 말에 에린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세은은 그런 에린을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사노는 다른 사람들한테와는 다르게 에린에게 자상한 모습의 세은을 보며 머릿속의 정보를 갱신했다.
‘아이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는군. 의외의 모습이야.’
언젠가 써먹을 수도 있을 만한 중요 정보였다.
나중에 세은의 아이라도 생긴다면 유용한 정보가 될 것이니까.
딱히 그것이 아니어도 ‘아이’를 이용한다면 세은의 도움을 받는 게 수월해질 수도 있을 일이었다.
사노가 세은에 대한 정보를 갱신하는 동안 생각을 마친 에린이 세은에게 대답했다.
“그냥, 저도 싸우고 싶었어요. 빌딩에 갇히기 전부터요. 그런데 현장에 가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했어요.”
“어떻게?”
“잘 모르겠는데…… 몬스터들에게서 기분 나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운이 풍긴데다, 어쩐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들었어요.”
‘신성력 때문인 것 같은데.’
세은은 에린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몬스터들이 내뿜는 특유의 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사제와 성기사들의 특징이었다.
사기를 배척하는 신성력이 날카롭게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자신감은…… 아마도 몬스터가 약해서인가?’
“어떤 몬스터들을 상대했는데?”
“놀이요…….”
세은이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말을 듣지 않은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에린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놀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네.’
신성력은 사기나 마기와 상극인 만큼 상대방의 힘에도 민감했다.
한쪽이 모자라면 바로 잡아먹히는 관계인 만큼 상하관계에 예민했는데, 놀 정도의 사기면 지금의 에린으로서도 충분히 자신감이 들 수 있을 정도였다.
세은이 잠시 생각에 잠기자 화났다고 생각한 에린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응?”
생각에 잠겨 있던 세은이 에린의 사과에 싱긋 웃었다.
커다란 손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그래도 다음부터는 마음대로 들어가면 안 돼.”
“……네.”
“약속하는 거야.”
“네…….”
약속을 받은 세은이 에린에게 물었다.
“치료하는 건 싫어?”
“아니요.”
에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뒤에서 보호 받는 기분이 드는 게 싫어요.”
“치료하는 게 왜 보호 받는 거야?”
“결국 뒤에 있는 거잖아요. 더 이상 뒤에 있기는 싫어요.”
힘이 생겼음에도 누군가의 뒤에서 지원만 하는 것이 싫었다.
이 생각은 놀과 직접 싸우면서 더욱 굳어졌다.
뒤에서 지원하는 것보다 앞에서 같이 전투를 하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흐음.”
작지만 단호한 에린의 말에 세은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자신과 함께하는 한 딱히 에린이 앞에 나설 필요가 없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나설 일이 없을 텐데?”
“저번처럼 항상 같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세은이 뉴 헤이븐으로 갔던 일을 상기시키며 에린이 대답했다.
에린의 의지가 생각보다 강하단 것을 세은은 느꼈다.
‘그럼 일단 성기사 쪽에 재능이 있나 가르쳐 봐야겠네.’
에린이 하고 싶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재능 있는 분야가 다른 법이었다.
그녀가 치유보다 전투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해도 성기사들의 신성 마법에 재능이 없다면 힘든 일이었다.
“그럼 일단 수련을 해보고 다시 얘기하자.”
당분간은 전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세은이 제안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에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정말요?”
“응. 어차피 배우기는 배워야 하니까.”
모든 신성 마법을 세은처럼 발휘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 수준으로 사용 할 수만 있다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수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성기사와 사제 중에 어느 쪽으로 더 재능이 있는지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헤이! 에린! 다음 실험에 들어가자고!”
어느새 실험 순서를 정리한 연구원이 에린을 불렀다.
연구원의 부름을 들은 에린은 세은에게 다시 한 번 와락 안겼다.
“고마워요! 그럼 일하고 올게요.”
“그래. 다녀와.”
에린은 환하게 웃으며 실험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