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교황이다-60화 (60/225)

# 60

18. 새로운 제안(2)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가 세은에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래도…….”

소녀가 말을 더 이어 나가려 하자 세은이 제지했다.

“일단 환자를 치료해야 하니 나중에 얘기해.”

“아, 네…….”

막상 세은을 직접 마주하니 조금 위축된 모습의 소녀는 살짝 풀이 죽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채연이 소녀에게 말했다.

“아, 언니. 고마워요. 제 부탁을 들어줘서.”

“아니야. 힘든 일도 아닌걸.”

“아니에요. 이렇게 들어오게 해준 것도 언니죠?”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으로도 충분히 그 정도는 유추할 수가 있었다.

통역을 통해 소녀의 감사를 들은 채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려운 일도 아닌걸. 그러고 보니 전에 이름도 못 들었네? 이름이 뭐야? 나는 정채연이야.”

“알아요.”

“응? 나를 알아?”

“올림픽에 나왔던 선수죠? 얼굴이 기억에 남아요.”

“그래? 그거 신기하네!”

“제 이름은 에린 클로에예요.”

“에린 클로에?”

“네.”

“이름이 예쁘다.”

“언니도 이름이 예뻐요.”

“호호. 칭찬 고마워.”

여자들이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 일행이 다음 병실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세은은 이번에도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우웅―

이전 병실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그 모습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그건 에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너진 빌딩에 갇힌 자신을 꺼내서 중상을 단숨에 치료해 주었던 신의 모습이 다시 한 번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마치 구세주를 보는 것 같았다.

우우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환자의 치료가 끝났다.

병실 안 모든 사람들은 거의 세은의 신도가 되어 있었다.

특히 에린이 가장 일렁이는 눈빛으로 세은을 바라보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할 일은 모두 끝낸 세은이 에린에게 물었다.

그러나 넋이 나간 에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통역사가 손으로 툭 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네? 네!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그, 그러니까요. 일단 정말로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고, 빌딩에 갇혔을 때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야.”

에린의 말을 들은 세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살아. 그러면 돼.”

세은이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에린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도 가르쳐 주세요!”

앞뒤가 다 잘린 에린의 말에 세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우는 법이요. 저도 싸우고 싶어요. 저 뉴스 인터뷰도 봤어요. 제일 강한 사람이라면서요?”

“각성자는 타고나야 하는 거야.”

통역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에린에게 말했다.

“나도 알아요. 그래도 물어보고 싶어요. 통역해 줘요!”

어린아이의 치기라고 생각한 통역사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에린의 말을 통역했다.

“굳이 싸울 필요 없어. 가족들이랑 잘 살아.”

“가족이 없어요.”

“응?”

예상치 못한 에린의 말에 일행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연락이 되지 않아요. 집은 없어졌는데 어느 시설에도 없데요.”

“아직 시설에 없을 수도 있지.”

채연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마 시설에 없다면 이 애의 말이 맞을 겁니다. 현재 도심에 민간인는 없는데다, 딸만 둔 채 다른 곳으로 갈 부모는…… 없죠.”

“아…….”

통역사의 말에 채연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재호의 표정도 함께 어두워졌다.

“그래도 안 돼.”

세은이 말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굳이 싸울 필요가 없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살렸으면 책임져야죠!”

에린이 소리쳤다.

“제가 하고 싶은 건 복수예요!”

세은은 그런 에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많이 본 표정이다.

이계에서 가족을 잃고 군대에 입대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주로 저러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극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안 그러면 어차피 의미도 없는 거 확 죽어버릴 거예요!”

“말조심해!”

통역사가 에린의 마지막 말을 듣고 역정을 냈다.

이건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놓으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통역해 주세요.”

대충 에린의 표정과 어조로 무슨 말인지 알아챈 세은이었지만, 통역을 요구했다.

“아,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해주세요.”

이런 표정은 많이 봤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 없었다.

하지만 문득…… 한 명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요.”

“좋아.”

“예?”

통역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다름 아닌, 싸우는 법을 가르쳐 달란 것이다.

각성자가 아닌 사람이 싸우는 법을 배워봤자 인외의 것들과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

그러나 세은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안 되면 깔끔하게 포기하는 거야.”

생각해 보면 각성자가 아니라도 마법이나 오러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나와 오러가 수련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것들을 느끼면 된다는 말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교황의 자리에 있을 때 책임지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정말요?”

“그래.”

“그게 가능합니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재호가 물었다.

각성자를 인위적으로 키울 수 있다면 왜 여태까지 그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보려고요.”

“헐, 가능하면 진짜 대박이겠네요?”

“그렇지?”

채연과 재호 역시 통역사처럼 황당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혹시 세은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도는 해봐야지.”

말을 하며 세은이 미소를 지었다.

* * *

“일단 말이 안 통하니까 힘드네.”

세은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숙소의 접객실엔 세은과 채연, 재호 그리고 에린이 앉아 있었다.

일단 일행끼리 얘기를 하기 위해 통역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에린은 딱히 보낼 곳이 없어서 같이 앉아 있던 것뿐이었다.

“헤헤.”

말이 통하지 않았으나, 에린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이렇게 웃고 있으니 낮에 억지를 쓰던 모습과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하긴, 정말로 일반인도 각성자가 될 수 있다면…… 통역이 없는 게 낫죠.”

말도 안 될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의 가치를 알고 있는 재호가 말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런데 세은 씨가 생각하는 방법이 어떤 겁니까?”

만약 세은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굳이 통역을 밀어낼 필요가 없었다.

세은만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거 나름대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전에 재호 씨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다만 이건 제가 아니라 재호 씨가 도와줘야 해요.”

순간 재호가 어깨를 흠칫했다.

자신이 도울 일이 있다는 사실에 급격하게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제가요?”

“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세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작은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으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뭐…… 하루 만에 안 끝날 것 같기는 하네요. 워낙 마나가 많이 필요한 작업이라.”

“아…….”

세은이 말했다.

“케인이 있으면 편할 텐데 어쩔 수 없죠. 그냥 마정석이나 하나 얻어와야겠네요.”

오러는 신체를 단련해야 하니 인위적으로 느끼게 하기엔 상당한 시간과 무리가 따랐다.

마나에 대한 교감이 있으면 되는 마법사가 가장 나을 것 같았다.

‘재능이 있으면 각성자가 됐을 것 같기는 하지만…….’

각성자가 되는 기준이 알려진 건 하나도 없었다.

사실 각성자에 대해 알려진 사실 자체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나마 알려진 것도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의해서였다.

그러니 한 번 시도해 볼 만했다.

“사노보단 케인한테 연락하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전형적인 관료 스타일인 사노보다, 케인에게 마정석을 얻어내는 게 쉬울 것 같았다.

“그럼 통역사한테 물어볼까요?”

“으음. 그래도 일단 사노부터 찾아야 할걸?”

“그럼 일단 물어볼게요! 어차피 이제는 통역도 불러야 하고요.”

“응. 그래.”

대화가 마무리되자 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통역사를 데리러 나갔다.

* * *

“너무 작은 거 아닙니까?”

케인이 가져다준 마정석을 보며 재호가 물었다.

그의 말대로 케인이 구해준 마정석은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아주 작은 크기였다.

그러나 세은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대충 마법진을 종이에 그린 세은은 재호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그리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세은은 케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마정석이 필요하다고?」

「그래.」

「마정석은 어디다 쓰려고 하나?」

「비밀인데.」

「허허. 그래도 목적은 알아야 줄 수 있지 않은가?」

「나중에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실패하면 모른다는 말이군.」

잠시 고민하던 케인은 이내 흔쾌히 대답했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라면 괜찮지. 금방 준비해 주겠네.」

「고마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케인은 말이 잘 통할 것 같았다.

마법에 대한 순수함 호기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세은이 마정석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도 정말로 어디에 사용할지 궁금한 표정이 역력했다.

마땅한 마법사가 없는 지금, 케인을 섭외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잠겼다.

“다 그렸습니다.”

생각에 잠긴 세은에 귀에 재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럼 이제 마정석을 가운데 잘 꽂으면 됩니다.”

“예!”

푹―

재호가 마법진에 마정석을 꽂자 세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법진에 천천히 마나를 불어넣으면 됩니다. 어차피 오늘 하루에 다 안 될 테니, 무리하지 말고 하세요. 괜히 마나 고갈 오면 일정만 길어져요.”

“하하,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재호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위이잉―

마법진이 마나를 흡수하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재호가 손을 대고 있는 선부터 마법진이 마나를 머금어 파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뚝뚝―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호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재호는 인상이 점점 찌푸려지면서 마나를 불어넣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허억. 허억.”

그러나 결국 마법진의 십 분지 일이 조금 넘게 파란색으로 물들었을 때, 재호가 포기를 선언했다.

“허억. 더 이상 안 되겠네요.”

우웅―

세은이 가만히 재호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며 말했다.

“생각보다 적네요. 그래도 일주일이면 될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아,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요.”

괜히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재호가 고개를 숙이자 세은이 말했다.

“일단 이런 식으로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으면 됩니다. 쉬러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재호는 쉬러 가기 전 마법진을 바라보며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는 다짐을 다졌다.

원래 세은이 일주일을 생각했다니,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꼭 일주일 안에 마법진을 완성하고 말 거라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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