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62화 (62/225)

# 62

18. 새로운 제안(4)

에린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기도를 시작한 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기도를 하는 에린의 몸을 신성력으로 감싸주던 세은이 자신의 것과 다른 신성력을 어렴풋이 느꼈다.

“설마?”

세은은 천천히 자신의 신성력을 거두었다.

“정말 됐어?”

에린은 세은의 신성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얇은 하얀색의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세은의 신성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한 빛이었지만, 분명히 신성력이었다.

“가능하기는 한가 보네.”

세은은 새삼 에일린의 권능에 감탄했다.

하기야 마왕들이 나타나고, 마나와 오러가 있는 시국에…… 신성력이라고 나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럼 다른 종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마 에일린에 대한 믿음이 커지면 다른 종교에서 반발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특히 광신적인 일부의 종교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 지금도 세계적인 문제였다.

“뭐…… 알아서 잘 구분하겠지.”

세은은 그냥 에일린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엔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에린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연장선에 있을 게 분명했다.

세은 자신이 지금 걱정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우선은 에린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기사보단 사제가 낫겠지? 싸울 사람들은 많으니까. 치료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세은은 에린을 사제로 육성할 생각을 굳혔다.

성기사보다 사제가 치료에 훨씬 특화되어 있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직 어리기도 하고.”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를 직접 싸우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특히 신성력이 풍부하지 않은 이상, 성기사는 일신의 무력으로 부족함을 보충해야 했다.

단 한 번도 검술이나 기타 무술을 배워본 적이 없던 에린이 언제 실전에서 사용할 정도로 익힐지도 불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뒤에서 보조를 해줄 수 있는 사제가 훨씬 안전하고 전체적인 전력에도 도움이 됐다.

“사제까지 있으니 진짜로 검사만 있으면 되네.”

궁사와 마법사에 이어 사제까지 일행에 합류하자 어느 정도 구색이 맞춰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부 원거리에서 싸운다는 한계에선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 가면 검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직까지도 기도에 깊이 빠져 있던 에린을 바라보았다.

밝은 금발이 신성력에 물들어 마치 백금발의 화려한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 백인 특유의 하얀 피부와 신성력은 꽤 어울렸다.

“언제쯤 끝나려나.”

에일린이 워낙 말이 많은 여신이라, 세은은 살짝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걸린 제약 때문에 그렇지, 삼 일 밤낮을 얘기로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에일린이었다.

아마도 길면 내일까지도 이 상태일 것 같았다.

“일단 커피나 한잔 마시고 와야겠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기다렸지만, 금방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세은은 기지개를 피며 접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여기는?”

에린이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도 중 무엇인가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몸으로 들어오는 걸 느낀 다음부턴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다만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황홀한 부유감을 느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에린이 눈을 뜨자 곧바로 그 황홀한 느낌은 사라졌지만, 그 여운만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평생 다신 느끼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안락함이었다.

달칵―

“일어났네.”

어떻게 알았는지 세은이 타이밍을 잘 맞춰서 안으로 들어왔다.

“아…….”

천천히 들어오는 세은을 마주 본 에린이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처음 빌딩에서 숨어 있을 때 하얀빛이 둘러싸여 있던 세은을 봤을 때도.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에 갇혀 죽어갈 때 세은을 본 순간에도.

어느 때나 세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과 같았지만, 지금의 그는 또 다른 느낌을 겉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방금 전에 느껴졌던 포근함이 세은에게서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아…… 그…….”

“와…… 힘 좀 썼네?”

처음 느끼는 세은의 분위기에 에린이 당황하고 있을 때, 세은도 에린을 보고 살짝 황당함을 느꼈다.

원래 보통의 사람들이 신전에 입교를 할 때는 모두 일정 기간의 교리 교육을 받는다.

교리를 공부함으로써 믿음과 신앙심을 상승시키고, 일종의 전문가로 키우는 것이다.

그 후 교리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 한해 지금 에린이 하는 것과 같은 명상의 시간을 갖게 된다.

자신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볼 수 있단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굳이 교단을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두 번째 단계부터 시킨 것인데, 생각보다 훨씬 신성력이 강하게 발현되었다.

“이쪽 상황을 알고는 있나?”

하긴, 세은이 이렇게 힘을 끌어다 쓰는데, 모르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이계에서 두세 번 만났을 때 워낙 인간적이다 보니 가끔은 이렇게 과소평가를 하게 되었다.

세은은 잠시 뺨을 긁적거리고는 손바닥을 크게 마주쳤다.

짝!

“아!”

박수 소리에 에린이 정신을 차렸다.

“기분이 어때?”

“어…… 음…….”

아직 신성력이 주는 충만함과 포근함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에린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축하해.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성공했네.”

“아…….”

에린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된 건가요?”

“느낌이 오지 않아?”

앞으로 능숙하게 신성력을 사용하려면 꽤 훈련을 거쳐야겠지만, 그건 세은이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다.

문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었다.

‘한동안 열심히 언어를 배우라고 해야겠네.’

아직도 감격에 빠져 있던 에린을 보고 세은이 생각했다.

급해도 어차피 말이 안 통하면 소용이 없었다.

사노 역시 제대로 가르칠 생각이라고 하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 되었건 미국에 치료 능력을 가진 능력자가 생긴 것이니까 말이다.

세은은 남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에린을 데리고 접객실로 나오면서 사노에게 연락을 보냈다.

* * *

“기본적인 신성 마법이 으음…….”

세은이 에린을 가르치기 위해 알고 있던 지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야 구분 없이 모두 사용하고 있지만, 에린은 원래대로 그 능력의 구분을 지어서 가르쳐 줘야 했다.

안 그러면 몇 번 쓰지도 못하고 신성력이 고갈되어 버리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로 해서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글로 정리하고 있자니 오랜만에 공부하는 기분이 들었다.

매우 귀찮은 일이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신성 마법을 대충 가르친다니, 무엇인가 자존심이 상했다.

세은은 우선 가장 기초적인 치료 마법과 방어 마법의 특성을 자세하게 적었다.

에린이 모를 만한 단어를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게 풀어써야 했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에린의 한국어 실력은 짧은 시간 안에 꽤 능숙해져 있었다.

세은의 연락을 받은 사노가 전폭적으로 한국어 교사를 지원해 주기도 했지만, 에린 본인도 하루 종일 한국어 공부에만 매진하는 것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확실한 설명을 위해서 세은은 최대한 쉬운 말로 풀어서 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내친김에 조금 더 상위의 신성 마법에 대해서도 정리를 시작했다.

그대로 한 시간 정도 지나자 하얗게 비어 있던 종이가 꽤 빽빽하게 채워졌다.

“일단 이 정도면 되겠지.”

세은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는 종이를 들고 접객실로 나갔다.

접객실에서는 채연과 에린이 한국어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받아.”

“이게 뭐예요?”

발음은 조금 어색하지만, 능숙한 한국어로 에린이 물었다.

“일단 보고,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봐.”

종이를 받아든 에린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채연도 같이 종이를 살펴보았다.

“아! 이게 에린이 배울 거예요?”

“응. 맞아.”

“와…… 신기하다.”

“뭐가?”

“오빠 이렇게 종이로 써서 가르친 적 없잖아요.”

채연은 살짝 서운한 듯이 말했다.

“그건 내 전공이 아니라 그런 거지.”

그러나 세은은 담담하게 채연의 말을 넘겼다.

“그렇긴 하겠네요.”

세은의 말에 틀린 건 없었지만, 어쩐지 서운한 기분이 들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와중 에린은 어느새 세은이 준 종이를 읽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꿀꺽꿀꺽.

세은은 맞은편에 앉아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쓰는 건 오래 걸렸지만, 읽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니 기다릴 생각이었다.

채연은 세은이 자리에 앉자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럼 에린이도 오빠처럼 치료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제 배우면 가능해.”

“와…… 저도 배울 수는 없어요?”

“음…… 굳이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계에서도 오러 사용자들이 성기사로 전향하던 경우가 있었지만,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경우엔 오러와 신성력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한 우물만 파는 것보다 못한 상황도 많았다.

“아하.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죠.”

채연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에린이가 자기도 한국으로 같이 가고 싶다고 하던데, 들었어요?”

“응?”

처음 듣는 말에 세은이 채연에게 되물었다.

“처음 듣는데?”

“우리랑 같이 한국으로 가고 싶데요.”

“가서 뭐하게?”

에린이 채연을 잘 따르기는 하지만, 한국과 미국은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태어난 곳에서 사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 생각하던 세은으로선 에린을 데려갈 생각 자체를 해본 적도 없었다.

언젠간 한국으로 부를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필요할 때의 얘기였다.

지금 당장은 에린을 한국으로 데려갈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가족들이 없다고 같이 가고 싶데요.”

“그렇다고 한국을 와?”

“본인이 온다고 하면 괜찮지 않아요?”

같이 지내는 동안 정이라도 들었는지 채연이 물었다.

확실히 에린은 다른 사람보다 채연과 많이 친했다.

채연 역시 에린이 아주 귀여운 동생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한국에 와서 어디서 살아?”

“저랑 같이 살아도 되고요.”

“너 가족이랑 같이 지내잖아.”

“원래 독립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번에 의뢰 완료하면 솔직히 돈 걱정은 없을 거 같기도 하고요.”

미국에서 주기로 한 돈이라면 적당한 집 한 채 구하는 정도는 문제도 아닐 게 분명했다.

“뭐…… 본인이 온다고 하면 내가 관여할 건 아닌데. 아직 어린데 와서 견딜 수 있는지가 문제지. 가족이 없다고 해도 향수병 같은 게 안 생긴단 보장도 없고.”

“에이. 왜 상관이 없어요? 오빠 따라가는 건데요.”

“나를 왜 따라와?”

“살려준 게 오빠잖아요. 그리고 오빠가 능력도 얻게 해주고요.”

“할 수 있으니까 해준 거지.”

“그래도 받은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죠.”

세은은 의외의 말에 고민을 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진 그가 종이에 빠져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에린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따라와도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팀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였다.

다만 아직 열여섯에 불과한 어린 나이가 걸릴 뿐이었다.

‘사노가 알면 난리가 나겠군.’

사노는 미국에도 치료 능력의 능력자가 생긴단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세은에게도 잘 부탁한다며, 미합중국은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세은 역시 당연히 미국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 부탁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일단 마지막까지 잘 고민해 보라고 해. 미국에서 붙잡으려고 좋은 조건 엄청나게 제시할 테니까.”

“네! 잘 생각해 보라고 할게요. 하여튼 오빠도 온다면 싫지는 않다, 이거죠?”

“본인 의사지 내가 막을 것까지야…….”

세은의 말에 채연은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됐어요! 아, 있잖아요. 우리가 쇼핑을 하고 싶어 했다고 위에 보고가 갔나 봐요. 그랬더니…….”

그 뒤로 별다를 거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접객실을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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