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18. 새로운 제안(1)
미국은 이번 사태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국가의 관리 하에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던 게이트가, 그렇지 않고 커다란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국가를 믿었던 이들은 이번 사태로 모두 공포에 떨었다.
특히 오션시티와 같이 도심에 게이트가 존재하던 곳들은 더욱 그러했다.
덕분에 때 아닌 이사 열풍이 불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 일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다른 국가들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몇 번의 실패로 게이트 탐사를 포기한 국가들이 힘을 모아 게이트 탐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번 오션시티의 사태와 한국에서 게이트 소멸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이들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무료하네요.”
채연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벌써 일주일을 넘게 아무것도 안 하며 숙소에 있다 보니 지루함이 느껴졌다.
최대한 빠른 수습을 위해 사노 또한 현장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른 통역사를 붙여주기는 했지만, 오션시티 근처의 숙소를 받았기 때문에 관광을 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일이라도 도울까?”
옆에서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던 재호가 물었다.
재호의 제안에 채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니 쉬고 있으래요. 말도 안 통하고 손님이기도 하고요.”
“그래?”
“그냥 보여주기 싫은 거지.”
기다란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있던 세은이 말했다.
“리치에게서 나온 부산물이나 언데드에 대해 조사하는 걸 보면 우리와 결과를 공유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응. 리치한테서 나온 부산물은 미국 애들이 다 가져갔거든.”
“아아…….”
“사냥이 아니라 복구 같은 건 사실 우리보다는 중장비가 더 도움이 되기도 하고.”
“그래도 빌딩 잔해 수색에는 중장비보다 우리가 나을 텐데…….”
“미국도 각성자 많잖아.”
“아! 맞아. 그럼 첫날에 구해준 사람들이나 보러 갈까요?”
“누구?”
“처음에 우리가 구조한 사람들이요!”
“됐어. 영어도 못하는데 괜히 가서 피해만 주지.”
“에이! 오빠 무슨 말이에요!”
채연은 부정적인 세은의 말에 반박하며 말을 이었다.
“오빠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걸요? 카메라에 찍힌 모습들이 방송을 탔잖아요. 어렴풋하긴 했지만.”
“방송이야 케인도 나오고, 다 나왔잖아.”
“케인도 오빠를 칭찬했는걸요? 오빠가 아니었으면 막을 수 없었다고요.”
기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래봤자 자국인을 더 좋아하지.”
“아니라니까요. 안 그래도 제가 저번에 도와줄게 있나 다녀왔는데요, 다들 오빠를 보고 싶어 해요.”
“나를 왜?”
“특히 첫날에 오빠가 건물에서 구해준 사람들이 꼭 보고 싶데요. 제가 일행인 걸 알고 부탁하더라고요.”
“죽게 놔둘 수도 없는데 뭐.”
“그래도 그 사람들은 고마운 거죠. 특히 맨 처음에 구한 애가 오빠한테 꼭 고맙다고 하고 싶데요.”
채연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숙소에만 있는데 우리 가봐요.”
“흐음.”
세은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심심했던 재호도 말을 보탰다.
“한 번 가보죠. 어차피 숙소 근처에만 있는 것도 질리는데요.”
재호까지 그렇게 얘기하자, 비로소 세은은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럼 우리 가봐요.”
“네! 준비할게요.”
“저도 통역사 불러오겠습니다.”
할 일이 생기자 활기가 도는 채연과 재호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디보자 모자가…….”
그 모습을 보던 세은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 * *
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세은은 묘한 감흥을 느꼈다.
멀리 보이는 부서진 도심의 모습은 묘하게 이계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 사는 건 마찬가지네.”
세은의 혼잣말을 들은 채연이 물었다.
“네?”
“아무것도 아니야.”
“아하, 거의 다 왔어요.”
“벌써?”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멀쩡한 건물이 외곽에 있으니까요.”
“그래, 하긴 그렇겠네.”
“오빠가 가면 다들 좋아할걸요?”
전에 자신이 구한 사람들을 만나러 방문했을 때 세은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던 채연이었다.
“글쎄다.”
세은이 대답했다.
“도착했습니다.”
채연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통역사가 말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도우면 되는 거예요?”
“미리 물어보니 구호 물품 정리와 부상자 간병이 있다고 합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우리는 물품 정리하고 오빠는 부상자를 보면 되겠어요!”
“부상자가 왜 병원에 안 가고 여기에 있어?”
“병원 건물이 부족해서 경상자들은 이곳에서 요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통역사의 대답에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세은이 부상자들의 치료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사태가 사태인지라 경상자가 아니면 사망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미국의 지침상 각성자들의 치료가 우선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치료가 선행되었다.
“그럼 나는 부상자들을 보면 되겠네.”
“네네, 다행이네요. 할 일이 있어서. 다른 날에는 다른 시설도 찾아가는 게 어때요? 부상자들도 여기저기 많을 거잖아요.”
“그건 상황을 조금 보고.”
이 시설의 경상자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인해야 했다.
자신이 필요 없다면 굳이 멀리 있는 다른 시설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
채연은 무엇이 그렇게 신나는지 계속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네! 일단 우리 빨리 내려요.”
일행은 차에서 내려 시설로 들어갔다.
시설은 매우 북적거리면서도 어딘가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다.
“어! 저번에 왔던 언니다!”
“어디?”
“언니!”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 채연을 발견한 어린아이들이 우르르 채연에게 몰려왔다.
비록 말이 잘 통하지 않지만 채연은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했다.
“애들이 엄청 따르네?”
“저번에 와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았거든요.”
재호의 말에 채연이 대답했다.
“그리고 얘들 전부 혼자예요.”
“응?”
갑작스런 말에 재호가 반문했다.
“이번에 가족이 실종되거나 사망한 애들이요.”
“아…….”
애당초 사망자가 그렇게 많았는데 가족을 잃은 사람이 없을 리 없었다.
재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하루 와서 일했을 때…… 애들이 너무 잘 따르는 거예요. 어차피 저는 한국으로 갈 텐데, 괜히 정들까 봐 안 왔거든요. 며칠 생각해 보니까 있는 동안이라도 봉사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아…….”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은은 통역사에게 물었다.
“부상자들은 어디죠?”
“아, 부상자들은 저 안쪽입니다.”
“아! 같이 가요!”
세은이 혼자 움직이려고 하자 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에 다시 온다고 말 좀 해주세요.”
너무나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두고 채연이 세은을 따라 더 안으로 들어갔다.
걸어가던 중에 생존자들이 그를 알아봤다.
“아! 저 사람은?”
“우리를 도와준 사람이잖아!”
“헤이! 미스터!”
세은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일행에게 몰려들었다.
통역사가 우선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잠시 물러나게 했다.
“지금 부상자들을 보러 가고 있으니 잠시 후에 다시 오시죠.”
“아! 맞아. 그때 내 부상도 깔끔하게 치료해 줬어.”
“그런 게 가능해?”
“그럼! 난 마치 신을 보는 것 같았다고!”
세은에게 구조를 받았을 때 부상 입었던 사람들은 세은의 치료를 받았다.
그 사람들의 눈이 마치 신앙을 보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상처가 낫는 기적은 두 눈으로 보지 못하면 모를 거야.”
“허. 순식간에 상처가 낫는다니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증인이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이! 그럼 마침 부상자를 치료하러 왔다니까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실제로 봐야지, 그럼!”
병동까지 따라올 것 같은 기세에 통역사가 황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안 됩니다. 질서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아! 단순히 보기만 한다는데 왜 안 된다는 거야?”
“맞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기만 할 거라고!”
그러나 이미 불이 붙은 사람들을 제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시설에 상주하던 각성자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사태를 정리할 수 있었다.
“휴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생존자들의 멘탈이 조금 불안정하기는 합니다.”
“어쩔 수 없죠.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렇죠…….”
통역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조국에서 일어난 참사가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통역사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세은은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 않고 조용히 걸었다.
“여기가 병동입니다.”
침묵은 일행이 병동에 도착하고서야 깨졌다.
임시로 마련된 병동에서는 타박상이나 골절 같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미리 연락을 받은 의사와 간호사가 세은을 반갑게 맞이했다.
“치료사가 어느 분이세요?”
“이분입니다.”
통역사가 세은을 가리켰다.
“아! 이분이세요? 몇 명까지 치료가 가능한지 물어봐 주시겠어요?”
세은은 질문에 간결하게 대답했다.
“전부.”
“저, 전부요? 여기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70명은 되는데…….”
“문제없다고 전달해.”
세은의 말에 의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다면 굳이 가장 중한 환자들의 리스트를 뽑을 필요도 없었네요.”
통역의 말에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시작하면 되는 거죠?”
“네, 그렇다고 합니다.”
세은이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하이!”
다리가 골절되어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가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
“하이.”
세은은 그의 인사를 가볍게 받고는 바로 다리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우웅―
환한 신성력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안 그래도 의사와 통역사의 대화로 인해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환자들이 경이로운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다 됐습니다.”
“버, 벌써 말입니까?”
경이로운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통역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나 이미 다리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없어진 환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 마이 갓…….”
제대로 서지도 못할 정도로 다리가 골절되었던 환자가 순식간에 낫는 것을 본 의사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세은은 태연하게 바로 옆 침대로 이동했다.
웅―
이번에도 순백의 빛이 짧게 병실을 가득 채우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환자의 부상이 전부 완쾌되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세은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는 신이라도 알현한 표정으로 세은에게 감사를 표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세은이 보여주는 이적에 연신 감탄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각성자가 있지만 치료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있단 사실을 처음 들었다.
‘국가에서 숨기고 있었나? 그런데 그렇다면 굳이 이곳에 올 리가?’
의사는 잠시 정부를 의심했지만, 다른 곳에 이런 치료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내 의심을 접었다.
그 와중에도 세은은 한 명씩 모든 병실의 환자들을 치료해 나갔다.
처음에는 세은을 병실로 안내해 준 뒤, 채연과 재호를 다른 곳에 안내해 주려던 통역사도 넋을 잃은 채 그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빛이 사라지고 나면 사람의 부상이 모두 낫는 모습은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여기는 다 끝났네요. 다른 병실은 어디에 있나요?”
“아, 아! 물어보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통역사는 의사에게 다음 병실에 대해 물었다.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의사도 정신을 차리고 세은을 안내해서 병실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아! 막지 마요!”
“나중에 오라니까!”
“그냥 인사만 하고 싶은 거라고요!”
시끄러운 상황에 일행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막고 있던 각성자들이 한 소녀를 붙잡고 있었다.
“여기예요, 여기!”
세은을 발견한 소녀가 격하게 손을 흔들어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 다 같이 인사하라니까!”
끈질긴 소녀의 행동에 결국 여자 각성자가 소녀를 붙잡아 끌고 가려고 했다.
“아! 쟤는?”
“누군지 알아?”
재호의 질문에 채연이 대답했다.
“네. 전에 왔을 때 꼭 오빠한테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던 애예요. 빌딩 지하에서 죽어가는 걸 구해줬다고.”
“응. 누군지 알아. 처음에 구한 애네.”
“그냥 인사하겠다는 건데 너무 막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채연이 소녀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다 같이는 안 돼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단 말이에요!”
“뭐라는 거예요?”
채연의 물음에 통역사가 말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답니다. 저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그래도 쟤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저번에도 꼭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이…….”
“그리고 쟤도 혼자란 말이에요. 이제.”
채연이 너무 안타까워하자 세은이 말했다.
“한 명 정도는 상관없겠지. 알아서 해.”
“정말요?”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은의 허락을 받은 채연이 통역사에게 말해 소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