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19. 초대(2)
“내가 조금 늦었군.”
“아닙니다.”
장관의 말에 펜이 고개를 저었다.
장관은 멀뚱히 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은과 일행을 보며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미국을 도와준 영웅들을 보니 반갑군. 누가 세은인가?”
재빨리 장관의 말을 통역한 사노가 세은이 누구인지 장관에게 일러주었다.
“오. 보고로만 듣던 사람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영광이군. 나는 미국의 국방 장관인 앤서니 도널드일세.”
세은은 간단하게 앤서니의 인사를 받았다.
“조금 늦은 건 이해해 주기를 바라네.”
앤서니가 말을 하며 사노에게 눈짓을 하자 사노가 세은을 제외한 일행들에게 말했다.
“자, 다른 분들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로요?”
채연과 재호, 그리고 에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노가 에린을 제지했다.
“아, 두 분만 잠깐 비켜주시면 됩니다.”
“왜요? 있으려면 다 같이 있어야죠.”
에린이 사노에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에린의 말에 사노가 당황했다.
“장관님을 뵐 수 있는 건 한정된 사람뿐입니다.”
“그럼 저도 안 만날래요.”
어린아이의 치기로 보이는 행동에 사노가 살짝 인상을 굳혔다.
하지만 이미 에린이 한국으로의 귀화로 하고 싶다고 말한 상황에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기는 애매했다.
“아니야. 어차피 있어봤자 할 말도 없는걸. 나중에 에린이가 우리한테 얘기해 주면 되지.”
채연이 에린에게 말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사노는 채연이 자신을 돕자 반색했다.
“그래도 같이 있고 싶은걸요?”
“괜찮아. 여기 있으며 쉬지도 못하고 힘들어. 다른 곳에서 쉬고 있을게.”
“저도 쉬고 싶은데…….”
그러나 채연은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사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돼요?”
“나가면 직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잘 얘기하고 와!”
채연은 볼이 살짝 부어오른 에린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재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채연과 재호가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정말로 만나고 싶었네. 우선 이렇게 마주하게 되어 반갑다고 말하고 싶군.”
앤서니는 바로 옆의 에린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물론 어린 숙녀분도, 미합중국의 기대되는 인재가 아닐 수 없네.”
그 말을 들은 에린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기도 전에 앤서니가 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특히 대통령께서도 이번 사안에 대해 당연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조만간 사태가 완전히 진정이 되면 각하께서 그대를 부를 가능성이 높네.”
“귀찮은데…….”
세은의 말에 통역을 하던 사노가 크게 당황했다.
순간 말을 순화해서 할까 했지만, 에린이 있는 것을 상기했기에, 솔직하게 장관에게 세은의 대답을 전달했다.
“하하하. 딱 보고 받은 그대로군. 하지만 국가의 영웅인 그대를 그냥 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이해해 주게나.”
앤서니는 노련한 정치가답게 세은의 말에도 안색하나 바뀌지 않고 호탕하게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직접 만나려고 한 건 자네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보다 더 전략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네.”
말을 마친 앤서니가 펜을 돌아보자 그가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세은에게 내밀었다.
“보면서 얘기하지.”
세은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자네가 미국에 치료 능력자를 더 육성해 주거나, 아니면 육성 방법을 전수해 주기를 바라고 있네.”
앤서니는 힘 있는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건 단순히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네.”
“그런데 말이야.”
한글로 작성된 서류를 훑어보던 세은이 말했다.
“왜 다른 나라에 육성법을 가르칠 때는 미국과 협의를 해야 하지?”
“원래 계약 기간 동안 서로에게 충실한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너희 말대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면 다른 나라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지 않겠어?”
세은의 말에 앤서니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앤서니의 모습에 세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 어떤 생각인지는 말 안 해도 알겠고. 이런 조건은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 다시 가져와.”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보지 그런가?”
앤서니의 말에 세은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너희들 도와준 것도 좋아서 도와준 거 아니야. 사람들 죽어가니까 도와준 거지. 헛소리하지 말고, 얌전히 도움이나 받아.”
세은의 신랄한 말에 앤서니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런 앤서니의 표정을 보면서도 세은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치료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니까, 기대 버리고.”
“크흠…….”
세은의 말에 실내의 공기가 싸하게 식었다.
그러나 할 말을 다 마친 세은은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끝까지 마셨다.
“하여튼 도와줄 용의는 있다는 말인가?”
굳어버린 앤서니를 대신해서 펜이 물었다.
세은은 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도와주지 않았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제야 앤서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보다 상당히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하여튼 우리 미합중국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네. 옆에 있는 어린 숙녀분도 앞으로 잘 부탁하고.”
“저는 한…….”
“하하. 그렇습니다. 정말 좋은 일입니다.”
장관의 말에 에린이 대답하려고 하자, 펜이 다급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지금 분위기에서 에린이 한국으로 귀화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면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일단 하나 막고 보자는 생각으로 다급히 에린의 말을 막은 펜이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장관님께서는 다음 일정이 있으시니 이만 자리를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큼! 그래야 할 것 같군. 짧았지만 좋은 만남이었네.”
앤서니가 표정 관리를 하며 세은에게 악수를 청했다.
세은 역시 내민 손을 마다하지 않고, 앤서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럼 이만.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앤서니가 인사를 마치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펜과 사노는 문 밖까지 장관을 따라나섰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너무 솔직하니 당황스럽군.”
자리에 다시 앉은 펜이 세은에게 말했다.
“조금은 부드럽게 말해도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왜?”
펜의 말에 세은이 말했다.
“원래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못 알아들어. 직접적으로 아닌 건 아니라고 해줘야 알아듣지.”
“괜히 돌려 말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필요할 때나 그런 거지. 굳이 내가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도시 하나가 거의 궤멸되는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다른 나라에 알려주는 행위에 대한 금지 조항을 넣으려 했던 미국의 행태에 기분이 상한 세은이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지금 아무 말 없이 따라주니까 내가 을인 줄 아는 것 같은데. 주도권은 나한테 있어. 아무리 말해도 몰라?”
“……크흠.”
방금 전의 서류에 기분이 나빠진 세은이 정곡을 찌르자 펜이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하여튼 돕기로 한 건 도울 테니까 케인보고 보자고 해.”
“알겠네.”
세은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다 끝났지? 안내해 이제.”
세은의 말에 사노가 세은과 에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세은을 뒤를 종종 따라가면서 에린이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이렇게 말해도 돼요?”
“응.”
“그래도 너무 세게 말한 거 아닌가 해서…….”
“원래 오냐오냐해 주면 더 그러는 거야. 한 번은 직설적으로 말을 해줘야 해.”
“그래도 장관인데…….”
에린의 걱정에 세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
세은의 손길에 얼굴이 빨개진 에린이 수줍게 대답했다.
에린이 생각해도 자신을 구해줬던 세은의 모습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 * *
“자네와 비교하면 차이가 얼마나 나겠나?”
“비교가 안 돼.”
“허허. 그럼 어느 정도나 치료할 수 있는가?”
“예상으로는 관통상은 응급처치 정도. 베인 상처나 찰과상은 완벽하게 치료 가능하고.”
“어느 정도 관통을 말하는 건가?”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해.”
“실험을 해본 적은 없나?”
“다친 사람이 있어야 실험을 하지.”
“간단하게 상처를 만들어서라도…….”
“뭣하러 그런 짓을 해? 알아서 잘할 텐데.”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알아두면 좋지 않나?”
“그럼 지금 해보든가.”
“오! 그래도 되나?”
세은의 말에 케인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런데 자원할 사람이 있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네.”
세은의 허락을 받은 케인은 바로 전화를 연결했다.
“간단한 실험 자원자 좀 보내주게. 관통상이랑 찰과상, 자상의 치료를 시험할 예정이라네.”
달칵―
간단한 지시를 끝내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케인이 말했다.
“이제 20분 정도 기다리면 지원자들이 올 거라네.”
“이걸 지원할 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럼, 많지.”
둘의 대화를 통역하고 있던 에린이 긴장한 표정으로 세은에게 말했다.
“만약에 제가 치료를 못하면 어떻게 해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낸다는 말에 겁을 먹은 에린이 물었다.
세은이 그런 에린을 보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고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헤에…….”
담담한 세은의 말에 에린이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말일세…….”
“그러면 이런 건 어떤가?”
“오, 여기서 이게 그렇게…….”
똑똑―
“누군가?”
“연락 받고 지원 왔습니다.”
“오! 어서 들어오게나.”
세은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케인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으니 어느새 지원자들이 케인의 실험실에 도착했다.
지원자는 총 네 명이었는데 모두 오러 유저로 보였다.
“이렇게 선뜻 지원해 주니 고맙네. 나중에 갈 때 소속이랑 이름 꼭 적어두고 가게.”
“저희야말로 케인 팀장님의 실험에 참여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잠시 인사를 나눈 이들은 금방 누가 어떤 상처를 입을 것인지에 대해 의논을 시작했다.
잠깐 동안의 대화가 끝나고, 각자 관통상과 찰과상, 자상, 그리고 독에 중독되는 사람으로 역할을 모두 나누었다.
“한 번에 네 명은 무리겠지?”
“상관은 없는데…… 미리 상처가 나면 아프겠지.”
“허허, 그렇구먼. 그럼 한 명씩 해야겠네.”
케인의 시작 신호와 함께 한 사람이 먼저 자신의 몸에 찰과상을 냈다.
자해보다는 다른 사람이 내주는 것이 쉽기에 다른 동료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눈앞에서 사람이 다치는 것을 생생하게 보는 게 처음인 에린이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자, 한 번 그동안 배운 대로 치료해 봐.”
“네!”
에린은 두 눈을 찌푸리고 천천히 찰과상에 손을 가져갔다.
“히, 힐링!”
우웅―
에린의 시동어와 함께 작지만 하얀 빛이 상처를 감쌌다.
“오오!”
30여 초가 지나고 빛이 사그라지자 찰과상이 완벽하게 치료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단하군! 자네 비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치료했어. 바로 다음 실험을 해보지!”
에린은 그 뒤로 자상과 관통상까지 바로 치료를 시도했다.
너무 깊지 않은 자상은 완벽하게 치료했지만, 깊은 자상은 조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또한 관통상은 정말로 응급처치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우웅―
완벽하게 치료되지 못한 상처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은이 바로 치료해 주었다.
“자! 그럼 이제 독으로 가볼까?”
케인이 의욕에 넘쳐서 외쳤다.
치료 능력자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였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세은의 도움을 받아 치료 능력자를 보유한다면 지금의 실험 결과가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다.
“자! 다 끝났네!”
“수고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자네들이 더 수고했네.”
케인이 실험에 참가한 각성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왜 입술이 또 튀어나왔어?”
에린의 입술이 오리처럼 쭉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한 세은이 물었다.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말해봐.”
세은의 말에 에린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냥 저도 오빠처럼 더 치료를 잘하고 싶어서요.”
“그러려면 한참 더 연습해야지.”
물론 연습을 한다고 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만, 굳이 지금부터 의욕을 꺾을 필요는 없었다.
“빨리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그래.”
잔뜩 들뜬 모습으로 다음 실험에 대해서 자료를 가져오는 케인을 보며 세은은 에린의 말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