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19. 초대(1)
사노의 연락을 받고 특수 국토 안보국의 본부로 가게 된 일행은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덜컥―
이윽고 비행기가 완전히 이륙하자 채연이 물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나 보네요?”
세은이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의논하고 싶은 것도 있다고 하네.”
처음에 올 때보다도 훨씬 신경을 쓰고 있단 사실을 비행기 내부의 수준에서도 알 수가 있었다.
특히 국장과 장관이 세은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했다.
에린에 대한 보고를 사노를 통해 받았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퍼스트 클래스의 좌석에 몸을 뉘고 있던 세은은, 번뜩 에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사노한테 한국 가고 싶다고 말 안 했어?”
에린이 대답했다.
“아직 안 했어요.”
“국장이랑 장관은 나보다 에린을 더 보고 싶어 하는 거 같던데.”
사노와 했던 전화 통화를 상기한 세은이 유난히 에린에게 관심이 많던 사노를 떠올리며 말했다.
“관심 없어요.”
“그래도 말은 해야지.”
“이번에 가서 말을 하면 되죠.”
“순순히 안 보내려고 할걸?”
“안 보내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어차피 보내줘야 할 텐데.”
당돌한 에린의 말에 세은이 미소 지었다.
“그래도 붙잡으려고 할 텐데.”
“미리 막아주세요.”
“내가 막으면 이상하지.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지.”
“저 어린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어른도 아니잖아.”
“우씨!”
에린은 세은의 말에 양 볼을 가득 부풀렸다.
가끔은 시니컬한 것 같으면서도, 또 가끔 또래의 모습을 보이는 에린의 모습에 세은이 웃었다.
다른 일행들도 그런 에린을 보며 즐겁게 웃음을 지었다.
초반에 언어가 통하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언어의 습득이 매우 빨랐다.
통역사가 없어도 아주 어려운 단어가 아니면 무리 없이 대화를 나눌 수준이 되었다.
오히려 가끔은 에린이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도 수도에 가는 거니까 관광도 할 수 있겠죠?”
“그렇지? 지금은 일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
채연과 재호의 대화를 듣던 에린이 말했다.
“저 워싱턴에 처음 가봐요.”
“진짜? 하긴 미국이 워낙 크니까.”
“같은 국내 여행이어도 우리나라랑 길이부터가 다르지.”
“맞아요. 땅이 많이 넓어요.”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에 대해서 한참을 얘기하던 일행은 끊임없이 대화의 꽃을 피웠다.
그렇게 편안한 비행기에 몸을 맡긴 일행은 그 뒤로도 지루한 비행시간을 대화로 채우며 특수 국토 안보국이 있는 워싱턴DC에 도착했다.
로널드 레이건 국립 공항에 내린 일행은 미리 준비된 차량을 타고 바로 안보국으로 이동했다.
“와…… 여기는 정말 도시 같네.”
“생각보다 건물은 안 높은데요?”
“여기는 법으로 건물 높이를 제한하고 있어서 그래요.”
“아, 정말?”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일행은 제대로 된 도시의 모습에 마치 관광객이 된 듯했다.
미국인인 에린 역시 워싱턴DC에 오는 것은 처음이인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끼익.
“도착했습니다.”
고풍스러운 흰색으로 채색된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리니 케인과 사노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미스터 도. 오는 길은 편안했습니까?”
“괜찮았어.”
“세은! 전에 준 마정석은 잘 사용했나?”
“아, 목적과는 달라졌지만 잘 사용했어.”
“그거 다행이군. 자네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말일세!”
케인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치료 능력을 얻었단 소녀는 어디에 있나?”
에린이 이미 차에서 내린 상황이었다.
거기에 일행 중에 유일한 서양인을 못 알아보진 않았을 터.
케인의 행동은 누가 봐도 능청을 떨던 것이었다.
빤히 보이는 장난에 세은이 피식 웃으며 에린을 앞으로 불렀다.
“에린, 이리 와.”
“오. 이 숙녀가 바로 그 사람입니까?”
사노가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노 와트입니다. 레이디.”
“……저는 에린 클로에예요.”
과장되게 예의를 갖춘 사노의 모습에 에린이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허허. 나는 케인 카펠로라고 하네. 미국의 홍복을 보니 매우 반갑네.”
“아, 네. 반가워요.”
에린은 살짝 경계심이 깃든 얼굴로 세은의 뒤에 위치했다.
그 모습을 본 사노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숙녀분이 긴장하신 모양이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러지.”
사노는 일행을 안내해서 국토부 안으로 들어갔다.
국토부 안에는 수많은 각성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확실히 한국보다 수준이 높네.’
세은이 내부를 둘러보자 케인은 내심 자랑스러운 어조로 세은에게 물었다.
“어떤가?”
“어떠냐는데요?”
케인의 말을 들은 사노가 통역을 하기 전, 세은의 뒤에 딱 달라붙어서 걷고 있던 에린이 빠르게 통역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세은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에린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트렸다.
“헤헤.”
세은의 손길이 머리에 닿자 에린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도 좋았지만, 신성력을 갖게 된 이후엔 세은에게서 나오는 포근한 기운이 느껴져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세은도 신성력을 가진 에린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겹다고 생각한 교단 생활이었지만, 그동안 생활한 것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긴 한 것 같았다.
사노는 얼마 전에 한국어 교사를 보내준 에린이 꽤 능숙하게 통역을 하자 놀란 토끼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래 영재인가?’
본격적으로 회화를 배운 지 이제 한 달 정도인데 이 정도 수준이라니.
사노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이 정도로 영특하니까 미스터 도가 가르친 걸 수도 있지.’
무엇인가 특별한 점이 있으니까 에린을 가르쳤을 것이라 생각한 사노가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상은 단순한 우연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재능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가르친 것이라고 생각될 만했다.
똑똑―
“국장님, 세은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게.”
사노의 안내를 따라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테가 얇은 돋보기를 끼고 서류를 검토하던 펜은, 세은이 보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오! 세은. 최근에 있던 일에 미합중국의 국민들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하네.”
세은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자리에 앉지.”
어느새 인원 수 대로 다과를 준비한 비서가 탁자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각자의 앞에 찻잔이 하나씩 돌아가자 펜이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자네에게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아. 하지만 지금 제일 궁금한 건 자네가 각성자를 인위적으로 육성한 방법이지.”
펜은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세은을 공략했다.
말을 돌려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펜은 힐끗 눈동자를 돌려 세은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있는 에린을 바라보았다.
꽈악―
에린은 펜이 자신을 바라보자 손을 뻗어 세은의 소매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장관은?”
세은이 물었다.
“장관도 같이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다급한 일정이 생겨서 조금 늦어지실 예정이네. 미안하군.”
“그럼 얘기도 그때 하지. 오자마자 얘기 할 정도로 시급한 일은 아니잖아?”
세은의 말에 펜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 삼십 분 정도면 오실 테니 나와 먼저 얘기를 하고 있지. 어차피 장관님이 오시면 다른 일행들은 잠깐 자리를 비켜줘야 하니까.”
넉살 좋은 펜의 말에 세은이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거렸다.
세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차를 마시자 펜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여튼, 케인 팀장이 꼭 만나고 싶어 하고 있으니 일정이 끝나면 한 번 만나주게.”
“상황을 봐서.”
“안 좋을 상황이 뭐가 있겠나?”
“글쎄…… 그건 얘기를 해봐야지.”
“섭섭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펜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잠시 목을 축이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내가 궁금한 건, 옆에 있는 소녀가 치유 능력을 얻은 것이 사실인가 하는 걸세. 아무래도 보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흐음. 중상만 아니면 가능할 거야. 하지만 아직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아.”
세은의 말에 에린이 살짝 서운한 표정으로 세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무엇이든지 제대로 힘을 다루려면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하니까 말이야.”
“당연한 말이군.”
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가 미국에 있는 동안은 계속 가르칠 생각인가?”
“당연하지.”
세은의 대답을 들은 에린의 표정이 더 찌푸려졌다.
저 질문에 그저 당연하지라는 대답밖에 하지 않다니? 정말로 자신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찌푸려진 에린의 표정에 반해 펜의 표정은 더 없이 환하게 밝아졌다.
“호오. 그거 기대되는군. 아주 커다란 도움이야.”
세은은 이번에도 대답 없이 차만 후르륵 마셨다.
결국 에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요, 저는 한국에 갈 거예요.”
갑작스런 에린의 말에 펜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 세은을 따라 한국으로 갈 거라고요.”
그러나 미국인이 미국 국적을 포기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 할 수 없었던 펜은 다시 되물었다.
“한국에 왜 간다는 말인가?”
“귀화하려고요.”
“……왓?”
에린의 폭탄선언에 일행을 제외한 펜과 사노가 동시에 매우 놀랐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조국을 두고 왜 그 힘 없…… 아니, 한국으로?”
힘없는 나라라고 말하려던 펜은 세은이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급히 말을 바꿨다.
그러나 에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제 가족도 없고, 저를 구해준 건 조국이 아니라 세은이니까요. 세은을 따라갈 거예요.”
“아니…… 너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닌가 하는데. 조국은 모든 것을 줄 수 있어.”
“저는 세은이랑 같이 있는 것 말고는 필요 없어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에린의 태도에 펜과 사노는 당황한 기색이 너무나도 역력했다.
“지, 지금은 그래도 나중에는 조국이 그리워질 거네.”
“아니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에린의 말을 정말 단호했다.
“……허참.”
펜은 신음을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너무 골치가 아픈 일이 생겼다.
당연히 에린이 미국의 각성자라는 생각으로 향후 계획을 세운 것이 꽤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그 계획들은 전부 수정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 무엇을 얻을 수 있던지 우리는 더 좋은 것을 줄 수가 있네.”
세은 일행으로부터 무엇인가 받기로 했다 생각한 펜이 에린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아무 대가 없이 세은을 따라 한국으로 따라갈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받기로 한 거 없어요. 그냥 세은을 따라가는 거예요.”
하지만 에린의 말투는 점점 단호해졌다.
“뭐 준다고 한 적 없어.”
그 와중에 세은이 한 마디를 보탰다.
“너희도 알겠지만 내가 딱히 치료할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세은의 무심한 말에 에린의 눈매가 가늘게 찢어졌다.
말만이라도 필요해서 데리고 가겠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이었기 때문에 서운하지만 흘겨보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하여튼, 저는 마음을 정했어요. 이것도 세은이 직접 말을 하지 않으면 데려가지 않겠다고 해서 말을 하는 거예요. 이주의 자유는 누구한테 있잖아요.”
“…….”
펜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당장 설득하기엔 쉽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미국으로서도 포기할 수 없는 치료 능력자인 만큼 계약 기간 동안 설득할 방법을 찾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 이상 얘기하면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판단한 펜이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화제를 돌렸다.
“하하. 그럼 이 얘기는 나중에 하지.”
“나중에 안……”
똑똑―
에린이 펜의 말에 반박하려고 할 때 국장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관님 도착하셨습니다.”
“오!”
비서의 목소리에 펜과 사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덜컥―
동시에 문이 열리며 훤칠한 키의 중년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