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18. 새로운 제안(3)
“……!”
에린은 침대에서 벌떡 이러났다.
간밤에 꾼 악몽 때문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휘유…….”
잠시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던 에린은 주변을 둘러보고 안도감에 긴 숨을 내쉬었다.
열흘 정도가 지나니 깔끔하게 정돈된 숙소의 모습도 눈에 익기 시작했다.
다만 오션시티의 그 사건 이후로부터 악몽은 끊이지 않았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꿈의 기억에 에린의 몸을 다시 한 번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꿈에서는 깼지만 아직 남아 있는 잔상이 불쾌한 감정을 생생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내던 시설보다는 숙소에 있으니 훨씬 평안을 찾는 기분이었다.
에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가볍게 씻어내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적시자 기분이조금은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니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
“벌써 시간이?”
시계를 보니 마침 조식을 먹을 시간이었다.
에린은 화장대 앞에 앉아 간단하게 외모를 정돈했다.
“으흐흠.”
가벼운 콧노래를 부르며 삐친 머리를 정리한 에린은 숙소의 접객실로 나갔다.
접객실로 나가니 채연이 벌써 나와서 앉아 있었다.
“언니!”
“아, 굿모닝.”
에린의 인사에 채연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일행 중에 유일한 여자인 둘은 열흘 사이에 꽤 친해져 있었다.
“자알, 자써요?”
에린이 어색한 한국어로 채연에게 물었다.
한국어를 가르쳐 달란 에린의 부탁에 서로 영어와 한국어를 교환해서 가르쳐 주는 중이었다.
“그럼 잘 잤지. 잘 잤어?”
“네. 잘 잤어요.”
매일 같이 악몽을 꾸고 있는 에린이었지만, 그 사실을 채연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싱긋 웃으며 채연의 옆에 앉을 뿐이었다.
달칵―
“오. 벌써 일어났어?”
채연과 에린이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재호가 나왔다.
재호는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를 탈탈 털며 반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은 오빠는요?”
“글쎄? 이제 일어나지 않을까?”
채연이 세은이 방문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세은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오빠!”
“잘 잤어요?”
“일어나셨습니까?”
각양각색의 인사를 받으며 세은은 힘겹게 한 손을 들어 대답했다.
“어…….”
세은의 목소리에는 아직 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열심히 남은 머리를 말리던 재호의 옆에 앉은 세은아 쓰러지듯 소파의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아침 먹으러 가아죠.”
“……가야지.”
“왜 이렇게 졸려 해요?”
“그냥 요즘 잠을 많이 자다 보니까 잠이 늘어서…….”
“아하. 그럴 만도 해요. 우리 계속 숙소에만 있었잖아요.”
재호가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옆에서 지켜보느라 둘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채연과 에린도 숙소 안에서 서로 공부에만 집중한 것이다.
덕분에 며칠 사이에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여자의 유대와 회화 실력은 꽤 늘었다.
그러나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채연이 손뼉을 치면서 제안했다.
“그럼 우리 오늘은 다 같이 쇼핑이라도 갈까요?”
“쇼핑?”
재호가 물었다.
“이 근처에 쇼핑을 할 만한 곳이 남아 있어?”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굳이 쇼핑이 아니어도 나들이 나가면 좋죠. 사실 미국에 와서 제대로 관광을 한 적이 없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
마침 마법진을 그리는 작업 역시 어제부로 다 끝난 상황이라 재호로서도 부담이 없었다.
“오빠는요?”
“……일단 잠 좀 깨고 얘기하자.”
“네네. 좋아요!”
아직 잠이 덜 깬 세은이 반쯤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이라도 된 듯 잔뜩 들뜬 재호와 채연, 그리고 에린은 빨리 조식을 먹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제 출발해요!”
채연이 에린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어디로 갈지 정했어?”
“네! 아주 큰 쇼핑몰은 없어도 근처에 드라이브 갈 만한 공원은 많다고 하더라고요.”
“근처에 도시가 없나 보네?”
“이 근처에 큰 도시가 없어요.”
재호의 말에 에린이 대답했다.
아침을 먹고 합류한 통역사가 열심히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에린과 채연의 회화가 빠르게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 통역사 없이 온전한 의사소통은 힘들었다.
관광을 한단 기쁨에 찬 일행과 달리, 세은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따라나섰다.
광활한 자연이라면 이계에 있을 때 질리도록 본 탓이었다.
그러나 일단 차를 몸을 싣고 빠르게 달리니 나름대로 나들이를 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뭐, 앞으로 고생할 테니 이렇게 쉬는 것도 좋지.’
수시로 마법진에 마나 공급을 해야 하는 재호를 보며 세은이 생각했다.
일행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에린만이 차 밖의 광경 대신 세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에린이 어색한 한국어로 세은에게 물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세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굳이 한국어 안 써도 돼. 편하게 영어로 해. 통역해 주는 분도 있으니까.”
“하고 싶어서 내가 하는 거예요.”
어색한 말투지만 천천히 한국어로 말을 하는 에린을 보며 세은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한국어로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에린은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배울 수 있어요?”
“뭐를?”
“싸우는 거요.”
“내일도 괜찮고.”
“그럼 저 그거 배우고 싶어요.”
“어떤 거?”
“저도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어요.”
에린의 표정은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왜요? 어차피 가르쳐 줄 거면 저도 사람들을 살리고 싶어요! 저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단 말이에요.”
“으음…… 이건 배우고 싶다고 배우는 게 아니라서.”
“저 아저씨 말론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랬어요.”
에린이 통역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도 맞긴 맞는데…….”
“제발요.”
세은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수련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 좀 곤란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으음…….”
끈질긴 에린의 질문에 세은이 난감한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 믿는 종교 있어?”
“아니요. 저 종교는 없어요.”
갑자기 왜 종교에 대해 묻는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에린이 대답했다.
세은은 간단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신앙심이거든, 물론 불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는 아니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얘기에 어느새 채연과 재호 역시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통역사도 상부에 보고할 만한 고급 정보가 나올까 싶어 통역을 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크게 숨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세은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한마디로 믿으면 돼. 이 힘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걸.”
“누구를 믿어야 하는데요?”
“에일린.”
“……누구예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에 모두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미 그런 반응을 예상한 세은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번도 못 들어봤을걸? 하여튼 사제라고 생각하면 돼.”
“아! 지금 말하는 게 전에 말한 다른 신의 이름이에요?”
저번에 세은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채연이 물었다.
“응, 맞아.”
세은은 선선히 대답했다.
“뭐, 그럼 안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볼까 생각은 했거든. 그럼 일단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지부터 해보자.”
“네!”
세은의 허락에 에린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세은의 머릿속은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에일린을 믿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마나를 느끼게 하는 게 더 쉬울 것 같은데…….’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봤던 일이었던 만큼 기회가 왔을 때 시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일단 오늘은 푹 쉬어.”
“네!”
훨씬 기분이 좋아진 표정으로 에린은 밝게 대답했다.
* * *
“……언제까지 명상해야 해요?”
“그런 생각이 안 들 때까지.”
“믿어야 하는 거라면서요. 명상이 효과가 있어요?”
에린이 지친 목소리로 물어왔다.
같이 통역을 하고 있는 통역사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로 벌써 삼 일째 하루 종일 명상만 하고 있었다.
둘이 가끔 대화를 할 때를 대비해서 삼 일 내내 실내에만 있으니 통역사가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세은은 정신을 가다듬는 방법이라고만 설명한 뒤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효과가 당연히 있으니까 시키지.”
털썩.
세은이 에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있으려니까 너무 힘들어요.”
재호가 열흘을 고생고생하며 만든 마법진이 한 번도 쓰이지 못한 채 옆에서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세은은 그 마법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마법 배워볼래?”
“그건 싫어요!”
세은은 그런 에린의 모습에 담담히 대답했다.
“그럼 명상 더 하자.”
“……그렇긴 한데.”
에린은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조용히 뭐라 중얼거리고는 다시 명상에 빠져들었다.
지금 세은이 에린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건,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한 준비였다.
신을 믿는 이유는 각양각색.
하지만 그 밑바탕엔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이 깔려 있었다.
신의 존재를 믿으면, 언젠간 나의 바람이 이뤄질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신에게 신심을 다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에일린이 지구에 있는 사람의 기도에까지 반응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세은 자신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상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정신을 단련시켜 준단 장점도 있으니 더욱 좋았다.
세은이 보기에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놓인 에린에겐 조금의 적응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은 온전히 실감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이 밀물처럼 그녀를 덮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는 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식으로 에린은 아침과 밤에 채연과 언어를 공부하고, 오후엔 세은과 함께 명상을 했다.
* * *
다시 열흘 정도 지나자 이제 자주 하는 말은 통역이 없이도 한국어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명상 역시 마찬가지로 일취월장해서 삼십 분도 힘들어 하던 명상을 지금은 세 시간까지 지속할 수 있었다.
에린의 발전을 지켜보던 세은이 어느 날 통역사를 들이지 않고 명상을 시작했다.
“어? 오늘은 통역사가 없네요?”
“안 불렀어. 없어도 될 것 같아서.”
“헤헤. 저 한국어 실력 많이 늘었죠?”
“응. 진짜 많이 늘었네.”
거의 9살 정도 나이가 차이 나다 보니 아주 어린 막내 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여동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에 세은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여튼 오늘은 조금 진도를 나가보자.”
“네!”
진도를 나간다는 말에 에린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말은 안 했지만 언제까지 명상을 해야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에린을 편하게 앉게 한 세은이 질문을 던졌다.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이거요.”
“정말로 이게 제일 하고 싶어?”
“네. 당연하죠.”
에린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배우고 있는 거잖아요.”
“그럼 그걸 간절하게 이뤄달라고 기도해 봐.”
“네?”
갑작스런 세은의 말에 에린이 되물었다.
“명상을 할 때처럼 다른 생각이 없는 상태로, 꼭 원하는 걸 이뤄달라고 기도해 봐. 신의 이름은 에일린이야.”
“지, 지금 갑자기요?”
“응. 도와줄 테니까 해봐.”
세은의 독촉에 에린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평소에 명상할 때처럼 집중해.”
“……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지나자 에린은 그제야 부끄러움을 털어내고 기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에린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세은이 신성력을 일으켜 에린의 몸을 감쌌다.
조금 더 편안한 상태에서 집중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은 더 지켜봐야겠어.’
아무래도 신전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신성력이 아닌 만큼 기간을 정하고 지켜보기로 생각했다.
세은의 시선이 기도에 집중하고 있던 에린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